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태재단에서 발견된 김우중 회장 명의의 양도성예금증서
- 김우중 회장이 야당총재 김대중에게 준 정치자금의 규모
- 여야 모두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 김우중 회장은 구조조정 않고 대통령만 쳐다보다 망했다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 시내에 우뚝서 있는 하노이 대우호텔은 경치가 좋은 호수공원을 끼고 있는 초특급호텔. 김우중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가 이 호텔을 지을 때 인테리어를 직접 챙겼을 만큼 공을 들인 곳으로 베트남에 진출한 대우브랜드의 자랑스런 상징이기도 했다.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재임시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머문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를 대표하는 대통령과 전경련 회장이 부부 동반으로 조찬을 함께 이유는 무엇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아세안(ASEAN) 정상회담 참석차 12월15일부터 17일까지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 하노이 대우호텔에 머물렀고, 이 소식을 미리 접한 김우중 회장은 아세안 각국의 정상들이 머무는 대우호텔의 대표이사로서 이들을 직접 접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노이로 직행했다. 당시 김회장은 뇌혈종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사들이 만류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갈 정도로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당시 대우그룹은 자금줄이 막혀 몹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대우측 한 인사의 말을 인용하면 ‘돈줄이 막혀 환장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대우측이 정부나 금융권에 여러차례 호소했어도 반응은 신통찮았고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하노이 대우호텔에 머문다니 ‘하늘이 내린’ 절호의 찬스였다. 김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치 않았다. 김대통령의 바쁜 일정속에서도 조찬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낸 것이다.
당시에는 김대통령과 김회장이 함께 나눈 대화 내용은 물론 아침 식사를 함께 한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한국경제’가 연재한 ‘대우패망 비사’에서 12월16일의 조찬회동 사실과 대화내용이 일부 공개됐다. 당시 김회장 부부를 수행했던 대우임원 B씨도 최근 김대통령과 김회장이 나눈 대화 내용을 확인해줬다.
“그 자리에서 김회장은 대통령께 수출환어음(D/A) 묶인 것들을 좀 풀어달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풀어주면 유동성에 숨통이 트여서 대우가 잘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통령께서는 김회장에게 ‘구조조정에 좀더 힘써달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조찬을 마치고 나오는데 김회장과 정회장의 표정이 아주 밝아요. 정회장님은 ‘참 잘 됐다, 이젠 끝났다’하면서 ‘우리 건의를 대통령께서 들어주기로 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후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알아보니 강수석이 틀어버린 겁니다. 나중에 워크아웃이 임박해서야 자금을 풀어줬는데 그때는 너무 늦었죠.”
김대중 대통령은 허락했는데 경제수석이 반대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당시 경제수석이었던 강봉균 한국개발원(KDI) 원장의 설명은 다르다.
“대통령을 수행해 하노이에 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두 분이 조찬을 하며 어떤 말씀을 나눴는지는 모릅니다. 그 무렵에 김회장이 수출문제와 관련해서 건의한 적은 있어요. 대통령이 김회장의 건의를 검토하라고 지시해서 김회장으로부터 자료를 받은 것도 사실이에요. 비서진들을 시켜 관련기관에 확인하는 등 협의를 했습니다. 김회장이 요청한 것들을 검토했는데, 가능한 것은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검토하는 데 몇 달 걸렸지만 워크아웃 들어갈 때까지 간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김회장의 건의에 대해 ‘검토’만 지시했고, 여러 전문가들의 검토 결과 김회장의 건의는 현실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은 하노이 대우호텔에서는 김회장에게 고개를 끄덕거려 놓고 돌아서서는 그저 검토하라고만 한 것일까. 당시 자금난으로 궁지에 몰렸던 김회장은 김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대우자금 문제를 풀어주겠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일까.
이런 의문과 관련해서 당시 김회장을 수행했던 B씨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정치는 내가 맡고 경제는 김회장이 대통령 노릇을 해달라’는 취지의 부탁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 김대통령은 경제와 관련해서는 경제수석이나 경제각료들이 김우중 회장에게 자문을 구하라고 지시했는데, 경제수석과 각료들이 이를 불편해 했던 것 같습니다.”
