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비집, 곰 발바닥, 코끼리 코, 악어, 도마뱀, 쥐, 개미 알, 고양이, 박쥐…. 잡식동물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인간은 갖은 동물을 재료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그러나 소, 돼지 같은 흔한 먹을거리도 금기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처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열렬한 동물보호론자인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였다. 바르도는 “한국을 방문한 여행객들이 보신탕을 먹는 혐오스러운 관습에 충격을 받고 있다”며 김영삼 대통령에게 한국인이 보신탕을 먹지 못하게 해달라는 편지까지 보냈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동물보호협회(WSPA)도 개고기 식용 문화가 야만스럽다며 “개고기 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우리 정부에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야 했던 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함으로써 비난을 잠재웠다. 보신탕집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변두리나 골목으로 숨어들었고, ‘보신탕’이란 간판도 ‘영양탕’ ‘사철탕’ 등으로 둔갑했다. 그렇게 해서 개고기 논쟁은 서구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개고기집은 그후로도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금껏 숨어 있는 실정이다.
올림픽은 세계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축제니만큼 세계화의 현장이라 할 수도 있는데, 서울올림픽 때 개고기 논쟁이 불거졌듯 비서구문화권에서 개최된 최초의 대회였던 1964년 도쿄올림픽 때에는 스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팔딱거리는 생선을 칼질해 즉석에서 회로 떠 먹는 일본인들을 본 미국인들이 “놀랍다” “야만스럽다”고 반응하는 것을 취재해 대대적으로 기사화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스시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180도로 바뀌었다. “스시를 못 먹는 사람은 상류층에 끼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스시는 고급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최근 들어 다이어트 선풍이 일면서 인기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샐러드 바와 더불어 ‘스시 바’의 인기도 함께 치솟고 있다. 스시 바가 뜨자 ‘피시 바(fish bar)’도 덩달아 재미를 보고 있다.
외국 음식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감도는 이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다시 말해 외국 음식에 대한 그들의 잣대가 매우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2002 월드컵이 비서구문화권인 한일 양국에서 개최되자 개고기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그것도 예전의 바로 그 브리지트 바르도가 총대를 메고.
이번에는 월드컵 주관기관인 국제축구연맹(FIFA)까지 가세했다. FIFA가 문제 삼은 것은 개를 도살하는 과정에서 몽둥이로 두들겨패는 등의 잔혹행위. 세계동물보호협회는 FIFA의 이같은 요청에 대한 한국 정부와 월드컵조직위원회의 반응을 자기네 홈페이지(www. wspa.org.au) 뉴스란에 실으며 개고기 문제를 동물학대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왜 서양사람들은 세계인의 우의와 평화의 기틀을 다지는 축제가 비서구문화권에서 열리기만 하면 개최국의 문화에 대해 이렇게 시비를 거는 걸까. 그들은 그것이 자기네 문화의 우월성을 고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또 무엇을 꼬투리로 잡을까.
개고기 식용과 관련해 문제가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과 가족처럼 지내는 개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를 잡는 ‘야만스런’ 방법이다.
