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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1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 정영기

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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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수도가 없었다.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는 개인 수도를 만들 수 없었다. 땅을 파면 짠 바닷물이 나오기 때문에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동우물을 사용해야 했다. 식수는 물론 빨래하는 물까지 물동이로 길어다가 써야 했다. 멀리 떨어진 동네 공동우물에서 물동이에 물을 담아 물지게로 지고 집까지 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물로 밥도 하고 빨래도 할 수 있었다. 평소에도 물 긷는 것은 힘든 일이었지만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한파가 몰아치는 추운 날은 빙판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물지게를 지고 얼음판에 넘어지면 결국 얼음물을 뒤집어 쓴 꼴이 돼버린다. 젖은 손가락이 양동이에 닿았을 때의 쩍쩍 달라붙는 그 차가운 촉감에 심장까지 얼어버릴 정도였다.

당시에는 영세민 취로사업이 있었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는 농어촌에서 형편이 어려운 가정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생계 지원사업이다. 취로사업에는 대부분 어른들이 나와서 도로를 넓히거나 새로운 길을 만드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한다. 아버지가 없는 우리 가정에서 나는 가장이기에 영세민 취로사업에 나가 어른들과 같이 일을 했다. 열다섯 살의 나이로 그해 겨울 내내 취로사업에 참여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최연소 영세민 취로사업자였다. 취로사업을 해서 번 돈으로 우리는 얼마동안 생활이 가능했다.

겨울에 땔나무를 준비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당시 우리가 사는 시골에서는 부잣집만 연탄을 연료로 사용했다. 우리처럼 가난한 집에서는 연탄을 사다 쓸만한 형편이 못되기 때문에 산에 가서 땔나무를 모아다가 그것을 땔감으로 사용했다. 가을이 되면 겨울에 쓸 땔감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을 미리 준비할 만큼 철이 들지 않았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다.

아버지 돌아가신 해 겨울, 우리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겨울을 맞았다. 날씨가 추워지고 눈이 내리자 미처 땔감을 준비하지 못한 우리는 얼음장 같은 방에서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 때가 많았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밤에는 추위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시 잠이 들어도 추위 때문에 금방 잠에서 깨어버린다. 잠에서 한번 깨어나면 추위 때문에 좀처럼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배고픔만큼이나 힘든 것은 겨울 추위에 살아남는 것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따뜻해져 눈이 녹으면 산에 가서 나무를 주워 방을 따뜻하게 해서 하루하루를 넘겼다. 배가 고파도 몸이 아파도 그냥 견디어내는 수밖에 우리에겐 아무런 해결방법이 없었다. 힘들고 춥고 배고픈 겨울, 우리는 그날그날을 넘기며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아나갔다. 길고도 추운 그해 겨울은 그렇게 지나갔다.



봄이 되자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삶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됐다. 각자 사는 길을 찾아나서는 것만이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아버지가 죽고 난 후 1년도 안돼 우리 가족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떤 가게 종업원으로 가기로 돼있었다. 바로 아랫동생 훈기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훈기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큰집에 있기로 했다. 4학년인 경숙이는 충주에 사는 먼 친척이 데리고갔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자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목포에 있는 어느 가게에서 일하게 됐다. 나이가 어려 취업을 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는 사람의 소개로 신발가게 종업원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도매하는 가게였다. 가게에서 심부름도 하고 배달도 하고 청소도 했다. 어릴 때부터 뱃일로 단련이 된 덕분에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아침 10시에 가게문을 열어 밤 10시쯤 되면 일과가 끝났다. 밤에 작업을 하는 뱃일과는 달리 낮에 일하고 밤에 잠을 잘 수 있어서 견딜 만했다. 점원생활로 더이상 끼니걱정을 안해도 됐다. 매일 따뜻한 쌀밥을 그것도 세 끼를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벽돌공장에 취직

가끔 동생들이 보고 싶었다. 돌아가신 엄마의 모습도 꿈에 자주 나타났다. 같이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가족간의 사랑이 그리웠다. 빨리 돈을 벌어서 잃어버린 동생들을 찾아 우리 가정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일해도 아무런 보수가 없었다. 그저 밥이나 먹여주고 잠이나 재워주면 그것이 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의 전부였다. 돈을 벌기에는 나이가 아직 어렸다. 신발가게에서 일하는중에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조건이 더 좋아보이는 그 일자리로 옮겼다. 점원생활을 한 지 6개월 만이었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다. 기술을 배우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벽돌공장에 들어갔다. 새로 들어간 곳은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공터에다 천막을 쳐놓고 시멘트와 모래를 배합해 벽돌과 기와를 만드는 공사판 같은 공장이었다. 기술자(기사) 한 사람이 있었고, 종업원은 나를 포함해 모두 네 명이었다. 그들도 나처럼 기술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이었다.

