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호

‘벼랑끝 전술’로 핵사찰·경제위기 돌파

서울의 시각

  • 박인철 < 북한전문가 >

    입력2004-11-10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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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체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북한이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인다. 또한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과의 관계도 악화일로에 처해있다. 2002년 북미관계의 최대 쟁점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이 될 것이다. 올해 회갑을 맞이하는 김정일은 경제위기와 핵사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승부수를 던질까.
    오는 2월16일이면 김정일은 만 60세가 된다. 우리 나이로 회갑이다. 그의 아버지 김일성은 회갑 나이에 김정일을 후계자로 하는 이른바 ‘대를 이은 혁명’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오는 4월15일이면 ‘김일성 탄생 90주년’이고 4월25일은 인민군 창설 70돌이 되는 날이다. 북한에서 이른바 ‘꺾이는 해’(정주년·5,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해)의 가장 큰 행사가 상반기에만 무려 3개나 겹친다. 회갑을 맞은 김정일. 그러나 그가 그동안 이룩해놓은 것은 별로 없다.

    아버지 김일성을 절대화한 유일사상 체계와 유일적 지도체제를 완성한 것은 1974년경이다.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를 완성하여 삼촌 김영주와의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잡았지만 이로 인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2300만 북한 인민들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라산 마루에 혁명의 붉은기를 꽂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은 치열한 남북 체제경쟁 끝에 물거품이 됐다.

    김일성 시절 그나마 이뤄놓았던 자립경제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고, ‘혁명의 대상’ 남한과 상급회담(장관급회담)을 하면서 촛불을 켜고 대화를 나눠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인민들은 굶어죽고 탈출하며, ‘공화국 북반부’는 10년 가까이 주변국으로부터 빌어먹는 땅이 됐다. 남한과 비교할 때 인구 4700만대 2200만, 경제규모는 25대 1로 급전직하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정일은 승마를 하다 떨어져 크게 다친 적이 있다. 물론 낙마가 김정일의 건강을 결정적으로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고, 사건 이후 김정일은 담당 의사들의 “건강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과음 등 건강을 해칠 만한 일은 삼가왔다.

    또 최근 몇년 동안 농지정리 등 건설현장 방문과 군부대 시찰을 정력적으로 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러시아 방문시 김정일이 뒤뚱거리면서 열차 계단에 다리를 올려놓는 장면이 TV에 비쳐진 것을 보면 김정일의 건강도 이제 나이를 속이지 못하는 단계에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



    건강문제는 누구에게나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거리이기 때문에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치료되지 않으면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늘 고민을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현재 김정일의 북한이 바로 이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고민은 달고 다니는데 근본치유는 하지 못하는 처지, 이것이 김정일과 북한이 처한 상황이다.

    그 고민거리를 알아보려면 2002년 한해동안 북한의 주요 정책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해동안의 ‘주요 정책’이란 곧 그해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1일 발표된 북한의 신년공동사설을 보자. 먼저 지난 한해 평가의 특징으로 “김정일의 대외활동이 국제관계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역사적 사변이었다”는 언급이 눈길을 끈다. 이는 김정일이 중국,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중-러의 북방 3각동맹 기반을 조성했으며, 유럽(EU)과의 관계도 개선했다는 성과를 지적한 것이다.

    상대를 약화시키려면 상대국의 외교관계부터 먼저 끊는 것이 병법의 기본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이 아프간전쟁을 수행하면서 잠재적으로 미국에 반대할 수 있는 국가들을 상대로 ‘테러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는 식으로 줄세우기를 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일은 남한의 햇볕정책과 김대중 대통령의 국제적인 명성에 기대어 외교관계를 복원하는 데 ‘속도전’을 벌임으로써 국제적으로 어려웠던 처지를 훌쩍 뛰어넘었다. 또 MD문제를 둘러싼 미·중·러의 갈등을 이용해 ‘항미(抗美)연대’로 볼 수 있는 북-중-러 북방 3각동맹을 형성하는 데 상당부분 성공했다. 즉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외부 방어막을 튼튼히 한 것이다. 1월6일에는 평양주재 러시아대사관을 직접 방문해 러시아에 대한 지속적인 애정을 표명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의 반테러 전쟁을 계기로 북방 3각동맹이 대외적으로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 접어들긴 했으나, MD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하면 3각동맹은 언제든 다시 가동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신년공동사설의 특징을 보면 첫째, 수령제일주의 등 4대 제일주의를 내세움으로써 내부결속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외관계, 특히 대미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군을 중심으로 내부역량을 한데 묶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경제발전, 특히 정보기술과 정보산업 발전을 언급하고 있고, 인민생활의 실질적인 향상을 강조했다. 북한은 대외관계에서 어려운 상황이 예상되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책임있는 해결을 하기보다는 침묵, 의도적 무시, 상대방에게 덮어씌우기, 버티기 등으로 일관하며 대체로 이 시기에는 내부를 다지는 쪽에 역량을 모아왔다.

