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박정희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승용차와 하사금을 줬다”

안익태 프란체스카 박근혜의 청와대 파일

  • 정리·특별취재팀

    입력2004-11-10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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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각하, 제 작품 ‘환상교향곡 한국’을 음악영화로 만드는 계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영화는 한국의 역사와 수려한 산하, 한국의 춤, 압제와 비극,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유와 독립의 승리를 묘사할 것입니다. 스크린에서 한국의 유장한 역사가 펼쳐지는 동안 1000명의 합창단과 200명으로 구성된 교향악단이 저의 작품 한국환상곡을 연주할 것입니다….”

    애국가의 작곡자로 알려진 안익태 선생은 1958년 2월27일자로 된 이 편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자신이 신시네티 인디애나폴리스 찰스턴 버밍햄 오클라호마시티 덴버 등 미국 전역을 돌며 행한 연주활동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했을 때 미국 청중이 보여준 열렬한 반응을 자세히 소개하며,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도 이 작품의 영화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강조했다.

    이대통령과 한국 정부가 이 작품의 영화화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한국의 뛰어난 문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데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안익태 선생은 또 이대통령 앞으로 보낸 3월17일자 편지에서는 한국에서 ‘제1회 국제음악제’를 개최할 것을 제의하면서 이 행사에 참가할 미국측 음악인의 명단까지 적어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정부로서도 이같은 제의는 솔깃한 것이었지만, 문제는 거기에 들어갈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당시 가난하기 짝이 없었던 나라 살림으로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출신의 작곡가 겸 지휘자가 내놓는 갖가지 제안은 ‘꿈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곳(한국)에 있는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제안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화를 위한 대부분의 재원을 나라 밖에서 구할 수 없다면 이 계획은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안익태 선생의 제안에 대해 당시 공보처(Office of Public Information)의 오재경 처장은 이같은 내용의 답변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오 처장은 이 편지에서 안익태 선생에게 워너 브라더스나 월트 디즈니같은 영화 제작자들을 접촉해 이 영화가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을 설득해보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당시의 한국정부는 이런 일에 돈을 댈 처지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안익태 선생은 한국 환상곡의 영화화 뿐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일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안을 내놓거나 도움을 요청했다. 한미문화협회를 창립하자는 제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듯하다.

    이대통령은 호놀룰루와 미 본토에 주재하고 있는 우리 영사들에게 직접 전문을 띄워 그 일이 성사되기 어려움을 안익태 선생에게 잘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알다시피 (기왕에 설립돼 있는) 한미재단의 목적이 바로 양국간 문화교류 촉진이고, 우리는 또 밴 플리트 장군이 주도하고 있는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있소. 이런 마당에 양국간 문화교류를 위해 또 다른 단체를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오. 이 점, 안선생의 제안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잘 설명하기 바라오….”(1958년 3월20일자, 이승만 대통령이 보낸 전문)

    안익태 선생은 또 자신의 미국내 연주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내 주요 연주단체에 직접 편지를 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클리블랜드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조지 셸, 필라델피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유진 오먼디,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같은 거장들이 그런 ‘대상’들이었다(1958년 5월28일자 서신).

    그러나 이대통령은 이 요청도 완곡하게 거부했다. 경무대측은 안 선생에게 보낸 편지(1958년 6월12일자)에서 “대통령이 미국내 주요 도시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것은 적절치 못하며, 주미 한국대사에게 안선생의 요청을 전달해 놓았으니 주미 대사가 그 요청에 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4·19 직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전대통령은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투병생활을 시작하면서 귀국을 원했으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4년 11월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보내 정부의 선처를 호소했다. 이 전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죽을 경우 유해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게 해달라는 탄원이었다. 이 전대통령이 사망한 것은 1965년 7월. 그때까지 그는 군사정부가 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한 정쟁법(정치정화법) 1호 대상자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이 죽은 지 한 달 후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의 귀국이 추진된 것은 1960년대 후반. 1967년 오스트리아 대사로 부임한 유양수씨(동자부 장관, 유원건설 회장 역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귀국을 제의했으나 여사는 “아직 때가 아니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유대사는 박대통령에게 여사의 귀국 지원조치를 건의했다. 그즈음 국내에서는 ‘운암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기념사업회는 이박사의 유산 문제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귀국을 추진했다. 박대통령은 1969년 가을 이화장 수리, 유산 반환 등 여사의 귀국에 필요한 조치를 지시하기에 이른다. 1970년 봄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한다.

    이번에 공개된 청와대 사료 중에는 당시 프란체스카 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편지가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끈다.

    각하.

    각하께서 이화장 수리를 위해 30만원을 하사해 주신 것을 매우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필요한 보수공사가 완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각하의 후의에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또한 각하께서 이박사의 유산을 반환토록 지시해 주신 데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이 반환조치로 인하여 우리들의 집이 보다 더 안락한 곳이 될 것입니다. 저는 5월 중순경에 귀국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각하께 깊은 경의와 사의를 표하면서. 프란체스카 리. 1970.3.17

    이 서한을 받고 나서 박대통령은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할 것을 지시한다.