우리가 왜 개고기를 먹느냐 하는 문제는 프랑스 사람들이 왜 말고기를 먹느냐는 문제와도 통한다. 이에 대해 알아보려면 인간 먹잇감의 스펙트럼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먹고 살게 마련이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미술작품도 먹잇감을 그린 것이다. 1만7000년 전 동굴생활을 하던 선사인들이 최고의 먹잇감으로 꼽았던 들소, 사슴 등의 초식동물을 잔뜩 그려놓은 것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라 있는 라스코 동굴벽화와 알타미라 동굴벽화다. 이들 벽화에는 오직 먹잇감인 초식동물들만 등장한다. 사냥하는 사람은 물론 그 흔한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조차 그려져 있지 않다. 그만큼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먹잇감이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먹는 문제만큼 중요한 게 달리 없었다. 문명이란 것도 인류가 농경과 가축사육을 통해 비로소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게 되면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답게 먹이 또한 그 어느 동물보다 다양하다. 식물도 열매, 잎, 줄기, 뿌리를 가리지 않으며, 동물도 조류, 들짐승과 산짐승, 가축, 물고기, 곤충, 파충류 등 열거하기조차 힘들 만큼 가히 잡식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리방법도 날것으로부터 삶고 찌고 데치고 볶고 굽고 튀기고 말리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인간의 먹을거리가 얼마나 다양한지는 동양의 요리대국 중국에서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오죽하면 중국인들은 ‘하늘을 나는 것 중에는 비행기 빼고는 다 먹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 중에는 잠수함 빼고는 다 먹으며, 지상의 네 발 달린 것으로는 책상 빼곤 다 먹는다’고 했을까.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중국은 영토가 워낙 광대하다보니 지형과 기후도 다양해서 기상천외의 요리들이 개발됐다. 우리는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더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까지 그들은 머리를 짜내고 짜내 훌륭한 요리로 만들어냈다. 중국에서 음식 재료가 풍부하기로는 남방의 광둥(廣東)이 첫 손에 꼽히는데, 요리가 무려 500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개고기는 물론, 뱀이나 고양이 탕(湯)도 중국에선 별난 음식 축에 끼지 못한다.
개고기나 뱀고기는 중국에서도 보양음식에 속한다. 그들은 개고기를 ‘향육(香肉)’이라 부르며 즐겨 먹는데, 명나라 말기의 이시진(李時珍)은 ‘본초강목(本草綱目)’에 “황구(黃狗, 누렁이)는 보신효과가 뛰어나다”고 썼다. 그렇다고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아무렇게나 먹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는 보신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갓난 개는 정력에 좋고, 어린 놈은 보혈에 좋으며 늙은 개는 신경통에 좋다며 용도에 맞는 놈을 골라 먹는다. 뱀고기 중에서는 독사를 선호한다. 여느 뱀보다 몸에 더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적어도 곰 발바닥이나 제비집, 상어 지느러미, 원숭이 골, 코끼리 코쯤은 돼야 특미 대접을 받는다. 곰은 앞발에 영양분을 저장한 채 동면하는데, 자면서도 영양을 공급받기 위해 앞발을 자주 빤다고 한다. 따라서 ‘영양의 보고’인 곰 발바닥에는 곰의 타액까지 묻어 있어 최고의 요리가 된다는 것이다.
제비집 요리에 쓰이는 제비는 주로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바다제비(海燕)인데, 이놈은 해안의 깎아지른 절벽에다 여러가지 해초를 물어와서는 침을 발라 집을 짓는다. 이게 요리의 재료가 된다. 거기에 제비의 타액이 진하게 묻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한 해안 마을에서는 ‘제비 전용아파트’ 신축 붐이 불고 있다. 제비들이 힘들게 절벽에다 집을 짓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제비 아파트를 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비집을 홍콩이나 광저우(廣州) 등지로 수출해 큰돈을 번다.
힘이 세고 용맹한 것으로 알려진 상어는 지느러미에 힘이 몰려 있다고 여겨져 상어 지느러미는 오래 전부터 고급 식재료의 반열에 올랐다.
원숭이 골은 그리 흔한 별미는 아니지만, 영화 ‘인디애나 존스’에 나왔듯이 그것을 먹는 방법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엽기 그 자체다. 먼저 탁자 한가운데에다 구멍을 뚫고는 살아 있는 원숭이의 머리 윗부분이 구멍으로 솟아오르게 한 뒤 움직이지 못하게 꽉 조인다. 그런 다음 탁자 밑의 원숭이를 마구 두들겨패 약을 바싹 올린다. 그래야만 최고의 맛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탁자 밑에서는 원숭이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데, 탁자 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원숭이의 뜨거운 골을 은수저로 파먹고 있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중국인들은 또 징그럽기 짝이 없는 지네를 약용이 아니라 식용으로 삼으며, 사슴의 눈알로 만든 ‘명월조금봉(明月照金鳳)’이란 요리도 즐긴다. 사슴 눈알을 요리할 때는 세심하게 주의를 해야 한다. 사슴의 눈을 빼서 깨끗이 닦은 다음 닭고기 국물에 넣고 삶되 눈알에 절대 상처를 내서는 안된다. 눈알이 익으면 반으로 잘라 달걀 흰자와 닭고기 국물에 붓고 쪄내서 그 중간에 반숙한 비둘기 알을 놓아서 먹는다.