여권의 한 중진의원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한때 김우중 회장에 대한 김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어요. 김대통령은 ‘정치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김회장에 얘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결국 김회장이 자기 기업은 개혁하지 않고 버티다가 망하게 된 거죠.”
김대통령이 과연 ‘경제대통령’ 발언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서도 이 발언의 진위 여부에 대해 확인해주지는 않았다. 당시 정황상 김대중 대통령이나 이희호 여사에게 확인해야 할 터인데 최근 각종 ‘게이트’로 ‘정신을 못차리는’ 대통령에게 3년 여 전에 한 발언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김대통령과 김회장이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만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정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IMF사태 극복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가로 놓였던 1998년에 한 사람은 대통령으로서 다른 한 사람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손을 맞잡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쩌다가 서로 멀어지게 된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은 출신지역이나 학력, 살아온 내력이나 정치적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지기는 힘든 사이였다. 김대통령은 전남 하의도 출신으로 목포상고를 졸업했고 박정희정권에 저항하다가 옥살이를 했다. 반면 서울 출신의 김우중 회장은 경기고와 연세대 상대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박정희 전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기업가였다.
이처럼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살 법한 두 사람의 인생이 교차하게 된 것은 언제쯤일까. 항간에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해외에서 이름이 꽤 알려졌던 김대중씨에 대해 김우중 회장이 호감을 갖고 접근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 김회장의 요청으로 재야인사였던 김대중씨를 어느 호텔에서 만났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격변기였던 서울의 봄과 정치적 억압의 시기였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 김우중 회장이 무리를 하며 ‘위험한’ 정치인을 만났을 리는 만무하다. 특히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김대통령이 사형 선고를 받고 사면으로 풀려난 뒤 미국에 오랫동안 체류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도 두 사람이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훈 전 민주당 의원은 두 사람의 접촉이 시작된 것을 노태우 정권 때로 기억했다. 박 전의원은 경기고 출신으로 대우그룹에서 상무를 지냈다. 전북 임실 출신으로 14대 때는 전국구, 15대 때는 지역구(전북 임실·순창)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박 전의원은 김대중 당시 야당 총재와 김우중 회장 사이에서 ‘메신저’역할을 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 김회장과 김총재의 만남을 몇 번 주선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배석하지 않아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김회장은 민주화운동이나 재야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평소 DJ뿐 아니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인지 여러 번 물어봤어요. 제가 설명하면 상당히 경청하곤 했습니다. DJ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은 분’이라고 상당히 높게 평가했어요.”
박 전의원은 두 사람의 입장을 모두 배려하려는 입장이 역력했다. 그러나 박 전의원의 부인 김재옥씨의 설명은 달랐다.
“김회장님은 김대중 대통령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상무를 통해 자꾸 만나자고 하니까 김회장님이 만나 준 거예요.”
일반적으로 정가에서는 김우중 회장이 다른 재벌총수들보다는 DJ에 대해 호의적이었다고 말한다. 재벌총수들이 여야에 정치자금을 줄 때 일반적으로 8대2의 비율로 준다면 김회장의 경우는 7대3의 비율로 조금 더 줬다는 식이다. 한 동교동계 인사의 말이다.
“야당 때 김회장이 우리를 도와준 액수는 한번에 2억원 안팎이었어요. 여당에 준 것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다른 재벌총수들이 준 것보다는 많았지요.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했어요.”
박정훈 전의원도 부인인 김재옥씨가 터뜨린 ‘엄청난 규모’의 정치자금 제공설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돈의 규모는 세 차례에 걸쳐 2억~3억원 정도가 들어간 사과박스 1개씩, 모두 합해 8억~9억원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한 바 있다. 정가에서도 박 전의원이 말한 정치자금의 규모가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1월15일 저녁 전화통화에서 김재옥씨는 여전히 자신의 말이 옳다는 주장을 했다.
“김회장이 마련한 돈은 바로 동교동으로 갔습니다. 김홍일 의원은 단지 심부름을 한 것 뿐이지요. 그리고 그뒤로도 엄청난 돈이 김회장으로부터 동교동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김재옥씨는 동교동으로 돈을 가져가는 것을 봤느냐는 질문에 “보지는 못했지만 들어서 다 안다”고 말했다.
