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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횡포, 노동자 고통을 이제야 알겠다”

‘재벌의 나팔수’ 공병호의 대변신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오너 횡포, 노동자 고통을 이제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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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련에 대해서는 요즘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외환위기 후 들어간 공적자금이 148조원이라고 합니다. 그 대부분이 은행 부채를 해결하는 데 쓰였어요. 기업들 잘못인 거죠. 친정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린다면, 전경련이 이익활동을 하는 건 좋은데 문제를 좀 국익차원에서 봤으면 하는 거예요.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거죠. 정부에 뭘 요구할 때도 언론을 통해 포문을 여는 것보다는 다른 합리적 해결방법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국민 눈에는 힘을 이용해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까요.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외곽에서 보니 국민들이 전경련 활동을 충분히 그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더군요. 아무래도 힘이 있는 집단이니까요.”

-내친 김에 전경련에서 직접 모셨던 고 최종현 SK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도 좀 말씀해주시죠.

“최회장이나 김우중 회장 같은 분들을 제 30대에 만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행운입니다. 제법 화려한 직장생활이었다고 할 만하죠. 지나간 세대, 두 번 다시 등장하기 어려운 유형의 기업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최종현 회장과 김우중 회장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제게 어떤 역할 모델이 된 분들입니다. 최회장은 일종의 ‘철학자’였어요. 재벌체제라는 게 일종의 제국이거든요. 그걸 움직이려면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거대한 조직에는 반드시 밸류 크리에이션(가치 창조)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총수란 바로 그런 것들을 창안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인덕경영을 한국화한 것이랄까요. 최회장님과는 한국경제연구원 시절부터 대화를 참 많이 나눴습니다. 워낙 젊은 사람들과 말씀 나누길 좋아하셨거든요.



반면 김우중 회장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타일도 많이 달랐고요. 우리 세대에게 김회장은 우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셨을 땐 기대가 참 많았죠.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면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 판단을 솔직히 말하라면 ‘마무리가 명확치 않다’고 할까요. 그 큰 제국이 꼭 1인기업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저기서 일을 벌이는데 그 사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보급선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모든 것이 김우중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보니 리스크도 그만큼 크게 안을 수밖에요. 대우의 문제는 한마디로 리더십의 위기였습니다.

또 하나, 기업가는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이어야 한다잖아요. 그런데 김회장은…. 빅딜만 봐도, LG가 사업들을 포기하는 과정을 보면…. 그런 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DJ노믹스에 가장 비판적인 경제학자 중 한 명이었는데 지금 생각은 어떻습니까.

“IMF 위기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정면돌파할 명분이 있었거든요. 전 정부가 국민과 조금 더 고통분담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국가가 다 안아버렸어요. 결과적으로 목적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됐죠. 국가가 나서서 증시 부양하고 부채 해결해 주고…. 일본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강준만·장하성 교수 이제 다 이해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미국에 내다팔 물건이 별로 없어요. 실업문제도 심각하고요. 잡 크리에이션(job creation)에 문제가 생긴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년이면 또 선거철인데 대선주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해요. 건강한 기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는 거죠. 사업을 해보니 접대비용이 엄청나게 들더군요. 또 자격 미달의 인물들은 왜 그렇게 요직에 많이 앉아 있는지…. 강준만 교수의 ‘마당발 공화국’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이 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경제대국이 되려면 세 가지를 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가 금융 정상화, 둘째가 엘리트를 키워내는 교육 차별화 정책, 셋째가 정치시스템 개혁이에요. 코스닥과 관련해서는 등록과정에서부터 내수용과 해외개척용을 구분하는 방법도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서비스 벤처는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고 중요한 건 수출 가능한 제조 벤처인데, 그마저도 현재는 거의 내수용에 머물고 있어요. 외국인들이 왜 코스닥에 안 들어오는지 아세요. 시장은 정확합니다. 돈이 안된다고 보는 거예요. 코스닥이 활발히 움직이도록 하는 건 중요하지만 인위적인 활성화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일입니다. 해외개척 가능한 벤처를 개발해 적극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코스닥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언급하셨는데, 1999년 말 강교수가 주관하는 ‘인물과 사상’ 12호에 유시민씨가 쓴 공소장 비판 기사가 실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제목이 ‘위장 자유주의자 공병호의 비극’이었던가요. 공식적인 대응은 안했지만 아무래도 불쾌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어떻습니까, 요즘은 진보적 지식인이나 시민단체 인사들과도 화해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전 NGO가 없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업처럼 감시받아야 한다고 여길 뿐이죠. 사회가 발전하려면 사상시장에서도 다양한 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하니까요. 단적인 예로 자유기업원에 보면 NGO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까도 강교수에 대해 친근한 표현을 했지만, 과거 첨예하게 대립했던 고려대 장하성 교수와도 이제는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번 고대에 갔다 장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제가 그랬어요. 욕 봤다고요. 경상도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수고 많으셨다는 표현입니다.”

표변한 게 아니라 진화한 것

-그럼 이전의 언행에 대해 반성하거나 후회스럽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제 양심과 지식에 비추어 최선을 다해 신념을 펼친 겁니다. 정말 30대의 마지막을 원없이 멋지게 태웠지요. 그런 활동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큰 논쟁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점에 있어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도 썼듯, 동양은 과거를 말살하는 반면 서양은 그것의 숨은 가치를 찾아냅니다. 발전하려면 우리 역시 무조건 과거를 부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겁니다. 과거의 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는 거니까요.”

-‘왜 그렇게 표변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요. 방향전환 자체를 ‘앞으로 활동하는 데 더 유리한 쪽으로 선택한 것 뿐’이라 폄하할 수도 있고요.

“임종석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박노해씨가 환경운동가로 변신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변절했다’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전 웃기지 말라고 했어요. 만물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이 자기 이름을 걸고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땐 그건 변절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화일 수도 있고요.

저는 여전히 라이트 윙(우익)입니다. 다만 왼편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거지요. 자유주의자라는 큰 줄기는 그대로이되 세부 사항에 있어 시각 교정을 하게 된 겁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것도 있잖아요.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승리다’. 이젠 절 좀 색안경 끼지 않은 눈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40대 실업자, 50대 명퇴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글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신동아 200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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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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