    셋째, 대남관계에서 주적론 철회, 보안법 철폐 등 정치적 요구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올 한해 남북대화 과정에서 정치적 요구를 쟁점화 내지 조건화하겠다는 의도로 파악된다. 정치적 요구를 내세움으로써 챙길 수 있는 경제적 실익을 챙기는 한편, 예정된 남한의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남남갈등을 유발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넷째, 주한미군 철수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 “반테러의 명목 밑에 감행되고 있는 미제와 남조선 호전분자들의 반통일 책동으로 말미암아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가 격화되고 있으니, 남조선에서 침략군을 당장 철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톤을 보면 대미 감정이 상당히 격앙돼 있다.

    이상과 같은 북한의 2002년 주요정책의 기조 위에서 먼저 김정일의 ‘고민거리’를 압축해보자. 김정일의 고민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경제난, 둘째는 대미관계다.

    북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북한은 최근 2, 3년간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지원에 힘입어 극심한 식량난에서는 벗어났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마련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지원을 받더라도 매년 200만t 정도 식량이 모자란다.

    북한의 식량난은 제도에서 오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집단영농제를 전면적인 개인영농제로 바꾼다면 북한은 2, 3년 내에 식량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영농제로 바꾼다는 것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므로 김정일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그는 ‘우리 제도가 우월하다’고 강조했다. 식량 생필품 의약품 교육자재 등은 늘 모자란다. 먹고, 입고, 아프면 치료하고, 교육받는, 인간으로서의 최소단위 생활을 영위하기도 힘들다.

    그렇다고 당장의 경제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개성공단 조성이나 경의선 연결은 쉽게 진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이는 경제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군사문제와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문제는 중국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김정일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도 김정일이 원하는대로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주고 적당히 자신의 말을 듣도록 하는 것이 중국에게는 이익이다. 예컨대 중국은 남한이나 미국 등지에서 들어간 식량 규모를 파악, 그만큼 줄여서 북한에 지원하는 식이다.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난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미국 때문이라고 강변한다. 미국이 테러지원국이라는 ‘오명’을 벗겨주지 않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북한인민들은 이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테러지원국의 오명을 벗으려면 ‘먼저 실천하라’는 입장이다. 부시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같은 원칙은 더 강고해졌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북한은 미사일을 비롯한 군수산업을 포기할 수 없는 체제라는 점이다. 군수산업은 북한경제의 3분의 2를 점유한다. 양적 규모보다 질적인 면을 따진다면 인민(국가)경제가 북한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군경제, 당경제에 이어 20% 정도다. 이 20%를 가지고 전체 인민경제를 운영해야 한다. 정상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구조다. 군수산업의 민수 전환도 쉽지 않게 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계속 군수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사일은 그중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인 만큼 그만한 대가를 받지 않고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중동 등에 대한 미사일 판매로 연간 5억달러 이상의 수입을 얻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발표다.

    경제의 양적 규모가 작은 나라에서 턱도 없이 방대한 군수산업을 운영하다보니 경제프로그램은 곧 군사프로그램으로 전환된다. 예컨대 MD문제를 매개로 한다면 미국에 대해서 중국보다 북한이 더 거세게 비난하고 중국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는 식이다.

    북한은 대량 파괴무기를 개발하면 여러가지 이득이 있다. 우선 러시아와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할 때 머리숙일 필요가 없어진다. 이는 김일성 시절부터 해온 경제·국방 병진(竝進)노선과 ‘국방에서의 자위’ 정책의 연장이지만 지금은 경제프로그램의 일환이다. 미사일과 세계 3위의 생화학 무기는 당장 사용이 가능하기도 하다.

    예컨대 어떤 이유에서든 한반도에 긴장상황이 발생하면 북한은 대포 단거리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위협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 다케사다 히데시(일본 방위연구소 연구실장)가 최근 발간한 책 ‘두려운 전략가 김정일’에서 지적한 사실은 귀기울여 봄직하다.