다양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기는 프랑스도 중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프랑스는 서양을 대표하는 요리대국이자 ‘식도락(gastronomy)’이란 말을 가장 처음 쓴 나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쓰는 다양한 음식재료 중의 하나는 그들이 ‘에스카르고’라 부르는 달팽이다. 단단한 껍데기 속에 부드러운 속살을 지닌 달팽이는 독특한 향을 갖고 있어 예로부터 미각을 돋우는 전채요리로 널리 애용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달팽이는 프랑스 중부 부르고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크기가 4∼4.5cm쯤 된다. 살짝 데친 달팽이에 마늘과 파슬리, 다양한 허브로 만든 버터와 함께 오븐에 구워낸 에스카르고 맛은 일품이다.
에스카르고의 유래에 대해서는, 15세기 중엽 프랑스 어느 지방의 영주가 포도 경작지에서 달팽이가 포도나뭇잎을 갉아먹어 포도농사를 망치는 일이 잦자 달팽이를 식용으로 먹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그 뒤로 다양한 조리법이 개발돼 오늘날 프랑스 요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요리로 자리잡은 것이다. 달팽이에는 콘드로이친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원기를 회복시키고 노화를 방지해 준다고 알려져 달팽이요리는 ‘밤을 위한 요리’라고도 불린다.
태국, 필리핀, 케냐 등지에서는 악어를 사육하는 농장이 있으며, 이곳에서 공급되는 악어고기는 고급 식재료로 사용된다. 육질이 부드럽고 맛도 좋아 유럽으로도 수출된다. 필리핀에서는 악어 요리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매년 악어요리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요즘 광우병 공포가 확산되면서 쇠고기를 대신해 각광받는 육류로는 타조고기가 단연 으뜸이다. 타조고기는 일명 ‘깃털 달린 쇠고기’로도 불린다. 타조는 원래 야생조류라 강한 면역성을 갖고 있어 항생제 같은 약물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소 돼지 닭 등이 걸리기 쉬운 질병도 전염될 염려가 없는 무공해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서구에선 인기식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바람에 값도 5∼6배나 뛰었다.
타조고기를 가장 좋아하는 나라는 독일. 독일인들은 타조고기 소스 스파게티에 타조고기 스튜까지 만들어 판다. 중국과 북한에서도 최근 ‘인민식품’이라며 국가 차원에서 타조 사육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예전부터 프랑스인들이 즐겨 먹는 말고기도 광우병 파동 이후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국가, 즉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특히 그러하다. 순록고기도 인기상승 대열에 합류했다. 순록은 눈이 많고 겨울이 긴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북부지방인 라플란드에 주로 사는데, 유목생활을 하는 그곳 원주민 샤미족에게는 사막에서의 양이나 낙타 이상으로 유용한 가축이라 잘 먹지 않는다. 그렇지만 도시 사람들은 순록고기로 스테이크를 만들어 먹는다.
필자도 핀란드 여행 중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순록 요리를 맛본 적이 있는데, 잔뼈가 많다는 흠은 있었지만 우리의 갈비와 비슷한 맛이 났다. 순록은 인공사육하지 않고 방목해 키우므로 질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랍지역에서는 ‘사막의 배’라는 별명을 가진 낙타도 버젓이 식용으로 팔린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의 전통시장을 지나다 정육점에 낙타고기가 치렁치렁 걸려 있는 것을 봤는데, 머리부분에 눈이 그대로 붙어 있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곳 사람들은 고기맛이 무척 좋다고 했다. 값도 꽤 비쌌다.
쥐고기를 먹는 나라도 적지 않다. 먹어본 사람들의 얘기로는 육질이 쫄깃쫄깃하면서도 맛은 부드럽다고 한다. 안데스산맥 일대에 사는 케추아족은 우리가 닭을 기르듯 집에서 쥐의 일종인 모르모트를 기른다.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그놈을 잡아 기름에 튀겨 만든 ‘쿠이(cuy)’라는 음식을 내놓는다.
