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明堂 찾아 남몰래 이장하고 大權 도전!

대선주자들의 ‘정치風水’ 천태만상

  • 김두규 < 우석대 교수·풍수학자 > 안영배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ojong@donga.com

    입력2004-11-16 15: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조용히 조상묘 이장한 한화갑·김덕룡
    • 王氣서린 명당 이장으로 대망론 펼치는 김종필
    • 충청도 자미원 명당권에 가족묘 있는 이회창
    • 조상묘에 계룡산 백호 바람 불어오는 이인제
    • ‘거북이 바다를 바라보는’ 명당에 자리한 김중권 부모묘
    지난해 11월 말 대선 출마를 공식선언한 한화갑 민주당 상임고문. DJ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비서 출신인 한고문은 ‘신중한 언행’이 트레이드 마크다. 2001년 초반 이후 민주당 소속 대선 예비주자들이 너도나도 대권에 대한 포부를 밝히고 발빠른 행보를 할 때도 한고문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전해인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1위로 당선돼 탄탄한 당내 기반을 보여준 그였지만 내내 특유의 ‘조용한 움직임’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행보를 보여준 것은 2001년 6월 이후부터. 한고문은 이 시점부터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펴나가면서 자신의 위상을 부각시켰고, 차기 대선은 창(昌)대 반창(反昌)의 다자간 대결구도로 갈 것이며, 자신은 보스인 김대중 대통령이 말리더라도 출마할 것이라는 등 대선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신중하고 조용한 행보를 보이던 한고문이 갑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변신한 시점이 그의 부모 묘소를 이장한 시점과 묘하게 겹친다는 것. 양자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어떠한 함수 관계가 있는 것일까.

    한고문이 목포 하당에 있던 그의 부모묘를 어딘가로 옮겨간 것은 2001년 6월경의 일. 대부분의 하당 마을사람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전격적으로 이뤄진 일이었다고 한다. 한고문측 관계자도 이장 사실만 확인해줄 뿐 정확히 언제, 무슨 이유로 이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급하게 옮겨가느라 그랬는지 땅 수습도 제대로 안돼 있는 하당의 한고문 부모묘 터는 10여년 전에 조성됐다고 한다. 원래 남의 땅인데다 땅 주인이 평당 몇만원도 하지 않을 땅값을 평당 몇십만원이나 요구해 한고문 집안에서 불가피하게 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그 자리에 학교가 들어서기 때문에 묘를 파갔을 것이라는 소문도 들렸다. 그러나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아니었다.





    자미원 명당을 찾아서


    기자 일행은 목포 현지에서 한고문 조상묘의 파묘(破墓) 흔적을 확인한 후 어디로 조상 유골이 이장됐는지 계속 추적작업을 벌여나갔다. 서울의 풍수사들을 상대로 면담과 인터뷰를 한 결과 한고문의 부모 유골은 전라도 목포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충청도의 어느 명당 터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다음은 어렵게 찾아낸, 한고문 부모 묘 이장 작업에 일부 관여한 한 지관의 말이다.

    “한고문 집안은 파묘에서 운반, 이장 작업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을 각기 달리 고용하는 등 비밀리에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지점에 이장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마지막 이장 작업에 관여한 지관의 경우 아예 입을 막기 위해 일을 끝내자마자 미국으로 보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고문 조상묘 이장지와 관련해서는 서울의 이름 있는 지관의 도움으로 충청도의 자미원(紫微垣) 명당을 찾아갔다는 소문만 무성히 들릴 뿐, 더 이상 추적은 불가능했다.

    도대체 자미원 명당이란 무엇인가. 원래 자미원은 동양의 천문학에서 나온 이름으로, 하늘의 상제(上帝)가 거처하는 별자리로 알려져 있다. 한반도에서 자미원이란 말이 풍수에 최초로 등장한 것은 조선조 세종 때 당시 풍수사였던 문맹검이 한양 도성, 즉 경복궁을 자미원에 해당되는 천하의 길지라고 칭한데서다.

