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출발해 강원도 횡성까지 2시간 30분. 다시 2시간을 기다려 허름한 ‘시골버스’에 올랐다. 30분 남짓 지났을까. 민족사관고등학교에서 세운 커다란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민족 주체성 교육과 영재교육의 요람”
학교 입구에 이르자 두 개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왼쪽은 충무공 이순신, 오른쪽은 다산 정약용이다. 정문 뒤편으로 쌍둥이처럼 생긴 ‘청기와집’ 두 동(棟)이 보인다. 교사(校舍)의 이름은 하나가 다산관(茶山館), 다른 하나는 충무관(忠武館)이다.
다산관 입구에 걸린 현수막에 씌어 있는 글귀가 섬뜩하다.
“본교는 工夫하려고 하는 학생에게는 天國, 工夫 싫어하는 학생에게는 地獄”
민족사관고 교복은 한복이다. 교사들은 조선시대 훈장이 썼을 법한 정자관(程子冠)을, 학생들은 사모(紗帽)를 쓰고 있다. 수업할 때, 식사할 때도 전혀 복장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외국인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의 인사 습관도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다. 아무리 급해도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한다.
“자왈 부자유친하고…” 하는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지만 교실에 들어서면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나게 된다.
교실 문에는 이런 푯말이 붙어 있다.
“이 연구실에서는 영어로 수업이 진행됨은 물론 토론과 강평도 오직 영어로만 이뤄지고 있습니다.”
민족사관고는 일상생활과 수업전반에 ‘영어상용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심화학습을 진행하거나 학생을 상담할 때, 국어와 국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영어만을 사용해야 한다. 이를 어겼을 때는 처벌을 받는다.
이처럼 영어를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영어는 앞서간 문명문화를 한국적으로 구체화해 한국을 최선진국으로 올리기 위한 수단이며 그 자체는 결코 학문적 목적이 아니다.”
교정 곳곳에 씌여 있는 이 문구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교실, 교무실이 없다
민족사관고에는 교실이 없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업무를 보는 교무실도 없다. 그렇다면 수업은 어디서 하고, 교사들은 어느 곳에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상담할까.
민족사관고의 학습관인 충무관과 다산관. 나란히 있는 두 건물 중 충무관은 국어 영어 사회 등 인문계열 과목을, 다산관은 수학, 과학 등 자연계열 과목을 가르치는 공간이다. 각 건물에는 여러 개의 방(房)이 있는데 한 방에 한 명씩 교사들의 이름과 담당과목이 적혀 있다. 이 방들이 민족사관고 교사들의 연구실이며 학생들이 공부하는 교실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시간표는 각자 다르다. 학기초에 자기가 원하는 선생님의 수업을 신청해 스스로 시간표를 작성한다. 수업시간은 여느 학교와 똑같은 50분. 쉬는 시간에는 다음 수업 담당교사의 연구실을 찾아가느라 분주하다.
영어교사 존슨씨의 강의실에 들어가보았다. 하버드대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존슨씨는 대학강단에서 강의를 하다 민족사관고에 영어교사로 왔다. 검은 피부에 덩치가 큰 그가 한복을 입고 정자관을 쓴 모습이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한복을 입고 있는 게 아주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민족사관고에는 존슨씨 이외에도 독일, 뉴질랜드, 영국에서 온 3명의 외국인 교사가 있다.
존슨씨는 강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 시간은 ‘조기소집 특별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수업시간. 민족사관고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당 중학교 학교장의 동의를 얻어 입학 전까지 이른바 ‘위탁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조기소집 특별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은 국제계열 22명과 자연계열 15명. 이들은 재학생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있으나 다른 것은 아직 사모를 쓰지 않았다는 점. 정식으로 민족사관고의 학생이 되어야 사모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차민석(17)군을 비롯한 3명이 존슨씨의 수업을 듣기 위해 연구실 책상에 앉아 있다. 한복 차림이 어색하지 않냐고 묻자 “조금 있으면 익숙해지겠죠” 하며 너스레를 떤다.
수업이 곧 시작하는데도 연구실에 들어와 있는 학생은 고작 9명. 이번 시간 수강생은 9명이 전부다. 민족사관고는 수업 당 학생수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3명을 넘지 않는다. 연구실에도 15개의 의자가 준비돼 있을 뿐이다. 민족사관학교의 전체정원은 200명이 되지 않는다. 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수는 60명 안팎. 학생과 교사의 비율이 3.5대1 정도다.
최경종 이사장은 “앞으로도 교사 대 학생의 비율이 4대1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9명이 듣는 존슨씨의 수업은 오히려 학생수가 많은 편이다. 학생 한 명이 혼자 듣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 과목을 신청하는 학생 수가 적으면 긴장을 하게 됩니다. ‘재미가 없거나 다른 선생님보다 잘 가르치지 못해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수업준비를 더 철저히 할 수밖에 없어요.”
