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일본에서는 신라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배타시해 왔을까. 이 큰 의문점 때문에 필자는 오랜 세월 일본 속의 신라 연구에 집중해왔다. 일본왕실이 9세기 초엽부터 역사 문서에 공공연하게 신라를 적대시해온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 미스터리는 일본의 국가종교가 된 ‘일본 신도(日本 神道)’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신라의 신도(神道)였다는 사실을 일본왕실이 숨기려 발버둥친 데 있다. 필자는 그 역사의 내막을 일본 고대 문헌 등을 통해 낱낱이 고증 분석했다.
“‘고기(古記)’에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제3권)
이 문서에서 인용한 책 ‘고기’는 서기 738년에 씌어진 역사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문서기록상 ‘영집해’(859∼876년 성립)가 작성된 9세기가 아닌 이미 8세기 초부터 일본은 신라를 배격해온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사학자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을 ‘귀화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720년 편찬)에서도 3국(신라·백제·고구려)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3국을 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단지 백제로부터의 문물 도래만을 강조하며, 달갑지 않은 나라(이하‘蕃國’이라고 칭함)로 취급한 것은 주로 신라였다. 신라를 번국으로 삼은 것은, 통일신라(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정복한 시기 이후)가 되기 이전부터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부터는 신라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므로, 신라와 조선과 번국을 일체화하는 해석도 생겨났겠지만,‘일본서기’가 씌어진 무렵의 ‘달갑지 않은 나라(번국)는 신라이로다’는 다분히 신라를 적국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新羅蕃國視에 대하여’, 1978)
쉽게 말해 오오와 이와오의 견해는,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미워한 것은 신라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데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시대부터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듯이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 적대시하며 전쟁을 했기 때문에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곱게 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에서 본국 백제의 멸망 이전부터 신라를 적대시한 또다른 이유도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538년 백제 성왕이 백제인 계열의 왜왕인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에게 백제불교를 전파시킨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가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일본 땅에서는 신라의 신도(神道)가 왜왕실을 중심으로 국가 종교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본왕실에 백제 불교가 전파됨으로써,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는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587년)으로 비화되고마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의 종교전쟁▼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백제 계열의 왜왕 킨메이천황과 그의 아들 비타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간략하게 고증해둔다.
즉 킨메이천황의 친아들인 “비타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역사 기록이 일본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815년 편찬)에 씌어져 있다. 더구나 비타쓰천황은 왜왕실에서 최초로‘백제궁(百濟宮)’을 지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와 ‘부상략기’등 역사서에 실려 있다. 당시 백제왕궁을 세운 장소는 나라(奈良)의 ‘백제대정(百濟大井)’이란 곳이다.
아무튼 킨메이천황 초기에 백제 성왕(523∼554년 재위)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내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불교를 믿으라고 권했다.
이때 최고 대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가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을 킨메이천황으로부터 물려받아 자기 저택에 모셨다. 백제인이었던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자택을 불당으로 개축하여 ‘코우겐지(向原寺)’라고 이름짓고 백제 불교 포교에 앞장섰다.
불상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도에서는 사당(신사)에 신의 위패 등이 있을 따름이지 불상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는 없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신도신앙에서 불교로 신앙 대상을 바꾸는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이에 크게 당황한 것은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496∼570년) 대련이었다. 당시 왜왕실 조정은 ‘대신’직 다음의 제2인자 직위가 ‘대련’직이었으며, 대련은 군사와 경찰, 치안권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 모노노베노 가문은 백제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정에서 신도를 장악하고 천황을 보필하던 국신파(國神派)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불교가 들어오자 불만을 품고 곧 킨메이천황에게 불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상주를 하면서, 국신(國神)이 불교에 대해 진노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천하의 왕께서는, 항상 천지 사직의 180신을 춘하추동에 걸쳐 제사드리는 것이 그 일이옵니다. 이제 처음으로 외국신(부처-필자 주)을 예배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국신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일본서기’)
이와 같이 상주하자 킨메이천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사람인 이나메 대신에게 불상을 맡겨서 시험 삼아 예배시키도록 하겠소.”