    이후 자미원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조 말 흥선대원군이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 묘를 충남 예산 가야산 자락의 명당에 쓰고 나서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더욱더 욕심을 부려 자미원 명당을 찾아나섰다는 야사에서다.

    이곳에 명당을 쓰면 조선의 국왕이 아니라 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자, 즉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보다 더 막강한 권력자가 나온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도 그 자미원 자리를 찾지 못하였고 해방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찾으려 하였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몇해 전 풍수로 세상을 들썩거리게 만든 육관 손석우씨도 이 자미원 명당 얘기를 꺼내며 정치인들의 권력욕을 부추기기도 했다.

    아무튼 자미원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략 그 범위는 점점 좁혀져 당진 이남과 홍성 이북이라는 것이 현재 통용되는 정설이다. 대동여지도를 찾아 추적해보면 금북정맥이 일월산(560m)→오서산(791m)→가야산(678m)→팔봉산(362m)으로 이이지면서 서해바다 안흥진으로 흘러가기까지 그 지맥의 어느 부분이다. 모두 1000m도 안되는 산들이지만 평지에서는 대단히 높은 산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과연 한고문의 부모는 자미원의 명당에 안치됐을까? 풍수에서는 선조의 명당 기운을 얻으면 후손이 잘된다는 발복 사상이 깊숙이 배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사실판단 여부를 떠나 명당을 쓰면 잘될 것이라는 강한 신념체계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부여하고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일종의 최면효과라고나 할까.

    한고문이 부모묘를 이장한 후 명당 발복 사상에 힘입어 대권 도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지난해 11월 서울 잠실 펜싱경기장에서 대규모 후원회를 열고 대선후보 경선출마 선언을 하는 자리에 경북 봉화 현불사의 설송스님이 참석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설송스님은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예언한 이후 여야의 대권주자들이 즐겨 찾아 가르침을 청하는 예언자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송스님의 후원회 참석 자체가 대권도전을 선언하는 한고문에게 ‘정신적 힘’이 된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명당 풍수 논리 역시 최소한 심리적 위안 정도는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풍수도참적 예언 이야기는 우리의 독특한 ‘정치(政治) 풍수’ 문화 역사에서 숱하게 보아온 바다.

    1995년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지관 손석우씨의 말을 들어 ‘대통령을 보게 될 자리’인 경기도 용인으로 가족묘를 옮긴 후 199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풍수 얘기는 요즘도 살아 숨쉬는 신화(神話)다.

    이러한 신화는 더 거슬러 올라가 1846년 흥선군 이하응이 당시 지관 정만인의 말을 듣고 ‘2명의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충남 가야산 명당터로 조상묘를 옮긴 사건과 그 모티브와 진행 과정이 거의 유사하다. 그로부터 20년이 채 안돼 흥선군의 아들(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그 손자(순종)도 황제가 되었으니 정만인의 예언된 풍수설은 그대로 실현된 셈이다. 이 남연군 묘에 대해서는 대원군의 기를 꺾기 위해 독일인 오페르트가 묘를 파고 정기를 끊고자 했다는 기록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은밀하게 조상묘를 이장한 정치인은 한고문이 처음은 아니라는 것. 1995년 당시 김대중 총재가 용인으로 가족묘를 이장할 즈음, 비밀리에 조상묘를 이장한 정치인이 또 있었다.