민족사관고 한 교사의 말이다.
昏定晨省으로 시작되는 하루
교사들의 경력도 다채롭다. 일반 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옮겨온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대학강사나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 온 사람들이다. 전체 교사의 90% 정도가 석박사학위를 갖고 있을 정도. 교사 채용은 서류전형과 시범수업의 두 단계로 이뤄진다. 시범수업 평가과정에는 교장 교감이나 재단 관계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평가단을 이뤄 시범수업을 참관한 학생과 교사들이 신규임용 절차를 진행하는 것.
교사들에 대한 처우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일단 급여가 일선 고교의 두 배 이상이고, 교사들은 학생들의 기숙사인 생활관에 꾸며진 아파트형 숙사에서 생활한다. 생활관 각 층의 1호 방이 교사들의 가정집이다.
민족사관고의 아침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시작된다. 혼정신성이란,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로 저녁(昏)에 부모님의 잠자리를 봐드리고(定) 새벽에(晨) 다시 살펴(省) 문안을 여쭙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말한다. 기상시간은 아침 6시. 매일 아침, 태권도 검도 기공 중 하나를 선택해 운동을 해야 한다. 혼정신성의 하나인 아침 문안인사는 운동을 지도하는 선생님께 큰절을 하는 것이다. 저녁 혼정신성 시간에는 사감선생님께 큰절을 올린다. 혼정신성이 생활화한 민족사관고 학생들은 집에 돌아가서도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께 인사를 여쭙는다.
생활관은 12층짜리 현대식 건물이다. 학습관에서 5∼7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 보면 등하교의 개념이 모호해지기 쉬운데 생활관과 학습관의 거리가 이렇게 적당히 떨어져 있도록 설계해 ‘집’과 학교의 구별이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 삼아 위 아래를 오르내리는 학생도 눈에 띈다.
식당은 생활관 12층. 학생들은 이곳을 ‘스카이 라운지’라고 부른다. 식당에서도 물론 영어만 사용해야 하고 의관(衣冠)이 흐트러져선 안된다. 메뉴는 뷔페식으로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오후에 간식으로 먹을 빵을 굽는 구수한 냄새도 풍긴다.
현수막에 쓰인 ‘공부하려는 학생에게는 천국’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시설이 최고 수준으로 갖춰져 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얼마전까지 여학생들은 학습관에서 10여 분 정도 떨어진 단독건물에서 생활했다. 남학생들의 생활관보다 거리가 먼 까닭에 수업에 늦지 않으려 뛰다가 넘어져 다치는 학생이 많았다고 한다. 겨울에 빙판이 져 학생들이 다칠 것을 염려한 학교측은 기숙사에서 학습관으로 올라가는 길 전체에 아예 열선을 깔아 버렸다. 학생에 대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수재들이 다니는 학교라는 선입견에 공부만 하는 ‘범생이’들이 모인 곳이라는 생각을 하기 십상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동아리 수가 40여 개가 넘는다. 사진반, 영화반, 작곡반, 철학반, 만화반, 당구반은 물론이고, 중국요리 만드는 법을 배우는 중국요리반, 장비를 완벽하게 갖춘 야구부도 있다.
1학년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골프와 국궁을 배워야 한다. 학교에는 실내골프장과 시위대가 갖춰져 있다. 민족사관고의 체육수업은 한 학기에 여러 종목을 모두 가르치는 일반 학교들과 달리 한 학기 한 종목을 마스터하도록 구성돼 있다. 학생들은 한 종목을 선택해 숙련될 때까지 반복해 배운다.
박하식 교감은 “체육활동은 미래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중요한 심신단련 활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체육활동 덕택인지 하루에 3~4시간 정도밖에 수면을 취하지 않는 학생들인데도 모두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다.
학습관 오른편으로 ‘99칸 한옥’ 한 채가 보인다.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민족교육관 건물이다. 함영당(涵英堂)에서는 남학생이, 온고당(溫故堂)에서는 여학생들이 전통문화를 배운다. 남학생들은 대금을, 여학생들은 가야금을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밖에 판소리, 민요, 사물놀이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과목이다.
매주 토요일 민족사관고에서는 재판이 열린다. 규정을 위반한 학생들이 ‘학생법정’에 선다. 영어상용 규정을 어긴 학생, 수업에 지각한 학생, 옷차림이 바르지 못한 학생이 피의자(?)가 된다. 재판장은 학생회장이, 자치위원은 검사 노릇을 한다. 피의자는 본인이 원할 경우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다. 물론 변호인은 친구나 선후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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