이런 까닭에 소가노 이나메 대신이 불상을 자택으로 가져가 코우겐지라는 사찰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모노노베노 오코시가 신라계 신(饒速日命)의 후손이라는 것이 ‘신찬성씨록’에 밝혀져 있다. 이에 의하면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할아버지인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신라신의 12대손으로 나와 있으므로,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신라신의 14대손인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더라도 백제불교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라신도를 받들어 춘하추동으로 천지사직 180신에 대한 제사를 왕실에서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백제불교가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 본국 백제가 백제계 왜왕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일본 역사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충돌하게 된 사건을 이른바‘숭불논쟁(崇佛論爭)’이라 부른다. 이 숭불논쟁은 결코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내 큰 종교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신라계 국신파인 모노노베노 오코시 대련의 아들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년) 대련과 백제계 숭불파인 소가노 이나메 대신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 대신은 아버지대의 불화를 이어받아 결국 끔찍한 혈투를 벌이게 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코우겐지 사찰을 불지르고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사건을 일으킨 것이 570년의 일. 그뿐 아니라 585년에는 소가노 우마코 대련이 역시 자기 집에 세운 불교사찰인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를,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또다시 불질러버렸다. 이렇게 연거푸 훼불사건이 일어나자 587년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왕실 실권파로서 관군을 편성해 신라 신도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반항군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전사하고 만다.
이후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왜왕실에서 백제불교를 중흥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불교 중흥과정에서 머지않아 신라불교와 고구려불교도 건너와 왜왕실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불교가 번성한다고 해서 신도가 결코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해서 일본왕실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일체감 속에 번창해가는 일본적인 특성도 보이는 것이다. 즉 신사와 사찰이 협동하며 공존하는 특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사진 4 일본 신도의 주체인 신라신 소잔오존을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대표적 신사가 쿄우토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다. 야사카신사는 해마다 7월17일부터 24일까지 ‘기온마쓰리’를 거행해 소잔오존의 ‘신령’을 위령한다. 일본에서‘마쓰리’라는 제사 축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스사노오노미코토(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축제다.
야사카신사의 제사 축제 때 소잔오존의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이 자그마치 20대나 기나긴 행렬을 이루며 쿄우토 번화가를 행진한다. 신령의 수레(야마 14대, 호코 6대)가 행진하는데, 이때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 하고 우렁찬 구령을 외쳐댄다. 소잔오존이 왜나라에 건너오셨다는 뜻으로 경상도 말 “왔서에”의 구음변화가 바로 “왔쇼이”다. 이 점에 대해 일본 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마쓰리에서는 으레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하는 구령을 지르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것은 전국적인 구령이 되었다. 이것은 고대 조선어로서‘오셨다’는 의미라고 한다.”(重金碩之, ‘風習事典’, 1982)
아무튼 일본에서는 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쿄우토의 ‘야사카신사’가 그 총본사이며, 그 밑으로 전국 각지에 2000 곳이 넘는 ‘야사카신사’들이 산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신도에서는, 전국 각 고장의 야사카신사에서 신라신 소잔오존을 일본 제1의 개국신으로 떠받들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4 참조)
소잔오존이 신라에서 처음 건너왔던 ‘이즈모’ 땅에는 소잔오존과 그의 처 ‘쿠시이나다히매’를 함께 제사지내는 옛 신사 ‘야에가키신사(마쓰에 시)’가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또 소잔오존을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어오는 대표적인 신사는 오우미(近江)의 유명한‘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다.(사진5 참조)
이 지역 역시 고대 신라인들의 옛터전으로서, 신라 고분(핫케쓰 고분군)이 있으며, 수많은 스에키(신라 도기)며 각종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외에 신라신사(新羅神社)라는 명칭의 신사들도 아직 일본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마죠우의 신라신사, 다지미의 신라신사, 히매지의 신라신사 등이 유명하다. 신라명신을 제사드리는 신라신사를 감추기 위해 신국(辛國, 카라쿠니)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단 ‘신국신사’도 전국 각지에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이두식으로 ‘신라’를 가리키는 ‘시라기(白木)’의 신라신사 등 일본의 군국주의체제에서 명칭이 바뀐 곳들도 여러 곳에 있다.
