윤보선 후보의 기자회견은 박정희 후보는 물론이고, 공화당과 군사정권에 대해 사실상의 폭탄 선언이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군사정부 내에 있다는 발언이고, 둘째는 박정희 의장이 전력에 비춰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니라고 시사한 점이다. 윤보선씨는 분명히 ‘박정희 의장은 여·순사건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며 그의 전력이 공산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역사적인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의 ‘사상논쟁’은 이렇게 해서 불이 붙은 것이다.
흥분한 기자들은 앞을 다투며 우체국으로 달려가 기사를 송고했다. 24일자 도하 석간신문 그리고 전국의 지방신문들은 윤후보의 전주 ‘폭탄 선언’을 톱으로 보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선거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유권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비상한 관심을 표명하게 됐다.
서슬이 퍼런 군사정권 하에서 윤보선씨가 만일 허무맹랑한 발언을 했다면 과연 무사할 것인가. 온 국민의 시선이 박정희·윤보선 두 후보에게 집중됐다. 국가 권력을 한손에 쥐고 있던 최고회의가 24일 오후에 긴급 소집됐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에 의해 발표된 최고회의의 입장은 예상한 대로 심각했다. 이후락 실장은 “윤보선씨의 발언은 선거운동에 관한 발언이기보다 국가안보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만큼 최고회의는 비상한 관심으로 그의 발언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고 있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논평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서인석 공화당 대변인도 논평을 내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사가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을 쓰게 됐다는 것은 선거 분위기를 극도로 해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후락 공보실장이나 서인석 대변인의 논평을 들으면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윤보선 후보를 수행한 기자들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그것은 최고회의나 공화당은 윤보선씨의 폭탄 발언에 대해 ‘국가 안보에 관계되는 문제’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 등을 들먹이면서도 ‘박정희 의장의 공산당 경력과 여·순반란사건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해명이나 부인하는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윤보선씨의 발언이 전혀 금시초문이었던 나로서는 긴장 속에서도 안도의 숨을 돌리게 됐다. 만일에 윤씨의 발언이 허위요 조작된 거라면 군인들은 그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윤제술씨를 만나서 박의장에 관한 얘기를 듣고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대통령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 두 사람의 대결로 압축될 게 분명해졌다. 그때부터 ‘국민의 당’ 허정 후보를 비롯한 여타 후보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오전에 기자회견을 마친 윤보선 후보는 그날 오후 전주에서 1만5000명이라는 많은 청중이 모인 가운데서 성황리에 유세를 마칠 수 있었다. 유세를 마치고 여관에 돌아온 후 중앙에서 급히 달려온 간부와 유세반이 한자리에 모여 사실상 민정당 확대 간부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론은 ‘현 시점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박정희 의장이 공산당 당원으로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간부들에 따르면 최고회의는 앞으로 윤후보에 대한 고발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초법적(?)인 과격행동으로 나올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박의장의 선배인 예비역 3성장군 두 사람과 접촉하고 박의장의 군 경력에 대한 증언을 확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으며 예비역 고위장성들에 대해 일종의 함구령이 내려진 것 같다는 것이다.
문제는 ‘종고산아 말하라’고 외친 윤제술씨나 ‘전주 폭탄 발언’을 감행한 윤보선 후보 모두 그들 발언에 대해 확실한 증거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믿을만한 사람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그들이 제시한 증거의 전부였다. 만일 그 시점에서 군사정부나 공화당에서 ‘박정희 장군은 공산당원의 경력이 없다. 그뿐 아니라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일도 전혀 없다’며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고 나선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난상토론 끝에 윤 후보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나에게 지시했다. “이보게, 만사를 제쳐놓고 오늘밤 안으로 서울로 올라가게. 도서관이나 신문사를 뒤져서 박정희가 사형 언도(사실은 무기 언도였다)를 받은 증거를 찾아보도록 하게.”