스페인의 시골지방에선 어린 양을 통째로 매달아 장작불 위에 천천히 돌리며 구워 먹고, 멕시코에서는 왕개미 알을 먹는다. 필리핀에서는 메뚜기 알과 개미 알, 개구리, 애벌레, 땅강아지, 사향고양이, 큰 도마뱀, 박쥐 등 갖가지 야생동물들을 먹을거리로 삼는다.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그들에게는 이런 동물을 잡아먹는 게 그리 특이할 게 없다.
호주에는 ‘부시터커(bushtucker)’라는 요리가 있다. 주재료는 호주에서만 사는 캥거루고기. 여기에 악어고기와 도마뱀고기, 그리고 각종 곤충 등이 첨가된다. 이곳 원주민인 애버리진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었던 전통음식인 부시터커는 요즘은 관광객에게도 팔고 있는데, 애버리진의 본향인 노던 테리토리와 퀸즐랜드에서 맛볼 수 있다.
우리처럼 개고기를 먹는 민족으로는 앞서 말한 대로 중국이 있고, 베트남, 필리핀, 에스키모들도 개고기를 먹는다. 일부이긴 하지만 유럽국가에서도 개고기를 먹는다. 한국을 찾은 유럽인들 가운데도 꽤 많은 이들이 개고기를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에스키모인들에게 개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동물이기 때문에 그들은 쓸모가 없어진 다음에야 식용으로 삼는다.
비인간적인 도살에 관한 한 프랑스라고 해서 그리 나을 게 없어 보인다. 그들이 자기네 ‘3대 요리’의 하나라 자랑하는 요리인 ‘푸아그라(foie gras)’, 즉 거위 간 요리는 도살이라는 순간적인 동작이 아니라 장장 수개월에 걸친 사육과정 자체가 끔찍스런 잔혹행위 바로 그것이다.
푸아그라용 거위는 자신의 부리로 모이를 먹지 못한다. 주둥이에 깔대기가 꽂혀 있기 때문이다. 그 속으로 주입되는 먹이도 거위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거위가 잘 먹지 않는 콩 등의 곡물을 깔대기 안에 쏟아붓는다. 그렇게 먹인 다음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머리 뒤에 용수철을 매달기도 한다. 모이를 토해내면 말짱 헛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자비한 고문이 계속되면 위경련을 일으키거나 모이주머니가 터지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게 당연하다. 심한 경우 질식사하기도 한다. 이런 처절한 서바이벌 게임에서 용케 살아남은 거위들은 간덩이가 부을 대로 부어 크기가 정상 거위의 10배 정도에 이른다. 푸아그라는 바로 이렇게 부은 간으로 만든 요리다.
서양의 요리대국 프랑스가 거위를 잔인하게 키운다면 동양의 요리대국 중국에선 오리를 그렇게 키운다. ‘베이징 덕(Peking duck)’이라 부르는 통오리구이(중국에선 ‘베이징 카오야’라 부른다)는 잔인하게 사육한 오리로 만든 것이다. 알에서 부화한 지 50일 정도 된 새끼오리를 좁고 어두운 공간에 집어넣고 강제로 먹이를 받아먹게 한다. 이같은 사육방법을 ‘전압식(塡鴨式)’이라 부른다.
이렇게 사육되는 오리는 운동도 못하고 계속 먹기만 해대니 자연 운동부족과 영양과잉이 되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지방질이 온몸에 퍼지면서 살이 통통하게 올라 한달 만에 무게가 4kg까지 불어난다. 이런 오리를 ‘티엔야’塡鴨라고 부르는데, 이게 바로 베이징 덕의 핵심 재료다. 아무리 질 좋은 오리를 사용해도 티엔야가 아니면 베이징 덕의 제맛을 낼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키워진 티엔야가 맛있는 요리로 바뀌려면 다시 한번 예사롭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깃털과 물갈퀴, 다리를 떼어내고 내장을 꺼낸 뒤 껍질과 살 사이에 공기를 넣어 탱탱하게 부풀린다. 그런 다음 몸 표면에 엿으로 만든 소스를 바르고 날씨 좋은 날을 택해 거꾸로 매달아 3일 정도 말린다. 마지막으로 목에서부터 물을 부어 넣고는 특수하게 제작된 화덕에서 다갈색이 될 때까지 잘 구운 후 손님의 접시에 올려놓는다.