    바로 한나라당 김덕룡 의원이 그 주인공.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대통령이 날 자리’인 용인으로 가족묘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신의 조부모묘를 이장한 것이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대권주자군 중 한명으로 꼽히던 김덕룡 의원은 당시 김대중 총재의 조상묘 이장에 자극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김의원의 선조 묘터는 전북 익산군 황산면의 야산 자락. 증조모묘와 조부모묘가 함께 있다가 조부모묘만 파갔다는 게 당시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또 김덕룡 의원 고향마을 사람들 사이에는 “김의원의 조부모가 큰 인물이 날 명당으로 옮겨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만, 워낙 비밀리에 이장 작업이 진행돼 구체적인 장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후 김덕룡 의원의 이장된 조상 묘터가 알려진 것은 2001년의 일. 그의 조부모 묘는 전북 익산에서 대둔산 정기가 흐르는 완주군 천등산 구지봉 아래였다. 이곳에서 성묘를 하는 김덕룡 의원 형제들이 주위 사람들의 눈에 띄고, 이장 땅에 대한 매입건으로 중개에 관여하였던 당시 마을 이장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 명당 터를 잡아준 지관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의 용인 가족묘를 잡아준 손석우씨였다는 것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김덕룡 의원의 조부모묘가 있는 천등산 구지봉은 경남 김해에 있는 김수로왕의 구지봉을 연상케 한다. 역사적으로 구지봉은 왕의 출현을 예언하는 장소요 무대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곳 마을 이름이 장선리(長仙里)로, 하늘의 신선 가운데 가장 으뜸 된 자의 땅이란 뜻이다. 이는 용인으로 이장한 김대중 대통령의 가족묘가 천선하강형(天仙下降形)의 명당이었듯이, 장선(長仙) 역시 천자(天子)가 날 땅으로 손석우씨가 소점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손씨는 왕기 서린 명당 두 곳을 거의 비슷한 시점에 낙점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곳곳에 이처럼 왕기 서린 명당이 많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런 손씨는 1998년 사망 후 자신의 사후지지(死後之地)로 자미원 명당권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전에 줄곧 자미원 명당터를 입에 달고 다니던 손씨의 묘는 남연군 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가야산 도립공원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 역시 자미원 명당권역에 해당한다.

    그뿐 아니다. 한고문의 부모 유골이 찾아갔다는 자미원 명당으로 추정되고 있는 지역권에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선영 등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다.

    정확히 분류하자면 충남 예산군 예산읍의 이회창 총재 선영은 이총재가 1997년 처음 대권 도전을 선언하기 이전부터 조성된 가족묘이고, 김종필 총재의 선영은 지난해 6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 있던 부모 묘소를 충남 예산군 신양면의 산막산으로 이장해온 것이다.

    두 야당 총재의 선영이 안치된 충남 예산 땅은 차령산맥 줄기가 벋어내려 수많은 명당 혈처(穴處)를 만들어놓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도 당대의 세도가들이 이곳에 명당을 잡았다.

    먼저 김종필 총재의 조상묘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 풍수론에서 볼 때 40여 년간 항상 권력의 2인자로만 머물렀던 김종필 총재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지 않은 인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역대 권력자들처럼 묘지 풍수를 신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의미다.

    그러한 김총재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충남 예산군 신양면 하천리 산막산의 ‘명당’으로 부모묘를 이장한 사건이다.

    김총재의 부모묘가 있는 산막산 정상 부근에서 보이는 앞쪽 마을은 귀한 사람이 나온다는 뜻의 ‘귀곡(貴谷)리’다. 한편 그 마을에서 오른편 뒤쪽으로는 ‘왕을 모시는 마을’이라는 뜻의 ‘시왕(侍王)리’가 있다. 묘 주위에 있는 마을 이름이 모두 권력과 무관치 않은 분위기를 내는 듯하다.

    김총재 문중에서는 이 일대가 명당이라는 사실을 알고 1996년에 임야 1만5000평을 매입, 묘지 이전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장 시기와 관련해서는 전통적으로 부정함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는 음력 윤달이 든 해(2001년)를 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총재 부모묘 이장 사실이 알려진 후 김총재 주변에서는 두 가지 얘기가 흘러나왔다. 하나는 김총재의 집안 대사는 형님 김종락씨가 주관하므로 김총재가 이에 가타부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 실제로 이 일대 묘역을 사들이고 공사를 지휘한 것은 김종락씨의 큰아들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김총재가 정치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서 집안의 부모묘 이장 결정에 흔쾌히 따랐다는 것이다. 즉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는 심정으로 명당 발복에 기대를 걸었다는 해석이다.