    “서울이 휴전선에서 불과 50km 떨어져 있고, 서울인구가 1200만에 달한다는 사실은 북한 대량파괴무기의 ‘유효성’을 높여주고 있다. 대량파괴무기는 재래식 무기에 비해 예산도 절감된다.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이 대량파괴 무기를 개발할 이유도, 능력도 없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다. 이란 이라크 인도 파키스탄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국가들이 재래식 무기구입에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대량파괴무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주변국에게 공포감을 준다. 한국정부는 어떻든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중국과 일본도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세면 세질수록 입지는 더 유리해진다.

    1994년 ‘서울 불바다 발언’에 이은 북미 제네바협정,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에 이은 식량원조 등은 모두 군사프로그램을 이용한 주변국에 대한 ‘약탈경제’ 방식이다. 북한에서 살다온 어느 경제학자는 “북한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이란 한마디로 없다고 봐도 된다. 북한은 군사프로그램으로 경제프로그램을 메워가는 전략 외에 따로 갖고 있는 경제개발 전략이 없다”고 단정하듯 말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 언급된 ‘정보산업 IT산업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도 군사프로그램과 결부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해 김정일이 18년만에 상하이(上海)를 방문하면서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중국의 IT산업이다. 김정일은 6일간의 방문기간 중 4일을 상하이에 머물렀고 시찰단에 김영춘 총참모장 등 군간부가 동행했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첨단산업시설 참관은 주로 경제전문가와 IT 전문가를 대동해야 옳다. 당시 우리 정부관계자와 대다수의 언론은 이를 두고 “김정일이 개방하고 싶어도 보수군부 때문에 못하니까, 군부에게 중국 개방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과연 그럴까. 다시 다케사다 히데시의 분석을 참고해보자.

    “군간부에게 첨단화된 현장을 보게 한 것은 김위원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김위원장은 군사력의 근대화를 제창해왔고, 이를 중국을 이용해 달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위원장은 당초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려 했던 것같다. 즉,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근대산업의 노하우가 북한으로 들어오리라고 판단했던 것같다.

    미국 클린턴 정부와 북한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000년 말 이후 북한은 서방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군의 첨단화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조기에 실현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대북경제제재 완화가 지연되고 더불어 서방 첨단기술을 도입하기 어렵게 됐음을 의미한다. 대신 주목한 것이 중국 첨단시설이며,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부쩍 높이기 시작했다. 김위원장은 중국군의 기술혁신에 주목하게 된 것이다.”

    올 신년사설에서도 드러났듯, 수령 사상 군사 제도의 4대 제일주의는 김정일이 중국식 개방을 원치 않음을 다시 확인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경제문제를 군사문제와 따로 떼내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군사문제와 경제문제 중 어느 한쪽을 먼저 풀면서 총체적인 문제를 풀어가자면 당연히 군사문제부터 먼저 풀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의 군사문제는 대미관계, 대남관계와 연동돼 있을 뿐 아니라 김정일의 북한으로서는 ‘삶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군사문제를 푼다는 것은 김정일로서는 무장해제와 다름없다. 자신의 권력이 ‘군력’으로부터 나오는 만큼 군사문제를 푸는 순간부터 자신의 추락은 시작될 것이다. 따라서 올 한해 김정일의 최대 고민거리는 결국 대미관계다.

    북한은 공동사설에서 대미관계를 대남관계와 연동시켜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하고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말살하려는 온갖 시도들을 단호히 배격하여야 한다. 6·15공동선언을 옹호 고수하는 사람은 애국자이고, 그것을 부정하고 거세하는 사람은 민족반역자다. 공동선언을 말살하려는 안팎의 분열주의 세력의 책동을 단호히 짓부시고 북남관계가 화해와 단합, 통일에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반테러의 명목밑에 감행되고 있는 미제와 남조선 호전분자들의 반공화국, 반통일 책동으로 말미암아 지금 조선반도에서는 새 전쟁의 위험이 날로 커가고 있다. 북과 남, 해외의 전체 조선민족은 호전세력들의 침략과 전쟁도발 책동을 저지 파탄시키고 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과감히 떨쳐 나서야 할 것이다. 제국주의 호전계층들은 우리 민족의 통일의지를 똑바로 보고 남조선에서 침략군을 당장 철수시켜야 한다.”