벽돌공장에서의 일과는 새벽부터 시작됐다. 아침 작업이 시작되기 전에 기사보다 먼저 작업장에 나가서 그날 작업할 양만큼 ‘공구리작업(모래와 시멘트를 섞는 작업)’을 해놓는다. 보통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그렇게 작업준비를 하고 아침식사를 한다. 그렇게 해야 기사가 출근하면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밥 먹는 시간과 새참 먹는 시간이 30분 정도 있을 뿐 쉬는 시간은 아예 없었다. 하루 종일 벽돌을 만들어 나르고, 완성된 벽돌은 트럭에 실어 건축공사장으로 보낸다. 벽돌을 트럭에 싣는 것도 내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은 시멘트 두 포대 세 포대쯤 거뜬히 지고 나르는데, 나는 한 포대도 제대로 못 들어 끙끙거렸다. 무거운 시멘트 포대를 등에 지고 옮기는 작업을 할 때면 힘이 달려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이곳에서는 기사 한 명만 출퇴근했고 나머지 종업원은 함께 숙식했다. 합판때기로 엉성하게 지어놓은 가건물, 그곳이 종업원들의 잠자리였다. 바람소리 빗방울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방안에서 전기장판을 한 장 깔고, 이불을 덮으면 그곳이 우리들의 보금자리였다. 밀려드는 피로와 잠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볼 겨를조차 없이 골아떨어지곤 했다. 아침 6시가 되면 자명종 소리와 함께 어김없이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하고, 그렇게 또 고된 노동의 하루가 시작됐다.

하루 작업을 대충 마무리하고 밤 9시쯤 기사가 퇴근하면 우리는 작업장 정리를 한다. 밤 10시는 돼야 일과가 끝났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일만 하는 그런 생활이었다. 2∼3년 배우면 기사가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불평도 없이 열심히 일을 했다.

시간이 흐르자 힘든 일에도 차차 적응이 돼갔다. 몇 달이 지나 일하는 요령도 터득하게 됐다. 전보다는 일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꼬마녀석이 일을 잘 한다는 칭찬도 들었다. 벽돌 만드는 기술은 몇 달 만에 습득할 수 있었다. 벽돌을 찍어내는 기계를 다루기가 힘에 부치기는 했지만 그 기술을 어깨너머로 익혔다.

그러나 기왓장 만드는 기술은 벽돌 만드는 기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가 가르쳐주지도 않거니와 벽돌 만드는 것과는 달리 상당한 기술과 경험이 필요했다. 약간의 흠이 있거나 잘못 찍어내면 바로 부서지거나 못 쓰게 되기 때문에 상당한 노하우를 필요로 했다. 또한 기왓장을 기계에서 한번에 찍어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나 같은 소년은 기술을 익혀도 체력이 미치지 못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기사가 되면 상당한 대우와 일자리가 보장되는 괜찮은 일이었다. 기사가 되면 기와를 만들어내는 만큼 보수를 받는 성과급제였다. 기사는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보수도 없이 오로지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일하는 견습생에 불과했다.

휴일은 아예 없었다. 일요일에도 평상시와 같이 일을 했다. 하지만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작업을 해도 벽돌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작업을 중단한다. 기사는 비오는 날을 ‘공치는 날’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비 덕분에 힘든 노동을 하루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기와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은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알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형들은 이곳에서 2,3년째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나처럼 견습생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일이 고된 만큼 사람들도 거칠었다. 기사가 퇴근하고 나면 나이가 가장 많은 고참이 기사인 양 행동했다. 그는 교도소에 다녀온 전과자였다. 그는 자신의 전과사실을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자기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심하게 때리기도 했다. 기사가 퇴근하고 나면 나는 더 힘들었다. 신참인 내가 모든 뒷정리를 도맡아 해야 했다. 이들은 나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들은 편히 쉬었다. 말을 듣지 않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합을 주고 구타를 했다.