이때 베이징 덕은 살코기와 껍질로 나누어져 나오는데, 살코기보다는 바삭바삭한 껍질이 더 맛이 있어 인기다. 먹을 때에는 만두피처럼 얇은 밀전병에 된장을 바른 다음 그 위에 오리고기 한 쪽을 놓고 파와 함께 말아서 입으로 가져간다.
베이징 덕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인지라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베이징을 찾는 외국인들도 베이징 덕 레스토랑을 즐겨 찾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베이징 덕 식당은 15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이징 왕푸징(王府井) 거리의 ‘취안취더(全聚德)’. 이곳에서는 베이징 덕 외에도 오리 수프, 오리 간 튀김, 오리발 요리 등 오리의 모든 것을 이용한 400여 종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동물보호론자들은 말을 못하는 동물에게도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날 최소한의 권리, 즉 ‘동물권’이 있다면서 잔인한 사육과 도살을 문제 삼는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의 개 도살방식이나 프랑스의 거위, 중국의 오리 사육방식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사육하고 도살하는 것이 개·거위·오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레스토랑과 햄버거 가게, 그리고 가정의 식탁에서 우리가 빈번히 마주하는 쇠고기도 그 못지않게 잔혹한 사육과정을 거친 것이다. 미국산 소의 대부분은 송아지 때는 골격을 키우고, 그게 어느 정도 이뤄지면 그 위에 살을 앉힌 다음 마지막 단계에서 맛을 낸다. 각 단계마다 사료를 적절하게 배합·조절하고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제를 투여해 원하는 성과를 거둔다. 운동을 못하도록 좁은 우리에 가두어 비육하는 것은 물론이다. 또 황소는 누린내가 나지 않도록 어릴 때 거세한다. 다시 말해 ‘압축성장’시켜 시장에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많이 가려먹는 무슬림이나 유대인, 인도인이 즐겨 먹는 닭도 잔혹하게 사육된다. 죽을 때까지 상대를 쪼며 싸우는 사나운 성질 때문에 다른 닭이 다칠 수도 있기에 인두로 부리를 아예 지져버린다. 그렇게 자란 닭은 소와 마찬가지로 기계화된 도살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최후를 맞는다.
인간은 잡식동물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있긴 하나 특정식품을 터부(금기)시 하는 관습도 지니고 있다. 민족과 지역에 따라 특별히 선호하는 식품이 있듯이 터부식품 또한 민족과 지역에 따라 다르다.
돼지고기는 중국인의 식탁에 가장 빈번히 오르는 육류이고, 한국인들은 고사상에 그 머리를 올려놓고 절을 하면서 사업이 번창하기를 빌 만큼 좋아하며, 일본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들의 평균수명을 일본 전체의 그것보다 2∼3세나 올려놓았다고 해서 장수식품으로 일컫는다.
그런 돼지고기를 아예 입에도 안 대는 사람들이 있다. 무슬림과 유대인이 그들이다. 그것도 단지 풍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경전인 코란과 구약성경의 금지규정에 따라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코란과 구약엔 그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따라서 해석이 분분하다. 돼지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비위생적이라 금기시했다는 주장도 있고, 미국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유목민들도 고단백질을 제공하는 돼지를 매력 있는 동물로 인정하지만, 그들의 환경이 양돈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돈 자체를 아예 금했다”고 설명한다.