김우중 회장이 DJ를 지원한다는 사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1994년. 그해 10월 아태재단의 금고가 털렸는데 이때 도난당한 8000만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발행인이 김우중 회장으로 밝혀졌다는 증시루머가 돌았던 것. 김회장이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을 지원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대우측에서는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최근 백기승 전 대우그룹 홍보이사와의 전화통화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몇가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1994년 10월 아태재단 금고에서 도난당한 양도성예금증서가 김우중 회장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요?
“예”
-어떻게 그 양도성예금증서가 아태재단 금고에 들어가게 됐나요.
“그 배경은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확인된 것도 아니잖아요. 다만 당시에 아태재단 후원금이 화제가 됐잖아요.”
-후원금은 준 건가요.
“그렇죠. 그 때문에 김영삼 정권때 많이 어려웠어요.”
김우중 회장은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 도움을 줬을까. 김재옥씨는 “당시에는 우리가 관여하지 않았지만 K모씨가 돈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재옥씨는 K모씨의 신원에 대해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계속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호남지역 의원 출신으로 지난 16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김우중 회장이 1997년 대선국면에서 오로지 김대중 후보쪽만 지원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한 대우측 인사는 “정치자금에 관한 한 여야 어느쪽도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정치자금과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입장을 알아보기 위해 청와대 공보수석실에 질문지를 보냈다. 질문요지는 ‘김대중 대통령이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받은 정치자금은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김우중 회장이 박정훈 전의원을 통해 김홍일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정치자금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됐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공보수석실에서는 “2001년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힌 대통령의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한다”고 했다.
정치자금에 대한 김대통령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저는 과거정권 5년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정치자금에 대해서 불법사항이 없는가 추적당했습니다. 심지어 대선기간 중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댔습니까? 그러나 자기들이 집권하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선거 때, 수백억원을 감춰놨다고 해서 우리가 국회에서 국정감사권을 발동해서 증인 심문하고 계좌를 추적하자고 하니까 그 동의안을 그 당시의 여당이 부결시켰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저는 불법적이거나 문제가 될 정치자금을 받아쓴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김대통령은 정치자금을 받았는지 여부보다는 자신이 받아 쓴 정치자금 중에는 불법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김회장은 한때 경제부총리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행정경험이나 실물경제를 다뤄본 인물을 찾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김회장이 거론된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1998년 1월13일 5대그룹 회장과 만날 때도 김우중 회장의 행보는 눈에 띄었다. 당시 김회장은 유럽 출장중이었는데 구태여 귀국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다른 재벌총수들의 시각으로 보면 특별대우를 해준 것이다.
결국 김회장은 1월24일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 사무실에서 김대중 당선자를 독자적으로 면담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김회장은 서류봉투를 가지고 갔는데, 면담을 마치고 나올 때는 그 봉투를 들고 나오지 않아 궁금증을 더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당선자는 김회장이 대기업의 개혁에 앞장서줄 것을 당부했고 김회장은 대기업의 개혁방향과 대우의 구조조정 방안을 김대중 당선자에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면담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우중 회장이 재계 구조개혁의 파트너십을 확인한 자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한 김대중 정부와 김회장의 밀월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재벌해체에 준하는 획기적인 자기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정부’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김회장의 입장이 곳곳에서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원길 당시 국민회의 정책위 의장이 대기업의 첫 조치를 보고 “이 정도로는 안된다”며 빅딜4원칙을 내세우고 “새 정부 출범전에 재벌간의 빅딜이 가시화돼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회장은 “도대체 대기업이 잘못한 게 뭐냐”며 불만을 떠뜨리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는 김회장이 “현 실정에 맞지 않는 빅딜을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강력하게 반발, 당시 유종근 경제고문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배순훈 대우그룹 프랑스본사 사장이 국민의 정부 첫 내각에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하자 재계는 다시 한번 김회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밀월관계’에 대해 촉각을 곧두세웠다. 국민의 정부가 구조조정의 채찍을 높이 들었는데도 대우그룹이 느긋한 모습을 보이자 뭔가 교감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던진 것이다. 특히 김회장이 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에 이어 차기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되자 이런 의혹은 더욱 깊어졌다.