    현재로서는 두번째 해석에 무게가 실리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선거 2년 전에 이장을 하였던 김대중 대통령의 경우와 2002년 말 대선까지 1년 반을 남겨둔 시점에서 이장을 한 김종필 총재의 경우는 다른 해석이나 변명을 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 풍수이론으로 보아도 그렇다. 조씨 성을 가진 풍수사가 묘터를 잡아주었다는 부모묘에서도 대권에 대한 김총재의 욕심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은 기자 일행과 동행한, 한 여류 풍수학인의 해석이다.

    “전반적으로 땅의 기세는 웅장하고 대인의 풍모를 갖춘 곳이다. 주산(主山)에서 혈장으로 이어지는 입수(入首)가 비룡(飛龍)의 지세다. ‘비룡재천(飛龍在天)’이라는 말이 주역 건괘(乾卦)에 있듯이, 군자가 창조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펼칠 뜻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또 무덤이 조성된 혈장의 하단 부위에 암석이 드러나 있다. 암석은 흔히 기의 뭉침이 강한 것을 말해주는 흔적이다. 따라서 그 길흉화복이 빠르게 나타나며 강한 기운을 표상하기에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덤 하단 부위에 암석이 드러났다는 점으로 보아 자손 가운데 막내 쪽과 관련을 더 깊게 맺는다. 따라서 이 땅은 군자적 대인의 풍모를 지니면서도 권력지향적인 사람이 선호하는 땅이요, 빠른 발복을 기대하고 있는 곳이다. 아무튼 JP가 마음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즉 당대의 빠른 발복을 기대하는 염원이 김총재 부모 묘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총재의 부모 묘 이장 사실이 언론에 밝혀진 후 ‘한번 해보는 소리’ 쯤으로 여겨지던 ‘JP 대망론’이 세력을 갖춘 실체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왔고, 김총재 진영에서는 조상묘 이장과 JP 대망론을 자민련의 세 확장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JP 역시 이장 시점 이후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행동 반경도 크게 그려나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아무튼 JP가 이제 왕기(王氣)가 서려 있는 땅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으니 사람들은 이를 믿고 따르라는 속내가 엿보일 듯도 하다. 만약 JP가 2002년 대선에서 대권을 장악한다면 20세기의 DJ에 이어 21세기에도 명당의 권력창출 신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김종필 총재의 부모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선산이 있다.

    동일한 지역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동시에 배출할 수는 없는 법. 풍수 술사들의 논리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의 풍수 행적을 따져보면 이 둘 가운데 누가 더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지는 그 무덤을 보면 알 것이다.

    이회창 총재의 선영은 예산읍 예산리에 대부분 조상이 안장되어 있고, 대흥면 손지리에 조모묘가 있다. 이중 100여 평 남짓한 가족묘가 있는 예산읍 예산리 묘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 묘터의 주산은 차령산맥의 줄기인 금오산으로 풍수상 금오탁시(金烏啄屍)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기자 일행이 1997년 대선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아파트가 들어서고 산의 맥에 도로가 나 있는 등 묘터의 주변환경이 매우 어수선했다. 명당 여부를 떠나 선대를 모신 가족묘지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그러다 최근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조그만 봉분들이 2∼3m 간격으로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고, 이총재 부친의 신후지지로 잡아놓은 가묘(假墓)가 새로 들어섰다는 점 외에 풍수상 주변 환경이 인공적으로 변해 있었다.

    과거 이 가족묘터는 묘의 뒤에 있는 주산(主山)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주산에 해당하는 위치에 아파트 단지(능금마을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 약한 기운을 보강해주고 있었다. 주산이 강해지면 자신을 도와주는 후견인이 나타난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세가 별로 강하지 않던 우백호 산자락에도 연립주택이 들어서서 그 약점을 보강해주고 있었고, 기가 빠져나가던 좌청룡 자락에도 산성주공아파트가 들어서서 기를 붙들어매고 있는 형국이었다. 무덤 앞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교회도 수구막이 역할을 해 전체적으로 이총재 가족묘는 생기(生氣)가 충만한 상태였다.

