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김정일 주도 통일’에 자신만만한 평양

<중국의 분석> 츠하오텐 中국방부장 북한방문 보고서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11-10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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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동아’는 지난해 말 미국 워싱턴DC에서 6·15 정상회담 이후 북한 내부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중요 문서를 입수했다.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넉 달 뒤인 2000년 10월 북한을 방문한 츠하오톈(遲浩田) 중국 국방부장 일행이 북한을 둘러보고 작성한 보고서다. 이 보고서의 가치는 북한과 혈맹관계에 있는 중국이 북한을 둘러보고 작성한 내부 문서라는 점이다. 북한의 정황을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이 분석한 리포트는 몇 차례 공개된 적이 있지만, 중국측이 북한을 바라본 보고서는 노출된 적이 거의 없다.
    또 한 가지 흥미있는 점은 이 보고서를 중국에 나가 있는 미국의 정보 관계자가 빼돌려, 미국측에 전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정보기관은 중국어로 된 이 문서를 영역해서, 북한의 상황과 북한에 대한 중국의 시각을 동시에 파악했다. 이 문서는 중국어로 작성된 원문이 있고, 이를 영역하고 해설을 곁들인 문서 두 가지가 있다. 중국어로만 된 원본은 미국의 정보 요원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빼돌린 것이고, 이를 영역하고, 해설한 문서는 미국의 관계기관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영역 문서에는 중국어 원문과 영역본과 해설이 동시에 실려있다. 이 해설을 보면, 이 문서를 중국에서 입수한 미국 관계기관의 시각까지 동시에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문서는 한국의 국정원과 일본의 정보기관에는 전해지지 않았다. 》

    2000년 10월16일부터 30일 사이에 중국의 츠하오텐(遲浩田) 국방부장을 비롯한 고위군사사절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혈맹관계인 중국의 국방부장 일행에게 북한의 최고 지도부는 외국의 어느 인사들보다도 허심탄회하게 자신들의 상황과 방침을 설명했을 것이다. 이 설명에는 남북 정상회담과 대외관계에 대한 북한의 복안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츠하오텐 국방부장 일행의 북한 방문을 북한 노동신문은 ‘조중친선은 계속 공고발전될 것이다’라는 제목 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조선과 중국은 련방이다. 두 나라 인민들은 일찍부터 외래 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함께 싸웠으며 이 과정에 친선의 유대를 튼튼히 하여 왔다. … (중략) … 우리 인민은 그때를 감회 깊이 돌이켜보고 있으며 중국 인민지원군 조선전선 참전날인 10월25일을 뜻 깊게 기념하였다.



    10월25일 5월1일 경기장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조선전참전 50돐 기념 대군중집회가 성대히 진행되였다.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당과 국가의 지도간부들과 함께 대군중집회에 참석하시였다.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고위 군사대표단과 중국손님들이 집회에 초대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인민무력부장인 김일철 차수는 기념보고에서 조중친선을 공고발전시키는 것은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며 우리 당과 정부의 변함없는 립장이라고 하면서 … (중략) …

    집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며 국무위원 겸 국방부장인 대표단 단장 지호전 상장은 오늘 전통적 중조친선협조는 강택민 총서기와 김정일 총비서의 깊은 관심속에서 새로운 단계에로 발전하고 있다고 하면서 중조 두 나라 인민들이 더욱 굳게 단결하여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추동하는 숭고한 사업에서 반드시 더 큰 성과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 중략’

    6·15 정상회담 당시 미국은 남북한의 정상이 주고받은 사안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국은 중국측의 문서를 낚아챈 것 이외에도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남북한 정상회담에 관한 내용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문서에 대한 미국측의 분석을 보면 김정일이 6·15 정상회담 이후 내세운 ‘조국통일실현, 민족대단결의 5대 방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미국측은 5대 방침 가운데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 세력을 반대한다는 네번째 원칙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미국측 문서분석관은 정상회담 직후 서울로 돌아가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김정일이 이 다섯가지 원칙을 주문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부시행정부 출범과 9·11 테러사건으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10월 당시만 해도 북한은 어느 시기보다 대외관계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는 이야기지만, 적어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수교한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던 것 같다.