신라 천일창(天日槍) 왕자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들도 전국 도처에 허다하며, 또한 신라인 진씨(秦氏)가문이 신라 농신(農神)에게 제사드리는 큰 규모의 신사들이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이라는 것도 밝히고 싶다. 이를테면 오늘의 일본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인 후시미(伏見)의 이나리대사(稻荷大社)를 비롯해서 마쓰오대사(松尼大社), 카미카모신사(上駕茂神社), 시모카모신사(下駕茂神社) 등 대규모의 신사들이 신라인의 고대 신사라는 사실이다.
사진 5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농업이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려주는 곡식 용어를 짚어보기로 한다. 소잔오존의 신화에는 보식신(保食神, 우케모치노카미)이라는 여신이 등장한다.
보식신은 입에서 밥이 나오고, 또한 크고 작은 물고기가 입에서 나오는 여신이다. 이 보식신을 더럽다고 하면서 월야견존(쓰쿠요미노미코토) 신이 칼로 쳐죽여 버렸다. 그랬더니 죽은 보식신의 몸에서 여러가지 농작물들이 생겨나는 것이었다. 즉 머리에서 말(馬)이 나오고, 이마에서 ‘조’가 나오고, 눈에서 ‘뉘’가 나오고, 배에서는‘벼’가, 음부에서는 ‘팥’과 ‘보리’ 등이 나왔다. 이에 대해서 오오노 스즈무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보식신의 신화에 대해서 신체 각 부위와 생겨난 생산물을 조선어로 바꿔놓으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大野晋, ‘日本語の世界’)
merre(머리, 頭)→ mer(말, 馬)
che(자, )→ choh(조, 栗)
nun(눈, 眼)→ nui(뉘, 稗)
pei(배, 腹)→pyo¨(벼, 稻)
po¨ti(보지, 女陰)→p‘et(팥, 小豆)
마쓰모토 세이쵸우도 일본의 농작물 명칭이 조선어에서 발생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살해당한 보식신의 신체 각 부분으로부터 여러 종류의 농작물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농작물의 종류가 조선어인 경우 그 명칭과 신체의 부분이 일치하는 것이다.”(‘日本史謎と鍵’, 1976)
이와 같은 것은 일본 고대사의 신화가 신라신뿐 아니라 신라의 각종 농업문화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신라 신도가 일본 신도의 뿌리라는 사실이 한일간에 구체적으로 연구된 일이 없다는 것이 큰 유감이다. 이제 필자는 장기간에 걸쳐 일본에서 직접 연구해온, 일본 속의 신라신도와 신라문화를 본격적으로 규명해 나가려고 한다.
끝으로 신라신 소잔오명(스사노오노미코토)을 일본의 이두식 한자 표기(만요우가나)에서는 수좌지남명(須佐之男命)으로 명기하고 있다는 점도 굳이 밝혀둔다.
아무튼 538년 이전의 왜왕실에서 불교의 발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시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도를 존중해왔다. 엄밀하게 지적한다면, 이 신도는 고조선의 단군 숭배 등 천신(天神)신앙이 그 원류였다고 본다. 구태여 ‘신라신도’라고 분명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집약적으로 표현하자면 단군 후손인 고조선의 신도가 일본의 야요이시대(BC 3년∼AD 3년)에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즉 벼농사에서부터 대장간의 철기 생산, 금속공예, 베틀의 직조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한국의 온갖 산업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천신신앙인 신도도 일본에 스며들게 되었다.
우리 고대문화가 일본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진솔하게 시인해왔다.
이를테면 카큐슈우인대의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왜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고 밝혔다.
하늘신의 자손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도 조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조선 각국의 건국신화와 현저하게 유사한 것을 보이고 있다.…조선반도 남쪽에서 벼농사를 하고, 그곳에서 금속기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천손강림 신화와 금속기 등을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본다.”(앞의 책)
당시 농경을 비롯한 온갖 산업문화를 가지고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이, 미개한 일본땅에 정착하면서 그 선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여러 권위 있는 사학자들은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쵸우(松本淸張)씨가‘한일동족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꽤 유명하다.