    말하자면 주산과 좌청룡, 우백호 자락에 모두 아파트나 연립주택 단지가 들어서서 자연스럽게 명당의 기운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는 자연의 힘이 아닌 인공의 힘에 의해서 이회창 총재 주변에 사람과 재물이 모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풍수에서는 사람의 기, 인공의 기보다는 자연의 기를 우선시한다. 아무리 인공의 기를 덧씌운다 하더라도 땅이 가진 천연의 기운보다는 못하다는 논리다. 그런 점에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총재가 대권을 장악한다면, ‘명당으로부터 창출되는 대권’ 신화는 21세기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회창 총재 집안에서는 선영과 관련한 ‘아픈’ 기억이 있다. 1998년 봄 그의 조부모묘를 합장하는 과정에서 묘소에 쇠말뚝이 박혀 있는 것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쇠말뚝이 박힌 시기는 1997년 봄에서 1998년 봄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기간은 대선 레이스가 한창 진행중이던 때였다.

    문중에서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기를 꺾기 위해 산하에 박아놓은 쇠말뚝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와 연계해 누군가가 당시 이총재의 낙선을 겨냥해 쇠말뚝을 박은 것으로 추측했다. 이총재는 풍수지리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사건을 크게 확대시키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에 의해 조상의 묘에 쇠말뚝이 박혔다는 사실만큼은 그냥 덮어버리기엔 아픈 상처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울진이 낳은 인물로 주목받고 있는 김중권 민주당 상임고문의 조상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파손돼 있었다. 기자 일행이 이를 확인한 것은 지난해의 일.

    경북 울진군 평해읍의 평해중학교 맞은편 산에 위치한 김중권 고문의 부모 묘를 답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김고문은 민주당 대표 재직 시절 성묘라도 한번씩 할라치면 수십 명의 기자들도 동행하여 그 선영까지 찾았다고 한다. 취재차 동행한 기자들 뿐만 아니라 그를 수행한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부모 묘소에 상석이나 비석 하나 없는 평범한 모습에서 인간 김중권의 소박함을 이야기하곤 했다. 어쩌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의 질박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풍수전문가들의 눈에 보이는 부모 산소, 특히 아버지 무덤은 대단한 야망을 보여주는 자리다.

    이곳은 김중권 집안 소유의 땅이 아닌 남의 땅이다. 부모가 돌아가던 당시에는 김고문의 형편이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선산을 구입할 만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남의 땅에 모셨다는 것이다.

    이때 이 자리를 잡은 이는 김고문의 한 살 위 외삼촌인 박문호(朴文浩)씨. 김고문이 판사로 재임하던 시절 김고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박씨가 지관을 대동하고 매형(김고문의 부친)의 무덤 자리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 후 198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무덤 10여m 아래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자리가 명당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김고문의 외삼촌 박문호씨는 “중권이가 판사하던 시절에 잡은 자리이니 명당 발복과는 관계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자리를 써놓고 나중에 살펴보니 ‘거북이 물먹는 형국’으로서 좋은 자리임에는 틀림없다”고 말했다.

    김고문은 판사시절 시골에서 평당 몇백원에 지나지 않는 산을 충분히 살 여력이 있었음에도 마다하고 남의 산에 무덤을 써 산 주인과 적지 않은 갈등을빚었다고 박문호씨는 전한다.

    도대체 어떤 자리이기에 김고문은 이곳만 고집하는 것일까. 풍수지리에서는 산의 맥을 대단히 중시한다. 전두환 전대통령이 면장이라도 하려면 논두렁 정기를 받아야 한다고 대통령 재임시절 했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이곳은 논두렁 정기가 아니라 거대한 용의 정기(精氣)가 흐른다. 무덤 뒤의 주산은 마치 종을 엎어놓은 듯한 위엄 있는 하나의 산봉우리다. 그 산봉우리에서 가파르게 살짝 몸통을 돌리면서 무덤이 자리한 혈처로 맥을 이어가며 정기를 보내준다. 혈처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기를 뭉쳐 놓고 남은 기운은 왼쪽 가지를 만들어 그 아래로 흘려 보낸다. 김중권 아버지는 바로 그 혈처의 핵심처에, 그리고 어머니 무덤은 혈처의 끝 부분에 안장되었다.