    지난해 공동사설에서 일반적인 ‘제국주의’ 문제를 언급했다면 이번 공동사설에서는 ‘조선반도에서의 긴장상태 격화’로 정세를 규정하고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다가올 미국과의 긴장상황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물론 대결분위기 조성은 언제나 타협을 위한 ‘준비운동’의 성격도 내포한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순확률적으로는 대결 가능성과 타협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과 북한이 대결 혹은 타협으로 가는 노정에는 남한과 중국의 역할이 있고, 이 4개국의 이해관계는 각각 다르다. 북한은 6·15공동선언을 무기로 남한이 미국과의 관계를 끊고 ‘자주적으로’ 북한편에 서서 북한의 이익에 복무하라고 요구한다. 남한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이를 위해 미국이 북한을 도와주기를 기대한다.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면서 남한이 미-일-한의 해양문화권에서 중국과의 연대가 강화된 친중 대륙문화권으로 서서히 이행해주기를 바란다.

    미국은 반테러 전쟁을 수행중이다. 테러지원국 리스트엔 북한도 올라 있다. 미국은 지난해부터 북한에 3가지의 원칙적인 안(핵, 미사일, 재래식 무기문제)을 던져놓고 대화에 나서든지 손해를 감수하든지 택하라는 입장이다. 9·11 테러 이후에는 북한의 생화학무기도 경계의 대상에 올랐다.

    이러한 구조에서 2002년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무대의 주인공은 미국과 북한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북한의 긴장이 고조되든, 남한과 중국의 도움으로 타협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형국이 되든 결국 게임은 미국과 북한이 벌이게 되는 것이다. 즉, 원칙적 입장이 강한 국가들이 원칙적 입장이 덜 강한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게임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현재 북미관계의 현안은 대량살상무기(핵 미사일 생화학무기)와 재래식 무기다. 그런데 이 현안을 놓고 북미간에 시각차가 있다. 클린턴 정부시절 막바지에 조명록 특사가 방미해 합의한 북미공동코뮤니케를 북미대화의 출발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원칙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큰 틀에서 핵, 미사일 문제는 논의가 끝났다는 주장이다.

    특히 미사일 문제는 2003년까지 발사유예, ‘인공지구위성’ 발사에 대한 제3국 지원을 대가로 한 개발계획 포기 용의 등으로 충분히 양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부시 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 수행과정에서 검증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원점에서 대화가 진행되기를 원한다. ‘전제 조건 없이 언제 어디서든 대화하자’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며, 핵 미사일 재래식무기 등 몇가지 의제를 제시해놓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지난 한해 동안 경수로 사업의 진전을 지지해왔고, 25만t의 식량을 제공했으며 최근 10만5000t의 지원을 추가로 약속했다. 2002 회계연도 예산에는 중유 제공을 위해 9000만달러를 책정해놓고 있다. 대화에 전제조건을 달려는 북한에게 구실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북미간의 몇 가지 쟁점중 올해 최대현안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사찰 문제다. 1994년 제네바 합의는 그 이전에 북한이 폐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를 밝혀낼 특별사찰을 경수로 핵심부품(원자로)이 인도되기 전(2004년)에 완료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특별사찰 기간이 2~4년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 IAEA의 입장이고, 그러자면 올 하반기에는 핵사찰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태도로 보아 순순히 핵사찰을 수용할 것같지 않다는 점이다.

    9·11 테러 이후 최근 몇 달 사이 북한의 태도를 보면 북한은 과도하게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동안 미국정부는 북한에 대해 명확하게 반테러 전쟁의 대상으로 지목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북한은 마치 자신이 그 대상에 완전히 찍힌 것처럼 행동한 사례들이 더러 발견된다.

    미국의 정부관리가 생물무기 개발국으로 대략 6개국 정도가 거론된다고 하자, 북한은 스스로 테러전쟁의 대상이 된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하면, 부시 대통령이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북한에 대한 사찰을 언급하자 북한은 미국이 협박하고 있다고 했다.

    또 9·11 테러 여파로 아프간으로 투입되는 일부 주한미군 군사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남한에 전투기를 보낸 것을 두고 미국이 다음 차례로 북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남한의 비상경계령을 빌미로 확정돼 있던 장관급 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한 것과 비슷한, 일종의 ‘오버 액션’이라고밖에 달리 해석될 것이 없다.

