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 손잡고 출범한 통합여수시는 농촌과 도시, 도시와 내륙, 어항과 공단이 공존하는 관광·항구·공업도시로 탈바꿈했다.
많은 산지와 올망졸망한 섬들은 여수의 교통과 통합을 저해하는 요소기도 하지만, 산과 바다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덕택에 오늘날 여수는 ‘남도의 미항(美港)’ 또는 ‘한국의 나폴리’라는 찬사를 듣기도 한다.
여수는 항구도시로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1월의 평균기온이 2.2℃를 유지하기 때문에 바다의 수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고, 바다 수심은 200∼300m나 될 만큼 깊어 큰 배가 드나들기도 수월하다. 또 해안선의 굴곡이 심해서 바닷물이 들고나는 속도가 느릴 뿐더러 먼바다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파도를 숱한 섬들이 막아주기 때문에 바다는 늘 잔잔한 편이다. 그래서 여수 앞바다는 거친 바다를 싫어하는 갈치 멸치 고등어 병어 등이 많이 서식하고, 키조개와 굴 등의 조개류와 미역을 양식하기에도 알맞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조건과 남해안의 중간쯤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여수에는 조선 성종 때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전라좌수영)이 설치됐다. 그러나 여수항이 근대적인 항구로 개발된 것은 일제시대부터다. 당시 만주 땅을 침략하려던 제국주의 일본은 전쟁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하기 위해 여수 남항과 북항을 근대적인 항구로 개발하고, 광주 송정리에서 여수항까지의 약 160㎞ 구간에 철도를 부설했다.
이후 여수항과 일본 나가사키항 간에는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실은 연락선이 수시로 왕래했고, 여수 일대의 바다에서 잡힌 갖가지 해산물은 여수항에 집결됐다가 다시 전라선 열차에 실려 광주나 서울 등지로 팔려나갔다. 이즈음부터 여수항은 사람과 돈과 물자가 흔한 곳이 되어, 한동안 남도지방에서는 “여수 가서 돈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자랑 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여수항이 있는 여수면은 1931년에 여수읍으로, 그리고 해방 후인 1949년에 여수시로 승격됐다. 그에 따라 여수는 여수항 일대의 여수시와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여천군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1970년대에는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선 여천군의 삼일면과 쌍봉면이 여천출장소를 거쳐 여천시로 승격됐다. 여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세 개의 기초자치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고장 사람들은 오랫동안 같은 여수사람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여수와 여천이 서로 다른 고장이라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상적인 불편함과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여천군의 돌산도에 사는 사람이 시내버스를 타고 지척의 여수항에만 가려 해도 시내요금의 몇 곱절이나 되는 시외요금을 내야 했다. 서로 다른 두 시·군을 잇는 도로를 확·포장하거나 개설하려면 두 자치단체 사이에 업무협조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계획 자체가 무산되거나 어설프게 마무리되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수시와 여천시·군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이른바 ‘3려통합’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자 통합에 대한 주민들의 논의와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고, 1995년에는 처음으로 주민의견조사가 실시됐다. 비록 당시 재정자립도가 가장 높았던 여천시의 반대로 통합은 무산됐지만, 그 뒤로도 인근 순천시와 광양시가 1995년의 도농(都農)통합 이후 지방자치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고무된 주민들은 3려통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마침내 이들 지역의 자치단체장들과 의회가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1997년 9월9일 행정구역 통합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88.4%라는 압도적 우세의 찬성표가 나왔는데, 특히 여수시는 95.6%로 가장 높은 찬성률을 보였다. 3려통합에 미온적이던 여천시와 여천군도 각각 83.5%와 70.2%의 높은 찬성률을 기록했다.