한번은 기사가 퇴근한 후, 고참이 사소한 이유를 들어 나를 심하게 구타했다. 그날 밤 그에게 몹시 두들겨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이가 부러졌다. 그는 어린 나에게 허튼 수작을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는 그저 겁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을지 모르지만 세상 경험이 많지 않은 나에게는 그들의 위협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졌다. 세상살이가 버겁다는 느낌과 함께 사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보복이 두려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나를 보호해줄 부모가 없고 보호자도 없는 상태에서 그런 무서움을 이겨낼 만한 담력이 없었다. 며칠 동안 그런 공포 속에서 지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몰래 도망치다 붙들리면 그들은 나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어느날 밤, 그들은 일을 끝내고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그날 새벽 나는 아무도 몰래 그곳을 빠져나왔다. 모든 소지품을 그대로 놔둔 채, 몸만 간신히 빠져나와 그곳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돈 한푼 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만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토록 지겨워했던 뱃일을 밥벌이를 위해서 또 시작해야 했다. 예전처럼 남의 배 선원으로 따라가 고기 잡는 생활을 했다.

우리 사정을 잘 아는 동네목사가 나를 딱하게 봤는지 서울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목사님은 서울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사나흘은 서울에 머무르는 것 같았다.

“영기야, 너 서울 회사에 취직하고 싶지 않니?”

“서울 회사라고요?”

“그래, 내가 아는 회사가 있는데 월급도 주고 기숙사도 있어 생활할 만할 거야.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월급도 준다구요. 그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그리고 벽돌공장에서 일했지만 돈은 한푼도 벌지 못했었다. 월급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회사라면 전에 일했던 신발가게나 벽돌공장과는 다른 더 멋진 일을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울로 가고 싶었다. 서울에 가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977년 4월, 목사님이 소개해 준 주소 하나만을 들고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목사님이 알려준 시간의 기차를 탔다. 내 주머니에는 전재산인 1만2000원이 들어 있었다. 고기잡이배를 타서 몇 달 동안 모은 돈이다.

철부지 마음속에는 서울에만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았다. 서울 가는 기차는 지루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타보는 기차, 시골뜨기 소년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롭게만 보였다. 혼자서 찾아가는 서울길은 다소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돈을 벌러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다행히 서울역에서는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월 1만3000원의 섬유공장

나의 네번째 직장은 서울 연희동에 있는 조그만 섬유공장이었다. 서울 회사라는 곳은 공장이었고 일하는 사람이 30명 정도 됐다. 나는 그때까지 회사와 공장을 서로 다른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공장생활은 아침 8시부터 일을 시작해서 오후 7시에 야간근무조와 교대를 하게 된다. 그것으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저녁을 먹고 밤 11시까지 다시 잔업을 했다. 하루 15시간 이상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격주로 야간근무를 했다. 일주일은 주간에 일을 하고 그 다음주에는 야간에 일을 하는 체계여서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고깃배를 탈 때 지긋지긋하게 싫어했던 낮밤이 뒤바뀐 생활이 멀고 먼 서울 하늘 아래에도 있었다.

서울은 내가 마음속에 그리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꼭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리란 꿈을 안고 올라왔지만 서울은 새로운 생활을 쉽게 보장해 주지 않았다. 서울에 가면 뭐든지 가능하리라고 믿은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곧 깨달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하는 게 전부였다. 서울생활은 나 같은 시골뜨기에게는 여전히 힘든 생활이었다.

하지만 도망쳐 나온 벽돌공장과 비교해 보면 근무조건이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시멘트 포대나 벽돌을 져 날라야 할 정도의 힘든 육체노동이 없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게 고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점심시간이 한 시간이나 주어져 점심을 먹고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공장에서는 먹고 자고 일하는 모든 생활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공장 바로 옆에 방이 붙어 있어 일과가 끝나면 바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고, 식사도 공장 안에서 바로 먹게 돼있었다. 첫 월급으로 1만8000원을 받았다. 그중 밥값으로 5000원을 공제하고 내 손에 들어오는 돈은 1만3000원 정도였다. 당시 라면이 한 봉지에 50원이었고, 영세민들을 위한 새마을취로사업 일당이 2000원 정도였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임금이었다. 그러나 그때 대부분의 근로청소년들, 특히 나같이 어린아이들은 그 정도의 임금밖에 받지 못했다.