    1994년 북·미 핵협상과 김일성 주석의 사망 이후 북한은 경제난에 계속 시달려왔다. 이 문서에도 나오지만 김정일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으로 정하고, 인민에게 인내하라고 주문했다. 이 시기부터 2000년까지 김정일은 모든 외교정책의 목표를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두었다. 미사일과 핵개발 카드로 미국을 협상에 끌어들여 클린턴이 북한을 방문하도록 한 뒤 북미 수교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북미 수교만 이루어지면 고난의 행군은 끝나고 승리의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외교정책 핵심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었다. 대미 관계 개선만 되면 한국의 경제 협력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서, 수령체제를 보장받고 경제를 되살릴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적어도 중국 국방부장 일행이 북한을 방문할 당시에는 그런 자신감을 가질만한 상황이었고 모든 것이 김정일의 계산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고,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 방문도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김정일의 이런 자신감이 구석구석에서 엿보이는 중국측의 보고서 원문을 번역해 소개한다.

    “나는 2000년 10월 16일부터 30일 사이에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북한의 수도인 평양과 개성, 남포, 청진, 향산군(香山郡) 등지를 방문하였다. 아울러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 참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양군중보고대회에도 참가하였고, 김정일(金正日) 조선노동당 총서기,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홍성남(洪成男) 정무원총리, 인민군 총정치국장 조명록(趙明祿) 차수, 인민무력부장 김일철(金一哲) 차수 그리고 인민군 총참모장 김영춘(金永春) 차수 등 북한 노동당과 정부의 최고위급 지도자들을 만났다.

    방문기간에 우리는 동행한 북한 안내원, 호텔의 서비스맨, 운전기사 그리고 각 계층의 간부, 군인, 일반인 등을 통해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전망, 전쟁 가능성 등 민감한 문제 그리고 현재 북한의 경제상황, 개혁개방의 전망, 상품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한 시각 등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으며 토론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북한 인민들이 새로운 정신으로 투지를 살려 북한식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남북통일을 실현하는 데 대해 자신감이 충만해 있음을 보았다. 이와 동시에 이번 방문을 통해 우리는 북한 국민경제의 기간산업인 철도, 전력, 철강생산 등의 분야가 아직도 마비상태에 있으며 인민들의 생활은 빈곤하고, 식량 공급은 외부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시장의 물품이 극히 결핍한 상황도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이미 가장 어려운 시기를 벗어났고 경제복구기에 진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방문기간의 체험을 네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난의 행군’을 끝내고 ‘제2의 천리마운동’이 시작됐다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듬해인 1995년에 북한은 역사상 최악의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 이때로부터 6년간 북한의 경제는 거의 마비상태에 처했고 연이어 수년간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했다. 방문기간에 참관한 청진시 김책제철연합기업소는 아직도 생산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책제철연합기업소는 연간생산량이 150만t이상으로 북한최대의 제철소였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흥성했던 제철작업을 볼 수 없었고, 텅 빈 작업소와 용광로 그리고 하얀 연기를 뿜고 있는 몇 개의 작은 굴뚝만 보였다. 철도운수 역시 혼란한 상태였다. 전력과 전압이 부족한데다 레일과 철도기반이 노후돼 열차는 속도를 낼 수 없었고, 이유도 없이 정차하는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어떤 때는 한 번 서면 10시간 이상 정차하기도 하였다. 청진에서 평양까지 정상적인 운행소요시간은 16시간인데 우리는 상행하는 데 29시간, 하행하는 데 32시간이나 걸렸다. 열차의 평균시속은 23㎞ 안팎으로, 시간이 고정되지 않은 객차 외에 화물열차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1995년 북한노동당과 김정일은 전국 인민들에게 ‘일심단결’ ‘간고분투’ ‘자력갱생’을 호소하고 항일유격대 정신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자는 구호를 제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김일성시대의 ‘대안(大安) 작업체계’ ‘강선(降仙)속도’, ‘청산리 농작법’ 등 구전형(舊典型)을 폐지하고, 비상시기의 ‘강계(江界)정신’ ‘성강봉화(成鋼烽火)’ ‘대홍단군의 감자농사정신’ 등 새로운 전형을 잇달아 수립하였다. 여기서 ‘강계정신’은 간고분투와 자력갱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성강봉화’와 ‘대홍단군의 감자농사정신’은 특정시기의 공업과 농업분야의 전형을 대표하는 것이다.

    북한노동당은 인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1999년 연말부터 전국적으로 ‘제2의 천리마운동’을 호소하였다. 현재 북한은 남북을 관통하는 개성-평양, 평양-향산간 고속도로와 북한의 동서를 연결하는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이미 건설했고, 평양-남포 고속도로를 건설중이다. 이외에 한국과 협력하여 남북한을 통과하는 경의선 철도(서울-신의주)를 복원하고 있으며, 금강산 관광자원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한국과 합작하여 개성을 나진선봉의 자유무역구보다 더 자유롭고 중국의 선전(深玔)과 비슷한 특별구로 개발할 계획이다.