    비서실장 앞

    김성곤 의원과 상의해 ‘프’ 여사 귀국에 대하여 이화장 내부 수리와 귀국 후 생활보조 문제에 대하여 협조를 하시오. 1970. 3.25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해 5월 망명길에 오른 지 10년 만에 귀국한다. 한 달 후 여사는 박대통령에게 한번 더 감사의 편지를 띄운다.

    각하,

    저에 대해서 각하께서 보여주신 관심과 후의에 깊은 사의를 표합니다. 저는 특히 각하께서 매달 500,000원의 보조금과 저의 개인용으로 크라운차를 지급해주신 너그러움에 감사드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것이며 각하께 깊은 경의와 찬사를 올리고자 합니다.

    각하께서 저를 위해서 과거에 해주셨으며 지금도 해주고 계시는 일에 충심으로부터의 사의를 표하면서, 프란체스카 리. 1970.6.11

    한국의 백악관 격인 경무대 응접실. 우리는 만찬을 한 뒤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와 커피를 마셨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공산군이 서울로 물밀 듯 쳐들어와서 피난을 떠나야 했던 위급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한 어린애가 팔에 책을 끼고 방에 들어왔다. 대통령은 그를 “내 아들 강석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어린이다운 발랄함으로 강석은 부모에게 저녁인사를 하고, 재롱을 약간 부린 뒤, 공부를 하기 위해 방으로 가야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인자한 어머니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방에 쿠키가 약간 있고, 아이스박스에 우유가 있다고 말했다. 성장기의 어린이들이 항상 배가 고픈 것을 염려한 것이다.

    강석이 한국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고아 출신을 양자로 택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는 국회 대변인 이기붕의 아들이었다. 이는 미국인에게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미국에서는 양친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아이는 양자로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는 한국인들은 아무 아이나 양자로 받지 않는다. 양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성씨와 가계를 잇는 것이다. 그래서 양자를 들일 때는 같은 조상을 가진 종중의 아이 가운데 한 명을 택한다. 이승만과 이대변인은 먼 친척이었다. 친척이라 해도 외아들을 가진 이에게는 양자를 청하지 않았다. 이기붕 대변인에게는 가계를 이을 수 있는 더 어린 아들이 있었다.

    미국인들의 이 수수께끼는 이대통령이 한국의 오랜 전통을 따랐다는 것을 알면 비로소 풀린다. 그 전통은 복잡한 조상숭배 전통에 기원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불교 가문과 기독교 가문이 많지만,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 전통을 잇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이대통령의 재산은 많지 않다. 그는 40년이란 긴 세월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보냈다. 이 기간 동안 단순한 수입으로 겨우 연명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은 부를 얻을 공간이 없다. 어린 강석은 위대한 용기와 애국심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평가될 아버지의 이름을 상속했다. 법률적으로 그는 두 개의 가족을 가질 수 없었으나 실제로는 가족이 둘이었다. 그는 실제로 두 집안을 오가며 지냈다.

    1932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서 한국이 자유를 얻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네바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프란체스카 도너라는 오스트리아 여성을 만났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프란체스카 도너는 이승만의 아내였을뿐 아니라, 남편이 한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데 중요한 파트너가 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녀는 아내로서, 영부인으로서, 비서로서, 그리고 지금은 강석의 어머니로서 활동하고 있다.

    1945년 한국이 남쪽의 절반 지역에서 자유를 획득했을 때, 이 나라의 북쪽 은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했다. 이때 강석은 일곱 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한국군 장교가 돼 한국민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현재 그는 스물한살이며 중위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만만치 않은 과정을 겪었다.

    한국의 육사는 1951년 설립되었다. 한국 육사는 깃털솔이 달린 군모와 하늘색 재킷과 하얀 바지같은 제복까지 포함하여 미국 웨스트포인트의 모든 교육과정을 그대로 따랐다. 두 학교의 진정한 차이는 미국의 관습과는 맞지 않지만, 한국 육사의 장래가 촉망되는 사관생도를 국회가 지명했다는 사실이다. 입학시험을 통해 한국의 육사생도가 된 소년은 아무도 없었다.

    1958년 200명 정원의 육사에 4000명의 고등학생이 지원했다. 이것은 당시 한국 육사에 근무하던 미국 장교가 말한 수치다.

    한국의 고등학교는 모두 엄격하고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사에 지원한 학생들은 모두 비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종 합격한 200명은 모두 뛰어난 학생이었다. 1956년 강석은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장녀 박근혜씨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을 무렵 ‘크리스찬 라이프’라는 영문잡지에 인터뷰기사가 실렸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맏딸이 기독교를 선택하게 된 배경이 흥미롭다. 다음은 당시 잡지기사를 번역한 내용이다.



    이 기사에 대해 박근혜 의원은 “샤론의 장미 말이죠”라며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기독교 신자인가’ 라는 질문에 박의원은 “학창 시절에 기독교 신앙생활을 한 적이 있으나 어머님 돌아가신 뒤에는 특정종교의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인터뷰는 누가 주선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기독교잡지니까 종교적인 이야기를 한 거예요. 지금도 신의 존재는 믿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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