내가 서울에 취직하고 나서 큰집에 연락을 하자 동생을 빨리 데려갔으면 하는 전갈이 왔다. 하지만 공장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나는 동생을 데리고 있을 만한 형편이 못됐다. 그래서 월급을 타면 매달 만원씩을 동생의 생활비로 보냈다. 외출을 하거나 놀러다닐 시간이 없는 공장에서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서울에 온 지 2년이 지나 공장이 경기도 용인으로 이전했다. 새 공장은 규모가 전보다 훨씬 컸고 일하는 종업원 숫자도 많이 늘어났다. 나는 운 좋게도 주간에만 일을 하는 부서로 일자리를 옮기게 됐다. 비록 월급은 야간작업반에 비해 적었지만 그래도 밤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새로 이사온 공장은 서울 공장에 비해서 근무환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가 정해진 근무시간이었다. 잔업도 많이 줄어들었다. 월급도 주변의 다른 공장들과 비슷한 수준인 3만원으로 인상됐다.

동생 훈기는 시골에서 중학교에 진학했다. 동생의 학비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받는 월급은 뻔하고 따라서 보낼 수 있는 돈은 한정돼 있었다. 훈기가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큰집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어려운 시골 형편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동생을 맡아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큰집에 동생을 맡기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훈기를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같이 생활하면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동생은 시골에서 용인에 있는 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하지만 먹고 자고 학교에 다닐 만한 집을 마련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네 집에 부탁을 했다. 얼마간의 생활비를 주기로 하고 같이 지내도록 했다. 동생은 친구의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나는 공장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그렇게 해야만 내 월급으로 동생을 중학교라도 보낼 수 있었다. 훈기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동생이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진학문제로 고민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형편에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월급으로는 고등학교 학비를 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훈기는 고등학교 진학을 고집하지 않았다. 결국 훈기도 나와 같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기로 마음의 결정을 했다.

그런데 희소식이 들려왔다.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이다. 국비로 운영하는 학교인데 기숙사가 있고 일체의 학비가 없고 교과서 교복까지 준다고 했다. 공장에 취직할 예정이었는데 고등학교에 갈 수 있게 되자 동생은 무척 좋아했다. 경북 구미에 있는 금오공업고등학교다. 동생은 무사히 시험에 합격해 그곳으로 가게 돼 우리 형제는 또 헤어졌다.

그런데 동생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배우는 내용이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했다. 여러 차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동생을 설득했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나는 동생이 그래도 고등학교라도 마치기를 바랐다. 그 덕분인지 동생은 3년의 시간을 무사히 보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입대했다.

당시 근로자들은 나처럼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못하고 지방에서 상경한 아이들이다. 학력이 기껏해야 중졸이며 나처럼 국졸자도 더러 있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 졸업자를 국졸이라고 했다.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희망을 가지고 올라온 이들은 고된 노동과 무거운 회사 분위기에 짓눌려서 그저 하루하루를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갈 뿐이었다. 부모 밑에서 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돈 몇푼을 벌기 위해 산업전사가 된 것이다. 그래도 월급을 받아 다달이 고향에 얼마간의 돈을 보내고 나머지를 저축하며 그것으로 공장에서의 힘든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그중에는 가끔 고등학교 졸업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학력이 낮은 우리보다 훨씬 빨리 작업현장에서 조장이나 반장 등 더 나은 위치에 올랐다.

공장작업은 하루 24시간 동안 2교대 근무를 한다. 주간작업반은 아침 8시에 일을 시작해 오후 7시에 끝난다. 물론 주간작업을 할 경우 일하는 부서에 따라서는 밤 늦게까지 잔업을 하는 때도 있다. 따라서 하루에 15시간 정도를 일하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잦은 잔업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업을 하지 않으면 월급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반 직장에서는 토요일 반일 근무가 일반적이지만 내가 일했던 공장에서는 토요일도 평일처럼 하루 종일 일했다. 더욱 힘든 것은 낮과 밤이 뒤바뀌는 근로시간이다. 1주일은 주간반에서 일하고, 다음 1주일은 야간반에서 일하는 식으로 격주로 낮과 밤이 바뀌는 체제다. 보통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서울공장에서 일한 2년 동안 내내 주간과 야간을 번갈아가며 작업을 했다. 야간작업반은 저녁 7시에 교대를 해서 다음날 아침 8시까지 꼬박 13시간 일을 했다. 물론 중간에 야식을 먹기 위한 1시간 휴식이 있다. 야식이라고 해봐야 라면 한 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고급 음식이었다. 낮에는 잠을 자야 하기 때문에 점심을 먹을 수 없어 결국 야식이 우리에게는 점심식사나 마찬가지였다.