나는 뜻하지 않게 중대한 임무를 맡게 돼 그날 밤(24일) 호남선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해야 할 일은 첫째 여·순반란사건은 언제 일어났으며, 둘째 그 내용은 무엇인가, 셋째로 주모자에 대한 재판은 언제 어떻게 결말이 났는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처음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근무했던 동아일보사다. 조사부에 들러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내용은 쉽게 알아낼 수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1949년 2월경에 있었던 군법회의 기사는 보관지에서 누락되고 없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소공동 근처의 시립도서관에서 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서울 고등군법회의가 박정희 소령에게 내린 판결에 관한 기사를 실은 지면이 어떤 신문을 막론하고 빠지고 없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빼버린 게 분명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즉시 을지로 입구 부근에 있던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발견했다. 군사정부의 용의주도하고 민활한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모든 신문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들른 곳이 경향신문사였다. 친하게 지냈던 신문사 간부의 협조를 얻어 조사부에서 보관지를 뒤졌다. 마침내 박정희 소령에 대한 2단짜리 공판기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총살형 1명, 무기 4명, 군법회의서 73명에 언도’라는 제목으로 된 1949년 2월18일자 2단짜리 기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방부에서는 작년 10월 반란사건(여·순 반란사건) 이래 장교를 비롯해 사병에 이르기까지 1000여 명을 검거해 취조중에 있던 중 조사가 끝난 자들은 지난 8일부터 군법회의에 회부중에 있었는데, 지난 13일까지 판결언도를 받은 자는 73명에 달하고 있는 바 그중 전 마산 18연대장 최남근은 총살 언도를 받았으며 그외 김학림, 조병건, 박정희, 배명종 등은 무기 징역을 받고, 기타는 15년부터 5년까지의 징역 판결이 있었다”
박정희 무기징역 언도의 증거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돼 박정희 소령에게 무기 언도가 내려진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친김에 서울신문(현 대한매일)에 들러 신문철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신문에서도 1949년 2월17일자 지면에서 ‘군법회의 숙군 공판 최남근 일파에 총살 언도’ 제하의 2단짜리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내용은 이랬다.
“건전 한국군을 건설하고자 국방부에서는 특히 그동안 엄격한 숙군이 시행됐거니와 이와 관련된 제16연대장(경향신문에는 18연대로 돼 있었음) 육군 중령 최남근 일파에 대한 공판은 지난 8일부터 동 13일까지 6일간에 걸쳐 서울 고등군법회의에서 집행됐다. 즉 심판관 김완용 중령 이하 6명, 검찰관 이찬형 중령 이하 1명이 참석한 가운데 심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판결이 언도됐다고 한다. 총살 중령 최남근(연대장), 무기징역 소령 김학림, 동 조병건, 동 박정희, 동 배명종…”
나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기사를 카메라에 담은 후, 현상까지 해가지고 대전으로 내려가 유세팀에 합류했다. 윤보선 유세팀에서는 내가 발굴(?)한 ‘경향신문’ ‘서울신문’ 기사를 당분간 극비에 부치기로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증거물을 공개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박정희 후보에 대한 ‘무기언도’, 그것도 여·순반란사건과 군대 내의 ‘숙군(남로당 관련)’과 연관돼 무기언도가 내려졌던 증거를 확보하게 된 윤보선 진영에서는 자신감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박정희 후보의 ‘과거 경력’과 ‘사상 배경’에 공격을 집중했다. 급기야 제5대 대통령선거는 초반부터 ‘사상논쟁’이라는 뜨거운 불 속으로 빠져들게 됐다.