돼지는 주로 곡물을 먹기 때문에 풀만으로는 기를 수 없다. 따라서 유목문화권보다는 농경문화권에 더 적합한 가축이다. 양쯔강과 황허 유역에서 벼·보리·밀 등을 재배하며 문명을 일으키고 발전해온 한족(漢族)들은 일찍이 돼지를 집에서 길렀고, 그런 이유로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다. 그들이 사람이 사는 ‘집(家)’이란 글자를 만들면서 ‘돼지(豕)’란 글자를 이용한 것만 봐도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땅을 일궈 씨를 뿌리고 작물을 수확하는 농경적 삶에는 하늘과 비, 바람, 번개, 뱀, 조상 등 온갖 것들을 향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관습이 생겨나 어쩔 수 없이 다신교 내지 범신론을 따르는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러나 유목문화를 영위하고 그 과정에서 유일신 종교를 탄생시킨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은 ‘나 이외의 신을 믿지 말라’는 경전의 가르침을 따른다. 그래서 다신교 문화가 스며든 농경적 삶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있는 양돈과 돼지고기 섭취를 아예 금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동물이 갖는 식품으로서의 효용성을 강조하는 해리스의 주장을 전적으로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주어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는 경제적 동물이라는 점에선 생각이 일치한다.
해리스의 효율성 이론을 들어보면 왜 서유럽인들이 개를 식용으로가 아니라 애완용으로 기르는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개를 사랑하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고기를 충분히 얻을 수 있고 개가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그다지 효용이 높지 않기 때문에 먹을거리로 삼지 않았으며, 그 대신 그곳의 개는 살아서 더 가치 있는 서비스를 주인에게 제공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사냥의 조력자로서, 혹은 외로운 주인의 말벗으로 개를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20세기 초까지는 개고기를 먹었고, 한국에 귀화한 독일 출신의 이참 씨에 따르면 프랑스와 독일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개를 식용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개를 순수한 애완용으로 삼은 것은 100년도 채 안된다. 자신의 세계를 프라이버시 보호란 이름으로 무슨 성처럼 견고하게 구축하면서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를 갖지 못하게 되자 개가 차츰 그들의 애완동물로 변해갔던 것이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프라이버시를 아직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 동양인에게 애완용으로서의 개의 가치가 서양인에게보다 크지 않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인간과의 만남이 좋은데 굳이 개를 그 반열에 올려놓을 까닭이 있겠는가. 별다른 요구사항이 없는데다 주인의 말에 일방적으로 복종할 뿐인 개와의 관계를 사람과의 만남보다 더 우선하는 서구인들의 모습에서 필자는 오히려 서구문명에 깃든 고독을 읽는다.
이야기를 다시 돼지고기로 돌려보자.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무슬림이나 유대인들은 양(羊)에게서 생활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구한다. 양젖을 이용한 요구르트와 치즈가 먹을거리의 주종이고, 양털은 집을 짓는 데나 바닥에 깔아 냉기를 막는 데 사용한다. 양은 유목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동물이다. 그들은 이렇듯 젖과 털을 계속 공급해주는 양을 쉽게 잡지 못한다. 양이 줄어들면 자칫 끼니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양고기로 만든 요리인 케밥은 값이 비싼 편이다.
그들은 양을 잡을 때도 마구잡이로 잡지 않는다. 그들만의 특이한 방식이 있다. 먼저 ‘대자대비 하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코란의 글귀를 외운 다음 목덜미의 경동맥을 끊고 양을 거꾸로 매달아 피를 뺀다. 그래도 남은 피는 소금을 뿌려 말끔히 닦아내는데, 그때 내장도 함께 제거한다.
이런 도살방법을 ‘하랄(halal)’이라고 한다. 이는 ‘합법적’이란 뜻으로, 이렇게 해야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뿐 아니라 양고기에서 나는 누린내도 없앨 수 있다. 그들에게 피는 부정(不淨)을 의미한다. 하랄 고기는 이슬람 성원이 있는 서울의 이태원 골목에서도 구경할 수 있다. 하랄을 지키는 무슬림들은 죽은 짐승의 고기나 피, 알라 외에 바친 것, 목 졸라 죽인 것, 야수에게 물려 죽은 것들도 먹지 않는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랄과 비슷한 ‘코셔(kosher)’라는 것이 있다. 유대인들 말로 ‘정결(淨潔)’이란 뜻을 가진 코셔에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이 포함된다. 하나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 있는 돼지고기의 식용금지다. 그들은 돼지란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 그저 ‘흰고기’라고 부른다.