“도대체 일본인의 원주민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모름지기 인도네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이들 원주민을 ‘야요이인’이라고 치자. 그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곳에, 조선에서 건너온 민족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이즈모(出雲)’ 민족이다. 이 이즈모 민족이 제1차 도래민족으로서 야요이시대 전기 경부터 상당수 건너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조선에서 천손족(天孫族), 기마(騎馬)민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건너왔다.… 그러므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조선문화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서로가 똑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극언(極言)한다면,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조선의 분국(分國)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對馬島)해협이 있어서, 조선이 동란을 겪을 때(신라·백제·고구려 등 3국의 전쟁시기-필자 주) 일본은 독립하여 더욱 더 일본적으로 되어 갔다. 일본적이라는 것은 선주 민족의 풍습을 퍼내 거기다가 융합시켰다고 본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도 같다.”(‘東京新聞’, 1972년 4월1일자 조간)
마쓰모토 세이쵸우가 지적한 ‘이즈모’ 민족은 ‘신라’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손족은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신화, 신라신화, 가야신화 등을 가진 우리 민족 전체를 통틀어 가리킨다. 또한 기마민족의 경우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만주 땅에서 살다가 한반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 전체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또 저명한 고고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의 연구를 인용해,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미카미씨에 따르면 부여며 고구려, 백제 등의 지배자는 수렵민족적인 기마민족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의 대부분도 그와 같은 성질의 민족이 이룬 것이라고 보아도 차질이 없을 것이다. 야요이시대에 조성된 북큐우슈우의 ‘고인돌’은 똑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행해졌던 묘제(墓制)인데, 이는 남한에서 갓 발생했던 계급사회의 지배자가 북큐우슈우로 이동했다는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마민족이 큐우슈우로 쳐들어왔을 가능성은 기원전 2세기경의 일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아무튼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제사 때는 놀랍다고나 할까, 아니 당연하다고 할까, 경상도 말인‘신라어’로 강신(降神)의 축문을 외운다. 긴 축문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경상도 말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물론 한자어인데, ‘아지매 여신(女神)’이 신라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이다.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일본말로 이 축문의 한자어들을 읽을 때에는 경상도 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축문의 한자 표기는‘이두(향찰)’식인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만요우카나’식이라고 부른다. 위의 이두식 축문을 우리나라 말로 읽는다면 ‘아지녀 어개, 어, 어, 어, 어, 어개’로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렇게 천황가의 축문이 경상도 말로 읽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황가의 신도 뿌리가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신라 신도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축문에 나오는 ‘아지매(阿知女)’란 무슨 뜻인가. 경상도 방언으로 ‘아주머니’라는 말인데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아지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부인에 대한 존칭어인‘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였다고 본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여신’이나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미나(をみな)’라는 여성대명사가 사용됐다.
일본 고대신화에서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 그 최초다. 이 ‘오미나’는 본래 우리나라의 옛말인‘에미나’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한국에서는‘여자’를‘에미나’로 불렀다. 그 흔적은 함경도며 강원도, 경상도 등 동해권 지방에서 아직도 통용되는‘에미나’라는 말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반 명사로서 ‘온나(おんな, 女)’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온나’의 어원이 귀족 여성을 칭하는 ‘오미나’라는 것은 일찍부터 저명한 일본어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었다.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金澤庄三郞, ‘廣辭林’, 1925)
경상도 방언에서는 또한 ‘어머니’를 ‘어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매(女)는 ‘아지매’의 매와 통한다. 또한 이 매에서 뒷날 어미 모(母) 자를 이루는‘모’의 발음도 나왔다고 본다.
사진 1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대부터 일본의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そのかみ)과 백제신인 한신(韓神, からかみ)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일본 고대 천황가 문서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엥기시키(延喜式, 연희식)’라는 이 천황가 문서는 서기 905년 다이고천황(897∼930년 재위)의 명에 따라 집필이 시작된 이후 927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23년에 걸쳐 완성된 이 문서는 일본 천황가의 모든 왕실제도와 규범이 50권 분량으로 편찬한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왕명에 의해서 이것을 작성한 주체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871∼909년) 대신과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880∼949년) 대신 형제다. 왕실 귀족가문의 두 형제는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좌대신과 태정대신 등 최고 장관직에 있었던 백제계 인물들이다.