윤보선 후보가 전주 폭탄 선언에 이어 25일 이리 유세에서도 1만여 명의 청중을 앞에 놓고 ‘박정희 의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봉을 의심한다’고 공언하자 격노한 공화당은 윤씨를 이날 오후 사직당국에 고발했다. 윤씨의 언동은 대통령선거법 148조 ‘허위 사실 유포죄’와 149조 ‘후보자에 대한 비방죄’에 저촉된다는 것이다.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24일 오후에 소집된 최고회의의 태도였다.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윤씨의 발언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던 최고회의에서는 ‘윤보선을 즉각 구속하라’는 주장까지 대두했다.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도 최고회의에서 윤씨를 구속하자는 논의가 있었냐는 기자들 질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답변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윤씨에 대한 구속 주장을 시인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야당은 최고회의의 위압적인 태도를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민정당의 김영삼 임시대변인은 “그러한 위협에 놀라지 않겠다. 그만한 정치적 발언(전주 발언)은 선거 기간중 대통령후보로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공화당이 이를 고발한 것은 가소로운 일이다”라고 반박했다. ‘국민의 당’ 송원영 대변인(후에 국회의원)도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는 것 같다는 윤보선씨의 발언은 중대한 문제다. 그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밝혀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의 김대중 대변인은 “정부 안에 여·순반란사건 관련자가 있다. 박의장의 사상을 의심한다는 내용은 중대 문제로서 그 진상이 국민 앞에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여·순반란사건과 박정희’ 문제가 윤보선씨에 의해 제기되고 최고회의와 공화당이 이를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고발까지 하자 온 나라가 사상 논쟁의 물결에 휘말리게 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박정희 후보 자신을 비롯해서 최고회의나 공화당은 ‘박정희는 공산당원을 한 일이 없으며 여·순반란사건에 관여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떳떳하게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따라서 유권자의 의심은 날이 갈수록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무렵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윤보선씨의 폭탄발언이 있은 다음날인 9월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 교정에서는 재야 6개 정당의 공명선거 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자민당 위원장인 김준연씨는 1961년 5월26일자 미국 타임지의 보도내용을 폭로했다. 타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정희 소장은 1948년 군 반란을 음모하는 데 일부 관련된 사실이 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씨의 장교들에 의해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보도된 바와 같이 그후 동료 상관들의 구명 운동으로 석방됐다. 지금 그는 명백하고 강력한 반공주의자로서 육군의 작전참모부장직에까지 이르렀다. 박장군은 정부의 부패에 불만을 품고 지난해 일찍이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생의거로 이승만씨가 추방됨으로써 그의 계획은 일단 좌절됐다.”
사상논쟁에 불이 붙기는 했으나 관련증거는 솔직히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울·경향 두 신문의 기사, 그리고 ‘타임’지의 보도 내용 등이 고작이었다. 야당측에서는 많은 예비역 고위 장성을 만나 그들로부터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아내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40년 전의 군사정권 시대는 예비역 장군들이 쉽게 입을 열 수 있을 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면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온 나라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여·순반란사건의 진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박정희 의장 관련설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당시 지창수 상사가 주동한 사건의 전개과정은 거의 밝혀졌으므로 여기서는 금년에 방영된 MBC 보도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MBC는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여수 14연대, 반란’에서 “10월19일에서 반란이 진압된 10월말까지 최소 2600명의 죽음이 확실시되며 행방불명자 4300명,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죽음의 행렬이 있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고 피해내용을 전하면서 “여·순사건 후 7개월 동안 처벌된 군인 숫자만 4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박정희씨와 여·순반란사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건 이후 숙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좌익혐의 여부보다 군 내부에 뿌리박힌 남로당 조직체계였다. 바로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박정희 소령이다. 여수 진압을 위해 광주작전 참모본부에서 정보 장교로 근무하던 박정희는 남로당에서 ‘군사 총책’이었다는 것이다”
MBC는 박정희씨에 대한 군사재판 기록에 대해서 “그가 남로당 당원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문서는 재판기록이다. 그의 죄목은 반란기도죄와 군병력제공죄였다”며 “1945년에 남로당에 가입해서 군내에 비밀 조직을 심고 대한민국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박정희 소령이 무기형의 집행을 면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박정희가 군내의 조직을 우리한테 제공했다. 시초에는 남로당의 전모를 몰랐다. 군대 조직을. 그런데 그분(박정희 소령)을 조사함으로써 전모의 일부가 드러났다”는 군사 평론가 김점곤씨의 회고담을 소개하고 있다.
태풍 몰고온 간첩 황태성 사건
사상논쟁의 모체는 여·순반란사건이 분명하다. 야당이 확실한 증거도 확보하지 못하고 문제 제기에 급급했던 것은 경솔한 처사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사자인 박의장이나 공화당측의 대응조치는 더욱 졸렬한 감이 없지 않았다.
국회의원선거도 아닌 대통령선거에서 후보자의 전력과 사상 문제에 대한 철저한 조명은 당연한 게 아닌가. 충분한 해명도 없이 ‘국가안보’ ‘매카시즘’ 등으로 일시적인 사태 호도에 급급한 것이 도리어 국민의 의혹을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을까. 대통령선거 투표일을 2, 3일 앞두고 남로당에 가입한 일이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일조차 전면 부인하는 만용(?)을 발휘했지만 진실을 숨긴다는 것은 손으로 태양을 가리는 격이 되지 않겠는가? 차라리 사상 문제에 대처함에 있어 보다 더 정직하고 정정당당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선거 초반에 벌어졌던 사상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첫째는 ‘대통령 선거 하나마나…’라고 체념했던 분위기가 ‘이제 선거를 해볼 만하다’는 방향으로 반전된 것이고, 둘째는 허정씨를 비롯해서 난립한 야당 후보들을 제치고 박정희 후보와 상대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는 윤보선씨뿐이라는 여론이 환기됐고, 셋째 공산주의자, 반란 관련자 등의 극단적인 공격을 받고도 제대로 변명을 못하는 박정희 후보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의심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기 때문이다.