    2.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감

    6·15 정상회담 후 북한에서는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이 유례없이 고조됐다. 북한인들은 보편적으로 남북통일 실현의 주도권을 김정일이 장악했다고 여기고 있으며, 김정일이 결심만 한다면 남북통일은 시간상의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이들은 6·15공동선언은 김정일의 결심을 대표하고 있고, 다시 전쟁이 발생하지는 않을 것이며 김정일이 제기한 ‘남북통일’의 실현과 ‘통일된 강성대국’의 건설 목표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올해(2000년) 10월 북미(北美) 양국 정상 특사의 상호방문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후 북한인들의 이러한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6·15 정상회담 이후 김정일은 조국통일실현, 민족대단결의 5대 방침을 제기한 바 있다. 이 다섯 가지 방침은 첫째 민족자주의 원칙에서 단결, 둘째 애국애족과 조국통일의 기치에서 단결, 셋째 북남관계 개선, 넷째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세력 반대, 다섯째 전민족의 상호 접촉과 대화 및 연대의 강화 등이다.

    이외에 북한의 각 분야에서는 부분적으로 상품경제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에서 지방까지, 관광지에서 경비가 삼엄한 휴전선 비무장지역까지 모두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점이 설치돼 있었다. 묘향산 등 대부분의 관광지는 과거와 달리 상품마다 가격을 매겨서 관광객들을 끌고 있었다. 광고와 협찬이 없었던 조선중앙텔레비전방송국도 최근에 프로그램 협찬이 나타났고 경제건설 관련보도도 늘어났으며, 어려움을 인정하고 현실을 직시하는 사상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품의식에 기초하여 북한은 주변국 우호단체들의 무료관광과 참관범위를 축소하고 있었다. 금강산과 같은 일부 상업적인 관광지는 이러한 무료관광을 사절한 지가 이미 수년이 되었다. 올해 9월부터 북한 당국은 북한을 방문한 외국 우호단체의 일상생활비 지급도 취소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따라서 국가가 규정한 기준에 의해 외국손님을 접대하며, 지방정부에서 체면을 위해 접대기준을 높이려 할 경우에는 자체적으로 외화를 마련하여 해결하거나 외국단체와 협상하여 해결할 것을 엄격히 요구하고 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지원전쟁 참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양시민대회에서 북한 무력부장인 김일철 차수는 “북한인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의 조국통일 실현, 민족대단결 5대 방침으로 조국통일의 대업을 반드시 실현할 것”이라고 자신감에 넘쳐 강조했다.

    실제로 6·15 정상회담 후 남북한은 문화·경제·군사 등 각 분야에서 다차원적이고 광범위하며 끊임없는 접촉과 대화를 해왔다. 일부 사업은 이미 협상을 거쳐 양측의 승인과 환영을 받았으며 이미 실천단계에 있는데, 경의선 복원공사를 예로 들 수 있다. 또 군사분계선의 임진강 수해방지 공동사업에 대해서도 양측은 내년에 착공하기로 합의하였으며, 북한측이 현재 계획중인 개성공단사업에 대해 한국측은 이미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표시한 바 있으며 그곳에 한국 최대의 자동차 생산기지를 설립할 계획이다. 한국측은 이미 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 연구를 진행중이라고 한다.

    북미관계 개선의 필요성에 의해 김정일은 미국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에 대해서도 아주 높은 예우를 해주었다. 김정일이 친히 올브라이트를 안내해 10만여 평양시민들이 벌이는 대형 집단체조를 함께 관람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지도자들 가운데서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을 제외하고는 올브라이트만이 이같은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3.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가 극에 달했다

    김일성 주석 서거 후 김정일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북한은 김정일 개인에 대한 숭배를 더 높은 차원으로 제고시켰다. 노동당의 선전기관과 국가의 언론매체들은 수령과 인민들의 관계를 봉건시대의 군신관계처럼 묘사하며 공개적으로 ‘선군(善君)정치’ ‘충효정신’ ‘인덕(仁德)정치’ 등을 부르짖고 있었다. 심지어 일부 구호는 김정일을 하느님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일본 사무라이식의 ‘자폭정신’이라든가, ‘수령을 위해 몸이 육탄이 되고, 벽이 되고, 방패가 되어 결사옹위한다’ 등의 적나라하고 피비린내 나는 구호도 있었다. 따라서 김정일을 ‘21세기의 태양’ ‘조선의 운명과 미래’ ‘조선노동당은 수령의 당’ 등은 너무 평범한 구호가 돼버렸다.