이 ‘연희식’의 제1권 신기(神祇)편에는 서두에 천황궁에서 모시는 사당의 3신이 나온다. 가장 앞에는 신라신을 모신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가 나오고 두번째로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가 등장한다.(사진 1 참조)
또한 이 기록에 잇대어서 살펴보면, 천황들이 모셔온 왕실의 신은 모두 285신에 이른다. 그 순서도 맨 앞에 신라계 신사인 원신사에서 모시는 한 분의 신이 나오고, 뒤이어 백제계 신사인 한신사에서 모시는 두 분의 신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신라계의 여러 신들을 모신 신사가 줄을 잇는다. ‘카모신사(賀茂神社)’ ‘마쓰오대사(松尾大社)’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신 네 분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 등도 등장한다.
이것은 ‘연희식’ 편찬 당시 천황들이 백제 계열의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신들을 모신 신사와 백제신들을 모신 신사들의 서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 천황가 신화(神話)의 신들이 대부분 신라신이었으며, 일본 고대사(‘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라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일본의 신통보는 신라신과 백제신의 계보를 한 조상신의 후손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712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대년신(大年神)이 신활수비신의 딸인 이노비매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대국어혼신(大國御魂神), 다음은 한신(韓神), 다음은 증부리신(曾富理神), 다음은 백일신(白日神), 다음은 성신(聖神)이다.”
‘대년신’이란 신라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신이다. 이 대년신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 신들은 당연히 신라계일 터인데, 제2자인 한신(韓神)만은 백제신이다. 어째서 신라신의 자식들 중에 백제신이 들어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를 쓴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 723년 사망)는 조정에서 내무장관격인 ‘민부경’으로서, 백제 계열의 조신이었다.
아무튼 한신은 일본 천황가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이거니와, ‘증부리신’은 신라신 원신(園神)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증부리신’은 일본어로 ‘소호리’의 신, 즉 ‘서울’의 신이다. 증부리신으로도 불리는 원신이 신라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의 통설이며, 쿄우토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역사책 ‘고사기’에는 대년신과 이노비매 사이에서 태어난 5신들 중에서, 한신과 증부리신 등 조선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증부리신이라는 것은 소시머리(ソシモリ, 牛頭)와 연관이 있는, 신라(新羅) 연고를 가진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신(韓神)은 원신(園神)과 나란히 조정의 왕궁 안에 모신 신으로 존숭되고 있고, 궁정의 진혼제 전야에 제사드리며, 그곳에서 ‘카구라(神樂)’도 연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9세기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카구라우타(神樂歌, 천황가 제사의식 때 축문 악보에 실린 제사 노래)’의 가사에는‘나 한신은 한(韓)을 뫼셔오노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다.”(‘日本神話’, 1970)
사진 2 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제사 첫머리에 신라신과 백제신을 모신 신전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아지매’를 초혼하는 의식인‘아지매노와자(阿知女法)’로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켜 천황가 제사의 ‘신악(神樂, 카구라)’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2명의 대신이 신전 좌우에 서서 엄숙하게 ‘아지매’여신의 초혼사 축문을 차례차례 외친다.
(본방)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본방) 오게
오, 오, 오, 오,
오
(말방) 오
오게
이어서 신물(新物) 잡기 제사가 이어지면서 신악의 본축문인 한신(韓神)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관이 근엄하게 춤을 춘다. 한신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도 한(韓)을 뫼셔오노라. 한(韓)을 뫼셔, 한(韓)을 뫼셔 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다 쥐어잡고, 나 한신도 한을 뫼셔오노라. 한을 뫼셔, 한을 뫼셔 오노라.