새벽 1시에 야식을 먹고 2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 따라서 새벽 3시 경부터 가장 졸음이 많이 오는 시간이다. 낮에 잠을 충분히 자도 새벽에는 졸음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도록 돼있는 인간의 생체리듬을 우리는 억지로 맞추어나갔다.

경력보다 더 중요한 건 고등학교 졸업장

공장의 작업장은 사방이 막혀 있고 창문이 없어 햇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 바로 밑 벽에 작은 창이 있지만 그것은 창이 아니라 환기를 위해 만들어놓은 환기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장 안은 낮에도 항상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었다. 작업장에 들어가면 낮인지 밤인지 분간이 안된다. 외부의 빛이 차단된 공장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기계의 작동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아마도 공장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된다면 직공들이 작업에 몰두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생산성이 그만큼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서 공장을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 같다.

공장생활을 오래하면 계절 감각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작업장에 들어가면 대부분 밤중에 그곳을 나온다. 반복되는 이런 생활로 주변의 변화에 감각이 무뎌진다. 하루 종일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심지어는 날씨변화조차도 알 수가 없다. 작업장은 제품의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기 때문에 밖에 나오지 않으면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계절이 바뀌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결국 밤중에도 주인이 불을 밝혀주면 낮으로 착각하고 열심히 계란을 만들어야 하는 양계장의 불쌍한 닭과 같은 존재가 1970년대 공장근로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당시 대부분의 공장직공들은 출퇴근이 필요없었다. 관리자나 사무직 근무자들은 가정을 갖고 외부에서 출퇴근하지만 직공들은 대부분이 시골에서 상경해 먹고 잘 만한 데가 없어 공장에 붙어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했다. 공장의 구조도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능률적으로 돼있었다. 작업장 바로 옆에 기숙사가 붙어있어 눈뜨면 밥 먹고 일하고 또 잠을 자는 생활에 매우 효율적이었다.

근로청소년들은 중요한 성장기의 대부분을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보냈다. 가난하기 때문에 나쁜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의 현실이었다. 이들에게는 고독이나 방황 같은 사춘기의 감상을 누릴 여유조차 없다. 이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적은 임금을 주고 고용할 수가 있으며 나이가 어려 말을 잘 듣는다는 이유로 힘이 많이 드는 일들은 대부분 이들에게 맡겨졌다. 이렇게 12시간 이상을 노동에 시달리다 형편없는 시설과 난방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기숙사에 몸을 던지고 잠에 빠져드는 것이 내가 경험한 1970년대 후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근로청소년들의 모습이다.

내가 일했던 공장은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요즈음 신발이나 의류 등 일상용품에 흔히 사용하는 벨트로 일명 ‘찍찍이’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다. 서울공장에서 2년, 그리고 새로 이전해간 용인공장에서 4년을 일했다. 나는 공장의 거의 모든 부서에서 작업을 해보아 작업내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상세히 알 수 있다. 불량품이 발견되면 어떤 과정 어느 단계에서 나왔는지 알아낼 정도로 전문가가 됐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장생활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다른 희망이 없었다. 공장직공들의 희망은 기껏해야 자기 부서의 작업반장이 되는 것인데 국졸자에게는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공장에서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하고 학력이 별로 필요없는 단순한 작업이다. 하지만 같은 작업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데도 학력에 따라 여러가지 차이를 두었다. 공개적으로 학력을 들먹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항상 밑바닥 위치에서 일했다. 국졸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서글프고 열등감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장에서도 일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고졸자는 처음부터 대우가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들어온 아이들 앞에서 나는 기가 죽어야 했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고졸자는 처음부터 나보다 월급이 많았다. 경력은 내가 더 많았지만 그들은 나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았고 얼마후에 나를 지시하는 작업반장과 같은 자리에 올랐다. 좁은 세계인 공장에서조차 학력은 사람은 구분하는 잣대가 되었다. 경력보다도 작업의 숙련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이었다.