이로써 지방자치제도의 취지와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게 된 3려지역 주민들은 농촌과 도시, 어항과 공단, 도서(島嶼)와 내륙이 공존하는 도시, 그리고 인구 33만 명의 전라남도 최대 도시인 통합 여수시를 출범시켰다. 아울러 국내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행정구역 통합’이라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정착과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여수시가 3려통합으로 얻은 가시적 성과는 적지 않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행정기구와 인력감축으로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여수시는 통합 이후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통해 전체 공무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549명을 감원했다. 또한 시장 관사를 포함한 57동의 불용(不用) 관사를 매각하거나 반납했으며, 통합 전의 3개 청사는 2개만 사용하고 하나는 매각을 위해 중앙정부에 용도변경을 요청한 상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되어 1999년에 예산액 대비 14.6%(584억원)였던 부채비율이 지난해에는 9.8%(332억원)로 낮아졌다.
1·2·3차산업이 고루 분포하게 된 것도 3려통합이 가져온 시너지효과로 볼 수 있다. 물론 종사하는 인구비율만 따지자면 도·소매업, 유통업, 교육·서비스업, 숙박·음식업 등을 포함하는 3차산업의 비중이 54.4%(2001년)로 가장 높다. 하지만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석유화학단지인 여천국가산업공단을 끼고 있는 덕택에 2차산업에 종사하는 주민도 20.4%에 이르고, 수산업과 농업을 아우르는 1차산업 인구도 25.4%나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수시는 관광도시, 공업도시, 항구도시의 특성을 고루 갖춘 도시다.
통합 여수시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에 시내버스 공동배차제를 실시하고 택시 사업구역을 통합함으로써 주민의 불편과 경제적 손실을 줄인 것도 3려통합의 성과에 든다. 그밖에도 통합 여수시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됐고, 중앙정부의 예산지원이 대폭 늘어남에 따라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같은 지역현안사업을 조기에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된 이후 여수시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고도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줬다. 행정분야에서는 행정능률과 투명성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특히 인터넷이 보편화된 뒤로는 누구라도 여수시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시정 현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불법영업으로 행정처분을 받은 업소의 명단과 처분 내용까지 곧바로 홈페이지에 올려진다.
또한 ‘시장에게 바란다’ ‘비공개 시장과의 대화’ 같은 직소(直訴) 코너를 통해 시장은 시민의 애로사항이나 공직자 비리 등을 직접 접수하고, 시민은 더욱 적극적으로 시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외지인들에게 여수시의 이미지를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관광분야에도 변화가 적지 않다. 특히 여수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오동도, 돌산대교, 진남관, 자산공원 등은 밤 풍경이 매우 화려해졌다. ‘여수항 나이트 투어 명소화 사업’의 일환으로 다채롭고 화려한 조명설비를 갖췄기 때문이다.
여수시의 거리 풍경도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었던 종려나무 가로수가 남녘 항구의 독특한 정취를 풍기고,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무성히 달고 있는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가로수도 거리를 싱그럽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여수시는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성과에 힘입어 여러 기관과 단체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수차례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한국능률협회의 ‘1999년 한국의 도시경쟁력 평가’에서 1위에 선정됐다. 그밖에도 도서개발사업 최우수기관, 시군 행정인센티브 평가 최우수기관, 목표관리제 평가 최우수기관 등으로 선정됐다. 여수시가 2000년 한해에 받은 시상금 총액만도 24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여수시는 2010년 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해 뛰고 있다. 이 박람회는 국제박람회 사무국(BIE)에서 공인하는 국가 차원의 박람회다. 박람회장의 규모는 대전 엑스포의 2배가 넘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의 제고, 대외경쟁력 향상, 고용창출, 외국 관광객의 수 등에서도 88올림픽이나 2002월드컵을 능가하는 행사라고 한다. 개최지는 오는 12월에 열릴 BIE 총회에서 결정될 예정인데, 한국 개최가 확정되면 박람회장은 여수시 오동도 부근의 해안과 간척지에 조성된다. 여수시는 지금 세계박람회가 가져올 엄청난 도약과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차고 희망에 넘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