김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기 전부터 활발한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경상수지 흑자 500억달러 달성의 기치를 내걸고 정부관계자들과 오찬 간담회를 가지기도 했다. 당시 정부관계자의 말이다.
“김회장은 외환위기 극복이 당면과제인 김대중 대통령의 구미에 꼭 맞는 목표를 내세웠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기껏해야 20억달러를 목표치로 삼았는데 김대통령은 김회장의 적극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도 미국 최대 자동차업체인 GM이 추진한 대우와의 합작에 대해서 적극적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방미기간중에 잭 스미스 당시 GM 회장을 기업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개별적으로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김회장은 수출확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김대통령에게 수출금융의 추가지원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당시 다른 재벌 총수들은 정권교체를 한 김대중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에 숨죽이고 있던 상황에서 김회장은 거침없는 횡보를 보였다.
김회장은 4~5대 그룹이 출자하는 국제합작 은행을 설립해 리딩뱅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이 발언은 김원길 당시 정책위의장의 “대기업도 은행 진출을 허용한다”는 발언에 이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부와 사전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관측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계 구조조정과 빅딜 과정에서 경제관료들과 김회장은 계속 신경전을 벌였다.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기 원하는 정부의 입장에서는 재계의 자기 개혁 노력이 미흡해 보였고, 기존의 위치를 잃지 않으려는 재계의 입장에서는 정부의 요구가 가혹하게 비쳐졌다.
이런 와중인 1998년 6월10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그동안 국가의 부를 장악해온 재벌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퇴출시키려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맞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저항을 김우중 회장이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회장은 ‘국제경쟁력을 감안할 때 대기업은 국가를 위해 필요하며 일자리를 감소시키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6월17일 김대중 대통령과 경제6단체장의 오찬 모임에서 김대통령은 재벌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놓았다.
“대기업이 우리 경제발전에 기여했지만 IMF사태를 불러온 것도 대기업이다. 일부 국민이나 노동자들은 재벌해체, 심지어 처벌까지도 요구한다. 나는 기업주가 노동자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물론 노동자가 불법행위를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5대재벌이 경제를 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외적인 여건이 그런 대로 나아졌으니 이럴 때일수록 전경련이 앞장서달라. IMF체제가 반년이 흘렀다. 국민들이 볼 때 손에 쥘 만한 가시적인 결의 같은 것을 전경련이 보여줘야 한다. 과거 독재정권 때는 전경련이 잘들 지지하고 나서지 않았는가.”
김회장도 가만히 있지 않고 응수했다.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대기업은 기업구조가 복잡해 결과가 가시화되려면 좀 시간이 걸린다. 잘 안되면 내가 책임지겠다.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 가시적인 것이 나올 것이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정치자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법에 있는 정치자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줘도 좋으나 법에 없는 정치자금은 제발 주지 말라. 경제계의 협조 없이는 정치가 깨끗해지지 않는다. 과거처럼 기업과 정치인간에 정치자금과 관련된 이상한 소리가 나와서는 안된다. 대기업이 경제를 이끌어 왔으니 김우중 회장이 앞으로 잘해주기 바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견의 차이는 있었지만 김대통령과 김회장의 관계는 이상이 없었다. 김회장과 전경련회장단은 1998년 7월4일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9개항의 합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김대통령이 사회를 김회장에게 맡기는 등 재계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김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재계간 경제간담회를 상설화할 것을 즉석에서 제안했다. 경제간담회는 이규성 재경부 장관과 김우중 회장이 공동대표를 하고 강봉균 경제수석 및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 간사를 맡기로 했다.
강봉균 수석이 9개항의 합의문을 낭독한 후 김대통령은 “김회장이 500억달러 무역흑자를 장담했을 때 처음에는 못 믿었으나 이제 지나친 발언이 아님을 믿게 됐다”고 김회장을 추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김회장은 자신의 소신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계속해나갔다.
김우중 회장은 정리해고 자제 입장을 견지했다. 김회장은 1998년 7월24일 오전 국민회의 의원들의 모임인 열린정치포럼 조찬 간담회에서 “모든 기업에서 실업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대기업마저 고용조정을 하면 큰일이 난다. 대기업은 여유가 있는 만큼 고용조정을 자제해야 하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과 대기업간에 합의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강봉균 한국개발원장은 이견을 달았다.