    무덤 앞에서 바라보이는 안산은 일자(一字) 모양이다. 일자 모양은 면류관을 상징하여 제왕이 나올 땅이라 하였다. 또 무덤 정면, 안산 바로 옆으로는 동해 가 보인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고 박문호씨는 이야기했지만, 이 경우는 물과 상당히 떨어져 있어 아직 물을 마시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즉 신령스러운 거북이 바다를 바라보는 형국인 ‘영구망해형(靈龜望海形)’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김고문의 대권에 대한 야망은 드러난다.

    그런데 김고문 부모 산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다. 무덤 뒤 20여m 지점, 즉 주산과 무덤이 있는 혈장으로 이어지는 내룡(來龍) 산줄기 중심 부위에 관정(管井)을 파고 물을 뿜어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관정 구멍은 위에 덮개가 아무렇게나 덮인 채 방치돼 있었다.

    이곳은 관정을 팔 만한 아무런 이유가 없는 지점이다. 거대한 관정 기계를 동원한 것도 아니고 소형 관정 기계를 동원하여 조용히 파낸 흔적이다. 농업 용수나 식수가 필요한 곳도 아니다. 특히 남의 무덤 뒤 20여m 지점을 뚫는다는 것은 아무리 각박한 요즈음 인심이라지만 지금도 민가에서는 금기사항이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하였을까? 이곳을 거북이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보든, 혹은 거북이 바다를 바라보는 형국으로 보든, 주산을 몸통으로 보고, 무덤이 쓰인 곳을 머리로 보면 바로 목덜미 부분이다. 목덜미 한가운데 구멍을 뚫어 놓은 셈이다. 어느 유치한 정치적 라이벌의 소행은 아닌지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김고문과 같은 법조계 출신인 민주당 이인제 고문의 조상묘도 살펴보기로 하자. 그의 선영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어은리에 위치해 있다. 한국 최고의 명산 중 하나인 계룡산 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계룡산은 조선시대 도읍지를 이 산 기슭에 정하려고 했을 정도로 한국의 4대 명산으로 꼽히는 곳이다. 인근 주민들은 힘차게 뻗쳐 내려오던 계룡산 기운이 이곳 어은리에서 마무리되면서 응집되어 명당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

    이고문의 조부와 부모의 묘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조부와 모친의 묘는 계룡산 줄기의 작은 봉우리에 있고 부친의 묘소는 도로 건너 양지바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인제 고문 집안의 경우 이회창 총재 경우와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2000년에 작고한 모친(김화영 여사)의 묘소도 선영이 있는 곳에 모시려 했으므로 남아 있는 터 중에 지관이 좋다는 쪽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이라고 한다.

    기자 일행은 이인제 고문의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화영 여사는 “집안이 모두 기독교를 믿어 풍수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선영의 위치를 묻자 “계룡산 너머 고개에 썼다”고 대답하였다. 아무래도 “좋은 자리를 골라서 쓴 것 아니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던 것.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고문의 부친 무덤은 충남 논산군 연산면 어은리 양지뜸 마을 뒤 선영 끝에 자리한다. 마을 바깥에서 보면 이 선영이 있는 산능선은 마을을 감싸고 있는 좌청룡 끝 부분이다.

    이고문의 아버지 이윤식(李潤植)씨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에 77세로 작고하였다. 1988년 이고문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의 일이다. 현재의 자리에 부친이 안장되고 나서 그는 대한민국 정치인 가운데 노무현 고문과 함께 초고속 성장을 하게 된다. 이고문 부친 무덤에 대해 풍수학인 지종학씨는 다음과 같이 평을 한다.

    “이 자리는 맥을 정확히 받고 있는 데다가 맥이 끝나는 지점, 즉 기(氣)가 뭉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을 앞에 명당이 반듯하고, 명당수와 객수는 역수하여 제대로 앞을 막아주고, 앞에 보이는 귀사(貴砂)가 아름답다.”