(본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여기서 한신(韓神)은 당연히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을 뜻한다. 또 이 경우 한은 여신인 아지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매’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닝(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神籬, 쿠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쿠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衝口發’)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곰의 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스이닝천황에게 단군의 어머니신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스이닝천황과 그의 부왕인 스진(崇信, 2세기경)천황이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스진천황은 재위 당시 신라신인 대국주신(大國主神, 大物主神으로도 부름)을 나라(奈良) 땅 미와산(三輪山)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지냈던 것이 밝혀졌다. 현재도 대국주신은 나라의 미와산 오오미와신사(大神神社)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사진 2 참조)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 제사 축문의 ‘한신’과 ‘한’에 대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스다 징고로우(臼田甚五郞) 교수는 신악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필자 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의 위치에서 고찰한다면,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神樂歌’, 1992)
우스다 징고로우 교수의 지적을 부연해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 천황가에서 모시고 있는 한신은 이미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터주신이다. 이 터주신이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신인 천황과 천황의 가족들을 지금의 천황가에다 기꺼이 모시는 것이 제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건너와서 한반도의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며 살고 있는 곳이며, 또한 한반도에 있는 천황족들의 조상신들까지 초혼해서 기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이와 같은 주장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살펴본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이다. 그렇다면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는 어떻게 종교관념으로 착근되었을까.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스진천황에 대해 토우쿄우대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 교수는“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기마민족국가론’, 1948)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스진천황이 고구려계 가야 출신의 일본 정복왕이 아닌, 신라 출신의 일본 정복왕으로 보고 있다.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 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필자는 또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말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토우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大日本地名辭書’, 1900)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라’라는 한글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松罔靜雄) 교수도 ‘일본고어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등 고대 역사책에는 초대 왕부터 제9대왕까지의 조작된 왕들을 써넣고 있고, 제10대 왕에 신라인 스진천황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9명의 왕들을 날조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와 같이 허위 조작된 ‘궐사천황’들은 일찍부터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수적인 우익사관 신봉자들은 날조된 9명의 왕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의 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래의 각종 역사교과서 왜곡뿐만이 아니라 구석기 유물마저 날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날조 역사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오랜 역사시대를 누렸다는 거짓을 꾸며내느라, 일본 역사를 한국보다 600년씩이나 위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며, 사실(史實)에 전혀 없는 9명의 왕들까지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왜왕실에 ‘천황호(天皇號)’가 등장한 것은 668년경이다. 712년에 최초의 일본 역사책 ‘고사기’가 등장할 때에 고대의 모든 왜왕의 왕호도 천황으로 일제히 통일시켜 표기한 것임도 밝혀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스진천황은 제사권과 정사권을 확립하는 한편, 일본의 선주민족을 신라의 산업문화권에 안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즉 선진 신라의 벼농사와 농기구·칼 등을 제작하는 철기산업, 스에키(須惠器, 쇠처럼 단단한 그릇이라는 쇠그릇으로 ‘쇠기’라는 고대 신라어에서 생겨난 명칭-필자 주)라고 하여 흙을 구워서 만드는 도기산업, 베틀에 의한 직조산업 등 선진문화산업은 당시 미개한 일본 선주민들로 하여금 이즈모민족의 신도(神道)신앙에 만족스럽게 순응토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일본 옛 문헌들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을 한자어로 ‘카라카누치(韓鍛治)’라고 하거나, 땅을 파는‘삽’을 한국 삽이라는 의미의‘카라사비(韓)’로 표현하거나 재기를 ‘카라스키(韓鋤)’로 부르는 데서 고대 한국의 문물이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권자가 가지고 건너간 신화(神話)와 신도(神道)라는 종교다. 일본 신도의 종주국인 신라에서 ‘신궁(神宮)’이 처음으로 섰다는 사실(史實)은 일본 사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신사(神社)나 신궁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에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BC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서기 4년에 서거했다. 그의 아들 남해(南海) 차차웅(次次雄)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서기 6년,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대대로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제21대 왕인 소지마립간은 487년 2월에 경주 나정 땅인‘내을(奈乙)’에다‘신궁’을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역시 신궁에 참배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의 왕들이 등극한 직후 시조묘와 신궁에 참배한 것은 제1차 주권인 제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제2차 주권인 정사권(政事權)까지 확립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시조묘를 세움으로써 최초로 제사권을 행사한 남해 차차웅에 대해서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 때의 학자 김대문은 “차차웅은‘자충(慈充)’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신라어로 무당을 가리키는 것이나, 세인이 무당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므로 이를 외경하여 칭하기를 자충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자충’이나 삼한(三韓) 시대의 천군(天君), 특히 단군(檀君) 등은 통치권자로서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祭司長)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면 좋을 것 같다.
왜왕실에서 신라인 스진천황이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에게 몸소 제사지낸 것 역시 신라의 자충이나 삼한의 천군처럼 제사권을 행사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더더구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는 통치권자가 주술적인 방법을 동원해가며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행사함으로써 통치기반을 지켜나갔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김열규 교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도 공감이 간다.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사상이 있었으며, 인간과 영혼 사이를 연결해주는 주술사로서의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널리 유행하였다.