또 하나는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잡지 말라’는 경전(레위기 22장28절)의 가르침에 따라 고기와 그 젖으로 만든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들은 “아무리 짐승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 먹을 수 있느냐,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 아닌가”라고 반문하지만, 명시적인 설명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아무튼 야훼 하느님의 명령이기에 코셔를 따를 수밖에 없는 유대인들은 아침식사 때는 대개 양젖이 들어 있는 것을 먹고, 저녁식사 때는 반대로 고기만 먹는다. 아침식사와 저녁식사는 먹을거리도 다를 뿐 아니라 사용하는 그릇과 개수대, 찬장, 행주까지 다른 것으로 사용한다. 조리와 설거지, 보관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코셔를 소중히 지키는 유대인들은 금요일 일몰에서부터 다음날 일몰까지 꼭 24시간 계속되는 안식일(Sabbath)에는 음식을 만들지 않는 것은 물론 불을 피우지도 않는다.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으로 보낸다.
돼지고기 못지않게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쇠고기의 식용을 금하는 이들도 있다. 인도인들은 소를 기르면서도 쇠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 이유 또한 그들의 종교적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이 전통이 생긴 것은 힌두교가 발흥한 이후인데다, 외부적 요인에 의해 카스트제도가 위축받았을 때(예를 들면 이슬람을 믿는 무굴왕조의 극성기) 더욱 강화됐다는 역사적 사실로도 확인된다.
여기에도 해리스의 효용성 이론을 적용할 수 있다. 소는 짐을 나르기도 하고 쟁기질도 하며, 우유와 유제품을 제공하고 배설물은 연료로 사용된다. 때문에 소는 인도인들에게 매우 유용한 가축이다. 그들은 소를 죽이는 것은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인도에서도 특히 힌두교가 번창했던 갠지스강 유역은 인구가 조밀해 그 어느 곳보다 소의 유용성이 컸다. 사람이 소를 잡아먹으면 자연 소의 수가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면 사람들의 먹을거리 또한 줄어들게 마련이다. 소와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소의 수를 늘리는 삶의 방식을 ‘아힘사(ahimsa)’, 즉 불살생이란 종교적 계율로 만들었다.
이는 힌두교 이후 인도 땅에서 태어난 불교, 자이나교 등으로도 이어졌다. 아힘사가 강조되자 단지 쇠고기를 먹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고기의 식용도 기피하는 베지테리언, 즉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 인도는 세계 최대의 채식주의 나라가 됐다.
멕시코시티에서 LA로 가는 비행기에서 필자의 옆자리에 앉은 30대 중반의 인도 여성도 채식주의자였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용 기내식을 주문했다. 스튜어디스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자 “빵과 샐러드만 달라”고 하고는 그것으로 식사를 끝냈다. 내가 “그것만 먹어도 괜찮냐”고 묻자 그녀는 “채식만 해도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이렇게 살아왔다”고 했다.
인도에서는 채식주의자들이 살아가기 좋게 오렌지 레몬 파파야 바나나 파인애플 사과 수박 등은 물론 갈증해소와 피로회복에 그만인 망고와 ‘잭푸르트’라 부르는 황록색 과일들을 사시사철 먹을 수 있다.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다 같은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벌꿀이나 유제품마저 입에 대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이 있는가 하면, 유제품은 먹지만 달걀은 먹지 않는 ‘락토(lacto)’, 유제품과 달걀을 모두 먹는 ‘락토 오보(lacto ovo)’, 유제품과 달걀에 생선까지 먹는 ‘페스코(pesco)’, 다른 고기는 안 먹고 닭고기만 먹는 ‘세미 베지테리언’ 등 실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채식주의를 뜻하는 영어 ‘베지테리어니즘(vegetarianism)’의 어원이 흔히 알고 있듯 채소를 뜻하는 베지터블(vegetable)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의’ ‘건전한’ ‘건강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베게투스(vegetus)’라는 사실이다.