    한마디로 대단한 풍수 명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00년 이고문의 모친이 작고하였을 때 부친 옆 혹은 아래의 빈 터를 버려두고 도로 건너에 있는 조부모 무덤 입구에 모친의 묘를 썼다는 점이다. 충청도 어느 신문에서는 “조부모 묘자리 부근이 아버지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으며, 일부 주변의 지관들이 심지어 아버지 무덤까지 이쪽으로 옮기기를 권한다”는 기사를 실은 적이 있었다.

    도로 건너편에 있는 이고문의 조부모묘와 모친묘는 산의 얼굴이 아니라 등에 해당한다. 즉 배신을 당할 수 있는 형세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계룡산 정상을 포함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우백호들의 기세가 무섭다. 아마도 계룡산 정상이 보이기 때문에 이쪽에 무덤을 썼을까? 계룡산은 천자가 나올 수 있다는 영산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곳은 자신의 주장을 전혀 펼 수 없는 곳이다. 한때 ‘한국의 힐러리’라는 말이 나돌았던 이고문 부인 역시 바로 기세등등한 우백호 산 기운을 타고 있다고 보면 풍수상 틀리지 않는 해석이다.

    이곳 무덤은 습하여 물이끼가 끼고, 벌레 구멍들이 보이는 것도 불안하다. 자칫하면 천옥(天獄)이 될 수 있는 자리다. 이 무덤들을 향해 불어오는 역풍 역시 만만치 않다. 이고문이 명당 발복을 받았다면 어느 정도 생가의 영향이고, 가장 강력한 발복은 그 아버지 무덤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에 섣부른 조상묘 이장은 안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고문의 조상 묘를 들여다보기로 하자. 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동네 입구 야산의 양지바른 곳에 노고문의 부모 묘가 있다. 동네 진입로에서 바라보이는 곳이기 때문에 직접 묘소까지 가지 않고도 살필 수 있다. 그저 양지바른 곳이라는 생각이 우선 든다.

    주산이 반듯한 것도 아니고 주산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내룡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또한 청룡 백호가 잘 감싸주는 것도 아니다. 마치 노무현 고문의 인생을 보는 듯하다. 든든한 집안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서 가까이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직접 노무현 부모 산소를 올라가 보면 입이 벌어질 정도다. 아버지 산소 바로 뒤에 암괴가 이어지고 있다. 지표면으로 드러난 길이가 2m는 족히 된다. 그 암괴 약간 뒤로 또 바위가 보인다. 즉 석맥(石脈)이 이어지고 있다. 석맥은 무덤 바로 뒤에서 좌측으로 이어진다.

    풍수에서 돌은 길과 흉의 극단을 주관한다. 조선조 왕실에서 석맥이 드러난 곳에 천광을 하고 왕비(중종 부인)를 안장하였다가 여기에 관여한 대신들이 유배를 가고 지관들은 죽임을 당한 사건이 생길 정도로 꺼려하는 것이 바로 석맥이다. 그러나 그곳이 좋은 자리일 경우 명당발복은 신속하게 일어나며 그 소응(所應)의 유형은 권력이라고 한다.

    무덤 뒤 입수(入首) 끝나는 지점에서 멈춘 바위는 좌측으로 선회하여 묘역을 감싸고 있다. 이렇게 암석이 돌출하여 입수 끝 부분을 이루고, 다시 그 끝부분에서 보호석이 좌측으로 이루어진 괴혈(怪穴)에 아버지 무덤을 쓰고 나서 노무현 고문은 국회의원이 되고 5공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호기심에서 답사 일행들이 패철을 꺼내어 묘의 좌향과 물이 빠져나가는 곳을 측정하고 그 길흉화복을 살펴보았다.