특히 샤머니즘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악귀를 물리쳐 씨족원들을 환난으로부터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단군이나, 삼한의 천군, 신라의 차차웅 등에서 주술사의 모습이 발견된다.”(‘韓國神話와 巫俗硏究’, 1977)
앞에서 우즈다 징고로우 교수가 지적한 ‘신성한 무녀’도 똑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사진 3 스진천황이 종교와 함께 가지고 온 신화에도 신라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개국의 대표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나오노미코토)’과 그의 누이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은 신라신이다.(사진3 참조)
그런데 일본 신도주의자들은 천조대신을 떠받드는 동시에 그녀의 남동생인 소잔오존을 ‘악(惡)왕자’라고 적대적으로 표현, 이른바 ‘악신(惡神)’으로 비하시켜왔다. 사실 그 이유는 자못 단순하다. 소잔오존은 하늘신의 터전(高天原)에서 지상으로 하강할 때 그의 고국인 ‘황금의 나라’ 신라땅 우두주(牛頭州)로 내려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역력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즉 소잔오존은 어떻게 조작할 수 없는 신라신인 것이다. 반면에 소잔오존의 친누이인 천조대신의 경우는 그냥 하늘나라에 살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에도시대 후기에 앞장서서 신도주의 존왕론(尊王論)을 만든 국수주의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년) 등에 의해서, 천조대신은 국신(國神)으로 모셔져 정상에서 떠받들게 되었고, 모국인 신라에 갔다가 이즈모 땅으로 건너온 소잔오존은 배격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수주의적 신도사관 조작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인명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고증학적인 요소를 내버리고 신도적 요소를 발전시켜, 복고주의와 국수적·배외적(排外的) 입장에서 유교와 불교까지도 배격했다. 또한 국학사상을 중심으로 장대한 사상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천지시원(天地始原)으로부터 현세와 내세에까지 고사(古史)와 고전(古傳)에다 새로운 해석을 첨가시키고 기독교며 심령술, 신선술까지도 이용했다. 그 때문에 그의 사상체계는 도리어 비합리적이며 신앙적으로 조작되었다.”(앞 ‘인명사전’)
히라타 아쓰타네 같은 국수주의자들의 장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라신인 소잔오존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최초로 과학적 역사학의 태두로 존경받던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년) 교수는 1907년에 쓴 ‘일본고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잔오존은 신라국의 군주로 관련지어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서 숭배했다.… 소잔오존은 처음에 신라에 계셨고, 그곳은 우두주(牛頭州)인 소시머리((ソシモリ, 曾尸茂梨)로서 강원도 춘천부이다.… 소잔오존을 뒷날에 부르기를 우두천황(牛頭天王) 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서 … 지금도 쿄우토(京都) 굴지의 사당인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 모시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日本古代史’, 1907)
소잔오존(스사노오노미코토)이 신라신이며 일본의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가 일본 개국신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했다는 내용은 이 책의 제6장 제22절부터 25절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한 흥미진진한 한일동족론도 이 책에 담겨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으로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일본고대사’라는 책을 쓰기 전인 1891년에 ‘신도는 제천의 고속(神道は祭天の古俗)’이라는 장편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는 물론이고 세인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이 논문은 신라신인 소잔오존이 이즈모 땅에서 행한 족적, 한일 동족론에 대한 규명, 그리고 일본천황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천조대신’이 아니라 고구려의 동맹(東盟)의 신을 비롯해 부여의 영고(迎鼓)의 신, 예의 무천(舞天)의 신 등 고조선의 천신들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뒤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자택에서 국수주의자들로부터 기습 테러를 당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일본 신도의 뿌리가 고조선과 신라의 신도에 있다는 사실은, 당시까지 국수적 신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져온 것이었다. 국수적 신도사관에 의해 ‘대일본제국’의 천황국가론에 일대 타격이 된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의 자유는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그 필화사건 때문에 쿠메 쿠니타케 씨는 토우쿄우대 교수직에서 추방당하는 등 불행을 겪었지만, 16년이 지난 후에는 일본 역사의 명저로 꼽히는 ‘일본고대사’와 ‘나라사’를 동시에 써냄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소잔오존이 신라신이라는 사실은 그 이후에도 현대 일본의 여러 학자들이 시인하고 있으며, 오늘날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