    물론 북한은 미국의 반테러 전쟁이 매우 부담스러울 것이다. 미국은 당초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조기에 탈레반정권을 붕괴시키는 성과를 올렸고, 탄저균 테러가 발생하면서 생화학무기가 국제적 쟁점으로 떠올랐다.

    또한 미사일 핵무기 등이 테러의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 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등은 북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항이고, 북미간의 현안들이 자연스럽게 반테러 전쟁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반테러 전쟁의 대상으로 공식 지목한 것도 아닌데 이같은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북한정권의 체질과 관련하여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재가 아닌가 싶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을 때의 일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내용상으로 보면 남한의 판정승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상대국을 와해시키려는 군사적, 비군사적 행동을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되던 그날 김일성은 헬기까지 보내주며 남북회담에 참여한 북쪽 성원들을 태우고 돌아와 축하연을 열어줬다.

    한 탈북자의 말을 빌리면 김일성은 그날 매우 기뻐하며 “동무들이 공화국을 구했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구소련과 동구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북한에서의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것이다.

    사실 북한은 지리적으로 동구의 도미노 현상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고, 북한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인접국인 중국은 끄떡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미국에 의해 소련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북한에 대한 미국의 공세를 내심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왔다. 김정일은 1994년 북한 핵위기 당시 재미를 본 후 이를 전매특허처럼 사용해왔다. 이 전술은 ‘인질’을 사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반도에서 북한의 ‘인질역(役)’은 남한 국민과 주한미군이다. 북한은 군사위협으로 ‘인질’을 잡고 미국과 협상을 벌이는 것이다. 북한은 이같은 벼랑끝 전술에 익숙하다. 김정일은 “외교는 반드시 고자세 외교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미국이 수행하고 있는 반테러 전쟁에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벼랑끝 전술’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 판단이 전제돼 있는 것같다.

    먼저 한국정부가 대북 포용정책을 계속하고 있는 한 미국의 대북압박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으로서는 별로 잃을 게 없다는 계산이다. 현재 북한은 국제적으로 경제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가 몇 안된다. 따라서 김정일로서는 ‘미국이 기껏해봐야 또 경제제재밖에 더 하겠냐’는 계산을 할 수 있다.

    셋째는 김정일이 구축해놓은 북-중-러 북방 3각동맹이다. 반테러 전쟁으로 지금은 관심에서 멀어져 있지만 미국이 MD를 추진하면 다시 ‘항미연대’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다. 북한은 여기에 앞장서서 ‘활약’을 해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담당해야 할 일을 북한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주는 것이다. 북한은 그 대가로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지원을 받아내고 김정일은 체제안정을 더 보장받는다.

    그러나 이번 부시 행정부에게도 그것이 통할지는 알 수 없다. 콘돌리자 라이스 등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브레인들은 김정일의 전략에 대해 비교적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편이다. 올 한해 동안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원칙적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클린턴 정부처럼 북한의 페이스대로 끌려가지는 않겠다는 원칙을 버리지 않을 것으로 추측된다.

    게다가 북미간에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 북한의 화학무기금지협약(CWC) 가입문제다. 미국내 탄저균 테러로 인해 관심의 표적이 된 이 사안은 북한이 화학무기 개발·생산·비축 시설을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이를 폐기하며 국제사찰을 받게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한 핵사찰과 생화학무기 문제를 연동시켜 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핵사찰 문제 하나를 놓고 이를 단건으로 처리하자면 미국의 선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현재 미국은 북한이 핵사찰을 거부하면 경수로 건설을 중단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지만, 경수로 건설 중단은 북한에 실질적인 압박의 효과가 거의 없다. 이에 따른 경제제재 조치도 별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군사적 압박조치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한국정부의 반대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핵사찰 하나만 놓고 본다면, 현재 분위기상 북한은 쉽게 핵사찰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처음에는 일단 버티기 전술로 나가면서 긴장을 고조시켜 다른 양보나 대가를 받아내려 할 것이다. 북한의 버티기가 계속될 경우 미국 역시 군사적 제재수단을 찾기보다는 당분간 교착상태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생화학무기 문제는 경우가 좀 다르다. 지금까지 미국이 북한에 대해 생화학무기와 관련해 언급한 것은 핵이나 생화학무기를 중동의 테러국가와 연계시키는 것에 대한 경고 차원이었다. 그러나 반테러 전쟁이 이라크를 거쳐 소말리아 등지로 확산되고 이 과정에서 만약 탄저균 테러와 관련해 북한이 중동의 테러시스템과 연계됐다는 증거가 나타난다면 핵사찰 문제와는 성격 자체가 달라진다.