“그 당시는 사람을 줄이지 않고 구조조정하는 방법이 별로 없었어요. 김회장은 결국 구조조정을 안한 거예요. 여러 재벌중에 변화의 속도가 제일 느렸지요. 가시적인 효과가 없고…. 나는 강의할 때 그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했어요.”
그해 7월31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도 김회장은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조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토로했다.
이런 발언들이 김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자 김대통령의 심기도 편치 않았다. 김대통령은 그해 7월말께 김우중 회장과 독대했을 때 “정부와 재계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당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김회장이 전경련회장 대행으로서 재계를 잘 다독거려 정부의 경제개혁정책에 적극 협력해줄 것”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김대통령은 8월3일 “대기업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고 공개적으로 질책했다. 특히 핵심사업 위주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급기야 금감위는 5대 기업에도 채찍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김우중 회장은 김대통령과의 독대 이후 한국경제학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연설을 할 때 당초 준비된 원고보다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낮추기도 했다.
이후 김대통령은 세일즈외교를 외치며 김우중 회장과 함께 해외 순방에 나서기도 했다. 1998년 11월13일에는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18호각에서 김우중 전경련 회장을 비롯한 경제6단체장 등과 조찬을 함께 하며 세일즈외교전략을 협의했다. 그러나 김회장은 김대통령의 중국 방문 수행일정을 마치고 11월15일 상하이에서 귀국한 뒤 심한 두통증세를 느껴 서울대병원에 입원, 뇌수술을 받았다. 16일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김대통령은 뇌혈종 제거수술을 받은 김회장에게 화환을 보내고 쾌유를 기원했다. 그후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이 11월29일 청와대에서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5대 그룹 구조조정을 조속히 매듭지을 것을 촉구했고 김회장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대통령은 김회장과의 회동 다음날 박태준 자민련 총재를 만난 자리에서 “김회장이 올해 봄 400~500억달러의 무역흑자가 가능하다고 얘기했는데 역시 현장에 있는 분들이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1998년 12월7일 열린 청와대 정·재계간담회는 5대그룹의 구조조정을 마무리짓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열린 탓인지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박지원 당시 대변인은 “간담회가 끝난 뒤 만찬에서 김대통령은 너무 기분이 좋아 많은 말을 했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그리고 김회장은 12월16일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김대통령을 만나 자금을 풀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이후 대우는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우를 위해서는 긴급수혈이 필요한데 경제관료들은 선혈만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뒤에서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1999년 새해가 되자 김우중 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서 2기 활동에 나섰다. ‘전경련 비전 2003’을 제시하며 최소 1000억원 규모의 사회협력기금을 조성하는 계획을 통해 ‘신뢰받는 재계’ 이미지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사회협력기금 구상에는 김회장 개인의 의지와 포부가 강하게 반영됐다고 한다. 그는 재벌 비판세력과의 대화채널로 여의도 경제사회포럼을 신설하고 정치권에 대한 홍보창구로 전경련 정치포럼을 설치하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는 김회장과 대우의 신뢰가 급추락한 한해가 되고 말았다.
김대통령은 1999년 3월4일 청와대에서 김우중 회장 등 전경련 신임회장단 22명을 만난 자리에서 “대기업은 지난해 12월7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간담회에서 합의한 사업구조조정을 조속히 마무리하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9년 4월을 전후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우의 추가적인 구조조정 추진을 강조했다. 정부관계자도 “5대 그룹중 구조조정이 가장 필요한 곳은 대우이며 알짜기업을 팔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의 압력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김회장은 메가톤급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룹전체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면서 불가피하게 취한 조치다. 그러나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징후가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7월1일 열린 김대통령과 경제5단체장 면담에서 재계가 환율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줄 것을 건의하자 김대통령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활발하게 자기의견을 개진하던 김회장은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다. 6월30일 백지화된 삼성자동차 빅딜 무산에 따른 불편한 심기 때문이었다.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대우그룹 구조조정방안에 대해 “제대로 약속을 지키는지 주목하겠다”고 밝히고, “김우중 회장과 가족의 보유주식, 계열사 보유 부동산을 모두 내놨고 이행이 안되면 채권단이 처분할 수 있다는 위임을 한 점, 김회장이 정상화 후 그룹경영에서 손을 뗀다는 내용은 평가할 만하다”고 말함으로써 정부가 김회장에 대해 무엇을 원하는지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긴박한 상황을 느낀 김회장은 김대통령에게 편지를 쓰는 한편, 7월23일 박태준 당시 자민련 총재를 방문, 대우그룹의 부채처리 문제에 박총재가 발벗고 나서 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은 박총재가 김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하기 하루 전이었기 때문에 모종의 부탁을 하러 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낳았다. 김회장과 동행한 이태섭 자민련 의원에 따르면 김회장은 박총재에게 “현재 대우의 부채 처리문제는 자체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믿고 맡겨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월27일 박태준 자민련 총재는 대우사태와 관련해 김우중 회장에 대해 불신감을 나타내면서 김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 주례회동 이후 나온 발언이어서 대통령의 인식을 담은 것으로 보였다.