    패철은 풍수지리의 한 유파인 이기론에서 주로 활용한다. 현재 시중의 술사들이 주장하는 이기론은 ‘지리오결’이란 책을 주로 활용하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우선 이 책이 청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책이란 것으로 전해질 뿐 고증된 책도 아닐 뿐 아니라 조선조 지관선발시험에 전혀 끼이지 않던 책이다. 해방 이후에야 활용되기 시작했다.

    풍수 이기론의 전통은 호순신의 ‘지리신법’에서 찾아야 한다.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계룡산으로 하려다가 당시 경기관찰사 하륜이 바로 이 ‘지리신법’을 근거로 하여 계룡산 천도를 중단케 하면서 세상에 유명해진 책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지관선발 시험의 필수과목이기도 했다.

    아무튼 호순신의 이기론을 바탕으로 노고문의 조상묘를 감평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 무덤 뒤로 이어지는 내룡을 패철로 측정하면 축좌(丑坐)이고 물의 빠져나가는 방향은 손(巽)방이다. 이때 축(丑)은 오행의 토(土)로서 이 무덤은 토국(土局)이 된다. 토국의 경우 손(巽)방으로 흘러가는 물은 포태법상 묘(墓)요, 구성으로는 파군(破軍)이 된다.

    ‘지리신법’의 핵심 요지는 물은 좋은 방향에서 나와 나쁜 방향으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물이 묘(墓)궁인 땅은 생명체가 죽어 그 기만이 홀로 무덤에 감추어져 머무는 곳이다. 따라서 파군의 물은 흘러가거나 흘러들어 와서도 안 되는 땅이다. 특히 노고문의 부모 무덤처럼 파군방으로 흘러나가는 물은 재앙이 심하다고 ‘지리신법’은 적고 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노고문은 이 무덤을 쓴 후 승승장구한다 하지 않았던가? 파구가 비록 파군(破軍)수가 되더라도 그 방향이 건(乾), 곤(坤), 간(艮), 손(巽) 네 방위 가운데 하나가 되면 오히려 길하다는 예외규정이 있다. 이 방향은 빼어난 기(풍수 전문용어로 삼길육수(三吉六秀)라 함)가 주관하기 때문에 파군수가 흘러가도 상관이 없다는 논리다. 절묘하게도 노고문 부모 무덤과 수구의 방위가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져 있는 셈이다. 이곳을 주관하던 지관이 그것을 알고 했을 리 만무하다. 아무리 나쁜 상황도 노고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덤 앞 안산과 조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데, 내룡의 험한 바위와 달리 힘이 있고 아름답다. 지금까지의 역대 대통령의 생가와 선영과 비교해 볼 때 노고문의 것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는 풍수적 해석도 할 수 있다. 풍수서 ‘지리오결’ 가운데 다음 대목은 노무현 집안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임금과 제후가 나는 큰 명당은 기이한 형태의 괴혈에 있는데, 하늘이 덕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대권을 장악한다면 박정희에 이어 가장 강력한 풍수의 덕을 보는 사람이 될 것이며, 박정희보다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노무현을 만들어낸 땅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명당에서 나오는가


    지금까지 2002년 대선주자들과 관련한 풍수 명당을 살펴보았다. 결국 권력은 풍수 명당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가.

    역대 대통령들 혹은 그 선조, 그리고 대권을 꿈꾸는 이들이 풍수지리에 관심을 갖고 무덤을 좋은 자리에 찾아 쓰거나 옮긴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풍수지리론을 따라 조상묘를 이장한 사실 자체를 숨기거나, 거꾸로 적극적으로 이용한 대권주자들의 행태를 보면서 풍수 논리에서 그 어느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도 취재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풍수적 윤리 없이 아무나 명당 쓰면 발복한다는 20세기의 풍수명당 신화는 이제 깨어져야 하고, 21세기의 바람직한 풍수 논리를 도입할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에게 좋은 땅은 하나의 기회부여이며 시작일 뿐이다. 그들의 행위에 대해 풍수 윤리는 후에 풍수적 심판을 가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하면 좋은 땅도 도리어 재앙을 부른다”는 ‘설심부’의 경고가 그래서 눈에 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