9월25일 오전, 윤보선 후보의 대전 유세장에는 예상을 뒤엎고 3만 청중이 모여들었다. 여야를 통틀어 10·15 선거전이 시작된 후 최대의 청중이었다. 윤후보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이 나라의 운명을 여러분의 손으로 결정해야 할 중대한 시기임을 명심해달라”고 외쳤다. 이날 오후 인구 5만의 고도 공주에서는 8000명의 청중이 모이기도 했다. 같은 날 4·19 의거의 진원지인 마산에서는 공화당의 찬조 유세가 있었으나 약 1000명 가까운 청중이 모였을 뿐이라는 소식이었다.
목포의 기적, 전주의 폭탄 발언 등의 영향으로 중반전으로 서서히 들어선 10·15선거는 어쩌면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윤후보 진영에 불어넣었다. 나는 선거의 판가름은 박정희 후보의 고향 가까이 있는 대구에서 결판이 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구는 분명 정치 도시가 아닌가. 대구가 흔들리면 영남 전체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대한 대구행을 앞두고 서울에서 또 하나의 엄청난 사상논쟁 자료가 튀어나왔다.
25일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재야 6당 공명투쟁위원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충격적인 내용의 삐라(전단)가 뿌려졌다. 삐라는 ‘구국청년동지회’ 명의로 돼 있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세칭 북괴 간첩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국민 앞에 밝혀라’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당시 박정희의 실형(實兄)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 ‘황을 박정희의 형수가 수차례에 걸쳐 면회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황태성 사건의 관련자로 실형을 받은 자를 형집행중에 석방한 이유는?’ ‘박정희씨가 형식상 이끄는 공화당 내에 6·25 당시 부역자 및 그의 가족이 월북한 자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공화당의 중견 간부인 김모씨가 6·25 당시 부역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등이다. 삐라를 입수한 윤보선 진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삐라 내용이 사실이라면 근본적으로 선거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후보가 남로당 당원이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시점에 그의 친형도 공산당 당원이었다니…. 거물 간첩 황태성이 박정희 후보 형수를 만나 당대의 권력자인 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의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다니.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사정부는 윤보선씨의 폭탄 발언을 국가안보에 관한 문제로 규정한 바 있지만 그들의 말대로 10·15 선거야말로 국가안보를 가늠하는 선거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간첩 황태성 문제에 대해 백방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을 무렵 ‘국민의 당’ 허정 후보가 선수를 치고 나섰다. 27일 아침 허정씨는 “간첩 황모 사건의 진상을 석연하게 밝혀라” “박정희 의장이 다액의 수표 4장을 일본 모회사로부터 받았다는 일본 잡지 보도의 진상을 밝혀라”고 요구했다. 사상논쟁의 핵심이 여·순반란사건에서 간첩 황태성 사건으로 옮겨가는 듯했다. 선거의 분수령을 이루게 될 윤후보의 대구 유세를 앞두고 영남지방, 특히 대구 일대에서는 황태성에 대한 루머가 난무했다.
10·1 폭동사건의 근거지가 대구였던 만큼 간첩 황태성과 박정희 형제의 특수 관계를 둘러싼 소문이 꼬리를 물고 흘러 다녔다. 그러면 간첩 황태성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던가? 박정희 일가와 황태성과의 관계는 어느 정도였던가? 선거의 방향을 바꾸어놓은 황태성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 황태성을 알아보기로 하자.
황태성은 1906년 상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연희전문 시절 퇴학할 수밖에 없을 만큼 집안이 가난했다. 일제시대 때 ‘김천 청년동맹’ ‘경북 청년동맹’ 등에 관계했고 ‘조선공산당’에 가입해서 ‘경북책임위원’이 되기도 했다. 1928년과 1931년에 걸쳐 도합 세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경북 대표로 조선공산당에 참가했으며 1946년 ‘대구 10·1 폭동’에서 박정희 후보의 친형인 박상희 씨와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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