    4. 북중관계의 개선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 참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평양시민대회에서 북한무력부장인 김일철 차수는 금년 5월 김정일의 비공식 중국방문과 금년 10월10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개최한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한 것은 양국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북한을 방문하면서 우리는 입국하는 곳에서부터 지방의 관청 및 수도 평양의 모든 대외 공개장소에 일제히 김정일의 중국방문 사진이 걸려 있음을 보았다. 관영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중국의 개혁개방을 은근히 비꼬는 내용들이 사라졌다.

    10월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의 조선전쟁 참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에서는 28만 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시민보고대회가 열렸다. 김정일 등 당정군의 최고 지도자들 거의 모두가 츠하오톈(遲浩田) 중국 국방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중국 고위군사대표단을 안내하여 대회에 참석했으며 또 평양을 방문중인 모든 중국 대표단도 초청됐다. 대회에서 김일철 차수와 츠하오톈 중국 국방부장이 각각 연설을 하였고, 북한인 10만 명이 동원된 대형 집단체조도 시범을 보였다.

    그러나 북한의 일부 중간간부들은 사적인 장소에서, 북한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북중관계가 저조기에 들어갔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원조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서방자본주의 국가보다 적었다는 것이다. 일부 인사들은 중국이 한반도의 통일을 진심으로 환영하지 않을까봐 우려를 표시하기도 하였다.”

    이번에는 이 중국어 원문을 분석한 미국 정보분석관의 해설이다. 마치 ‘편집자 주’ 같은 형식으로 붙어 있는 이 영문 해설을 번역해서 소개한다. 우선 중국어 원문 앞에 붙어있는 전문 형식의 해설이다.

    이 리포트는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북한 내부사정과 중국이 북한을 보는 시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중국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네 문단들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중국 사절단(군사대표단에서 외교사절까지)의 북한에 대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최고위층과 함께 여러 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중국 사절단이 만난 북한의 최고위층은 다음과 같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의장, 홍성남 정무원 총리, 조명록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김영춘 인민군 총참모장 등이다.

    중국 방문단들의 보고서는 북한 인민들의 생활상황, 경제상황, 공업문제, 군사활동, 그리고 최고 지도자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이 보고서는 이들이 직접 북한 현지에서 보고 관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주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북한경제는 점차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심각한 상황이다.

    2)북한의 산업(철강 생산, 하루 소비량 등)은 매우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이는 에너지 부족 때문이다.

    3)통일을 바라는 북한인민들의 간절한 염원은 정상회담 이후에 최고조로 올랐다.

    4)조중관계는 중국 대표단의 방문과 공동 행사 개최, 또 여러가지 공식적인 행사로 계속 개선되고 있다.

    미국의 문서분석관은 첫째 단락인 ‘고난의 행군이 끝나고 제2의 천리마운동이 시작되었다’는 부분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제2의 천리마운동은 경제에 활력을 주기 위해 상품 생산과 교통수단을 향상시키는 급속한 운동이다. 그런데 한국은 북한과 함께 미국에 협의도 하지 않고, 비무장지대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개발하려 하고 있다. 남북한은 반드시 이 문제를 미국과 협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휴전협정에 따르면 미군이 비무장지대를 제어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측 관계기관은 둘째 단락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감’ 속에 들어 있는 6·15정상회담 직후 김정일이 내세운 다섯 가지 방침을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북한은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주민들에게 강조했다. 김정일은 6·15회담 당시 서울에 돌아가는 김대중에게도 이 원칙이 한국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강조했으리라고 본다. 이 원칙 가운데 넷째인 외세의 지배와 반통일 세력 반대라는 구절은 한국 내의 모든 보수적인 계층과 그룹을 위협하는 대단히 심각한 구절이다.”

    넷째 ‘북중관계의 개선’이라는 문단 옆에 미국측은 북한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해설을 덧붙였다. 그 번역이다.

    “중국에 대한 북한 정부의 태도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 방식으로 경제를 개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김정일은 이런 비판을 인민에게 알리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항상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식 사회주의 원칙과 주체사상을 사수하고 혁명과업인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중국이 했던 것 같은 정치개혁이나 경제 개방을 원하지도 않고 할 의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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