    만약 이같은 상황이 도래한다면 군사적 긴장고조가 불가피해진다. 핵과 미사일, 생화학무기 전체가 연동되어 문제는 한층 심각해질 수 있다. 이미 반테러 전쟁과 관련해 중국과 러시아는 반테러의 편에 섰다. 따라서 명분상으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지원하기 곤란하다. 가능성이 매우 낮긴 하지만 이같은 시나리오가 가장 우려된다.

    김정일은 그동안 남한정부의 등을 떠밀며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미국의 반테러 전쟁과 향후 MD 추진계획 등에 비추어 볼 때 당분간 미국과의 관계개선이라는 목표는 접어두고 중국, 러시아와의 연대를 가속화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핵사찰 등을 둘러싼 과정에서 대미관계는 대결 분위기 조성-버티기-쟁점화-반대급부 조건화-교착화의 단계를 거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북한이 남북대화를 교착상태에 빠뜨린 것은 결국 부시 행정부와 남한정부의 공조관계 때문이다. 김정일은 남한정부가 부시 행정부의 힘에 밀려 ‘민족중시’에서 ‘동맹중시’로 돌아섰다고 판단한 것같다.

    올해 북한은 ‘자주적 통일’과 ‘민족공조 실현’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북한은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공조 균열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의도적으로 남북대화를 중단시켜 남북대화에서 성과를 내려는 남한정부가 미국에 문제제기를 하도록 만들거나, 미국 때문에 남북대화가 안된다는 쪽으로 대중의 여론을 몰고가는 전술이다. 이는 중국도 환영하는 구도다. 특히 MD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적어도 남한이 중립적 입장에 서기를 바라고 있다.

    올해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과 북한의 줄다리기 강도가 심해질수록 한국의 입장은 주변부로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북한은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연계시키는 전략을 쓸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북미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되면 북한은 남한의 등을 떼밀어 북한에 유리하도록 북미관계에서 적극적인 중재자 노릇을 요구할 수 있다. 남한을 방탄벽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북한이 남한에게 북미관계의 중재자 노릇을 하도록 만드는 것 자체가 한미 공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남북대화 채널을 계속 열어둘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민족우선이냐 동맹우선이냐는 식의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은 미리 피해야 한다.

    특히 북한은 올해 대남관계에서 정치문제를 주제로 설정한 것 같다. 주적론 철회, 보안법 철폐를 들고 나왔고, 이 주제들을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남북대화 등에 전제로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내 탈북자 문제, 북한이 종교를 탄압하고 있다는 미국내의 여론 등을 의식해 남한의 보안법 철폐문제를 이슈화할 수 있다. 이는 남한의 대통령선거와도 맞물린다. 더 두고 봐야겠지만, 올해 남한의 대선구도가 보수 대 진보의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서울답방 문제는 어렵다고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렇다고 김정일이 서울답방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닌 듯하다. 내심 오고 싶을 것이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과의 약속이 부담이 될 것이다. 김정일의 서울답방 여부는 답방이 김정일에게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될 것이다.

    김정일에게 서울답방이 이익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첫째는 북한이 주장하는대로 남한정부가 “6·15정신에 입각하여 민족공조의 입장에 확실히 선다”는 뜻을 김정일에게 전달해야 한다. 둘째는 답방 전 북미관계가 내부적으로 많은 진전이 있어야 한다. 셋째는 김정일에게 줄 선물보따리가 근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조건 모두 충족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이다. 첫째와 둘째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려면 김정일이 서울에 와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민족’과 세계를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문건이 필요하다. 그 문건은 남북평화선언 등의 형식이 될 가능성이 높고, 그 내용은 결과적으로 미국에 대북정책의 대전환을 촉구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미관계는 핵 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무기에 이르기까지 현안이 내부적으로 타결될 가능성이 올해로서는 거의 없다고 봐야할 것이다. 물론 극적으로 성사될 가능성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1994년에도 위기를 치닫던 와중에 미국의 중재로 극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됐다가 김일성의 사망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올해는 대선의 해다. 우선 여야의 확정된 대선후보들이 반대할 가능성이 있고, 김정일도 남한의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지, 혹은 누가 안되면 좋겠는지에 더 관심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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