이미 대우의 구조조정 문제는 한 기업의 차원을 넘어섰다. 강봉균 재경부 장관은 제주도에서 “대우의 구조조정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것은 국가능력의 문제”라는 발언을 했다.
1999년 8월25일 김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재계간담회를 주재한 자리에서 김우중 회장을 점잖게 질책했다. 이미 결심이 선 자리였다.
“최근 구조조정에 따른 매각이나 계열 분리를 하는 과정에 많은 아픔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같은 결과는 대우측의 수차례에 걸친 구조조정 계획이 국내외 시장의 신뢰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김회장은 대우의 책임자로서 국민이 기대하는 구조조정을 잘해서 진정한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주기 바랍니다.”
이날 김회장은 낮은 톤으로 사과했다.
“국가적으로 어려운 때 회사문제로 대통령과 국가에 심려와 부담을 끼쳐 면목이 없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채권기관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경영권에 어떤 미련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잔치’는 끝난 뒤였다. 당시 강봉균 경제수석은 김회장이 김대통령과 독대를 하며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고 판단, 몇달전부터 사실상 워크아웃 준비에 들어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간담회가 끝난 다음날인 8월26일 채권은행에서 대우그룹의 워크아웃 대상 12개사의 명단이 저녁 6시에 채권단회의에서 확정됐다.
1999년 10월에 우즈베키스탄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이 김대통령 초청으로 국빈방문한 자리에서 김회장에 대한 배려를 요청해 눈길을 끌었다. 이 자리에서 김대통령은 “자동차 등 몇 개의 기업을 김회장이 전업해 운영해 나갈”것 이라고 말했다.
대우측의 한 관계자는 “당시 경제관료가 김회장이 나가 계시면 자동차 정도는 맡게 해주겠다고 해서 그런 줄 믿고 나갔다. 그런데 그후 진행상황은 김회장을 완전한 파렴치범으로 몰고 갔다”고 원망스럽게 말했다.
처음엔 경제수석, 후에는 재경부장관으로서 대우의 패망을 ‘관리’했던 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장의 말이다.
“김회장이 주장한 수출 지원은 정부도 같은 입장이었어요. 가능한 것은 했어요. 다만 과거와 같은 특혜적인 수출 금융을 할 수는 없었어요. 외환위기 이전에 대기업에 대한 무역 특혜금융은 이미 없어졌어요. 그런데 외환위기가 나니까 일부 그런 것을 부활해주면 좋겠다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건 들어줄 수 없었어요. 처음에 김회장이 대통령을 독대해 한 두 번 보고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뒤에는 실무자들을 배석시켰어요. 어차피 실무자들이 검토해야 하니까 바로 듣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죠.”
김대중 대통령과 김우중 회장의 콤비가 깨진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기본적으로 박정희주의자인 김회장과 김대통령의 생각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다른 재벌총수들과 달리 김회장이 김대통령만 쳐다보며 버틴 데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강봉균 원장의 말이다.
“상당히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하는데…. 김회장은 과거에 어려울 때 위기를 벗어났던 경험이 있어요. 정부의 도움으로…. 그래서 쉽게 될 것으로 착각을 한 겁니다. 어려운 고비를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면 된다고 안이하게 생각한거죠.”
김회장이 대우의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