‘선데이서울’에 실린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 광고

그때까지도 미래에 대한 꿈이나 장래의 계획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내겐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얼마간의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동생의 중학교 학비를 대는 것이 전부였다. 공장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먹는 것과 잠자리는 해결이 됐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생활에 나는 차츰 싫증을 느꼈다. 365일 하루도 다르지 않은 공장생활이 너무 답답했고 벗어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원망스러웠지만 그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 또래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끔 동생이 공부하는 중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서 나도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한글이나 읽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어상표 하나 읽지 못하는 내 자신이 창피했다. 길에 붙어있는 영어간판이라도 알아볼 수 있고 신문에 나오는 한자라도 읽고 싶었다. 나는 그저 뭐라도 배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공부를 하는지 무슨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장생활이 싫었다.

1970년대에는 ‘선데이서울’이라는 유명한 잡지가 있었다. 아마도 매주 일요일에 나오는 잡지라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 어쨌든 공장근로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잡지였다. 나는 어떤 책이 교양서적인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몰랐고 책을 읽을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가끔 ‘선데이서울’이라는 잡지를 사서 읽었다. 그런데 이 잡지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는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연애사건이나 비화 등을 주로 다루는 흥미 위주의 성인잡지였다. 그러나 가판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내용도 재미있어 우리들은 이 책을 즐겨보았다. 나도 심심할 때 이 잡지를 여러 번 사 보았고 친구들이 사온 것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잡지에는 ‘검정고시 통신 강의록’ 광고가 몇 개씩 실렸다. 이 광고에는 독학으로 중학교 3년과정을 1년에 마칠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 합격자의 사진까지 실려있었다. 이 책만 사서 공부하면 누구나 쉽게 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처럼 돼있었다. 책을 사서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잡지 광고에 나온 강의록을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구입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7년의 세월이 지난 열아홉 살이 돼서야 공부를 하겠다고 중학교 강의록을 펴보았다. 정상적으로 공부를 했으면 대학에 들어갈 나이인데 남들이 볼까봐 부끄럽고 창피했다. 그래서 옷장 속에 책을 숨겨두고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강의록을 꺼내 읽어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나 초등학교 때 배운 것조차 다 잊어버려서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너무 오랫동안 책을 놓고 있어서인지 머리도 굳어 있었고, 직장에 매어 있어 공부할 시간을 갖기도 쉽지 않았다.

강의록을 보고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쉽지 광고내용과는 전혀 달랐다. 그동안 공부하기 위해 책을 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 갑자기 강의록을 본다고 공부가 저절로 될 리가 없었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에 시달리다가 저녁 시간에 공부를 한다는 것은 계획은 쉬웠지만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강의록에 나와 있는 진도표는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것도 독학으로 공부를 하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욱 힘든 것은 공부를 하다가 이해되지 않거나 모르는 것이 나오면 더 이상 진도가 나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부하다 의문점이 생기면 즉시 질문하고 그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데 의문점을 그대로 두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처음에는 모르는 내용이 하나지만 나중에는 알아야 할 내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물론 출판사에 질문을 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우편으로 질문하면 2주 후에나 그에 대한 답장을 받아볼 수 있었다. 어려운 강의록의 내용을 번번이 편지로 질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열심을 내서 몇 차례 질문도 해보았다. 하지만 글로 써서 보내주는 설명은 강의록 내용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방법은 독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독학이 갖는 또 하나의 단점은 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어느 것이 중요한 것인지 요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내용이 핵심인지도 모르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공부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이런 과정을 몇 번 거치면서 나도 모르게 지쳐 공부를 중도포기했다. 결국 아까운 책값만 낭비하고 말았다.

그러던중 우연히 길을 가다가 검정고시학원 학생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학원에 직접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부끄러운 내 학력을 또 드러내는 것 같아 쉽게 학원을 찾아갈 수 없었다. 몇 번을 망설였는지 모른다.

용기를 내어 중학교 과정을 배우는 검정고시학원 야간반에 등록했다. 열아홉이라는 너무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원에 나가보니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결혼한 아저씨도 있었다. 나는 학원에 나가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졸업후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학력에 한이 맺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혼자서 독학을 하다가, 또는 여러 차례 망설이다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학원에 나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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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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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소년가장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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