채식(이는 물론 초식과는 다른 의미다)은 인간에게는 온전한 육체와 정신을, 하나뿐인 지구에는 온전한 환경을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고대인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는지 몰라도 1999년 초에 세계 30여 개국의 채식주의자 400여 명이 태국에 모여 ‘채식 천년 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다가오는 새로운 1000년은 육식을 삼가는 ‘채식 밀레니엄’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문명선언이었다. 그들은 이 선언을 통해 육식이 인간의 수성(獸性)을 길러 공격적으로 만들고,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돼지와 소에 이어 금기 내지 기피 식품이 된 예로는 문어 낙지 오징어 같은 연체동물이 있다. 그 주인공은 북유럽의 게르만족. 그곳 인근 바다에선 이런 연체동물을 쉽게 구경할 수 없기도 하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기독교 교리의 바탕이 되는 유대교의 식규범에는 지느러미나 비늘이 없는 동물을 먹지 말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연체동물을 비롯해 게, 새우, 뱀장어 등이 포함되는데, 북유럽인들은 여느 유럽인들과는 달리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해 낙지나 오징어를 멀리한다. 문어나 낙지가 그들에게 괴물의 대명사처럼 된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물고기를 아예 입에 대지 않는 종족이 있다. 티베트인, 아메리카 인디언 중의 나바호족과 아파치족, 아프리카의 일부 종족이 그들이다. 물과 친하지 않은 것이 그 주된 이유겠지만, 이는 잡식성의 극치를 달리는 인간도 민족과 종교, 지역적 특성 등의 이유로 먹지 못하거나 먹으려 하지 않는 먹을거리가 적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도 7세기 후반 불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육식을 금지했다. 그 역사는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일 때까지 무려 1200년이나 지속됐다. 그래서 육식 대신 어식(魚食)에 주력한 결과 ‘수산대국’ ‘스시대국’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이렇게 보면 민족과 종교, 지역에 따라 식재료와 조리방법, 먹는 방식까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식은 다른 문화현상, 즉 권력 역사 기술 경제 사회 공동체 종교 민족 등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시대와 사회, 그리고 환경의 소산이다. 동남아시아의 식습관에 정통한 필리핀의 음식문화사가이자 식품비평가로 여러 권의 관련서적을 펴낸 도린 페르난데스 여사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음식은 언제나 그 나라의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다. 문화가 먹을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문화는 늘 변하기 때문에 음식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적 영향과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반응한다. 고유의 먹을거리를 잃어버리면 마치 언어를 잃어버렸을 때처럼 문화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 음식은 역사이고 유대(紐帶)이며 문화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음식, 그것을 먹는 방식, 그것이 갖는 의미 등을 탐구하는 것은 인간의 문화와 삶 자체에 대한 탐구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각에서 생각하면 개고기의 식용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도살방법까지 합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우리에게 친근해진 용어 가운데 ‘문화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이란 것이 있다. 특히 개고기 문제가 불거지면서 그 사용빈도가 급증했다. 그러나 이는 바른 용어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장인 동양학자 두웨이밍(杜維明)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상대주의라는 것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근본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상대주의는 궁극성에 대한 추구를 이렇듯 상대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각 문화가 갖는 가치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문화의 가치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다원주의(cultural pluralism)’는 더 높은 궁극적 세계를 향한 인간의 노력을 다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동원하기보다는 ‘우리 모두’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먹을거리와 관련해 지금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은 개고기가 아니다. 오히려 광우병에 노출된 가축과 유전자 조작 식품이다. 개고기의 식용은 기껏해야 ‘혐오’라고 하는 주관적인 피해를 특정인들에게 줄 수 있으나, 광우병과 유전자 조작 식품은 불특정 다수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중차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식동물인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이고, 생산량을 급격히 늘리기 위해 동식물의 유전자 정보까지 조작하려는 인간의 탐욕을 거둬들이게 해야 한다. 이러한 탐욕을 부추기고 실행에 옮기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월드컵과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라면 개최국의 전통문화에 시비를 걸 것이 아니라, 인류의 먹을거리의 안전과 건강한 환경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을 마련하는 데 더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