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중순, 일본 도쿄에서는 충격적인 정보가 나돌았다. 조총련 책임부의장 허종만(71)이 주일미국대사관으로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망명설이 떠돌게 된 것은 그가 일본 경시청 공안부 외사 2과의 ‘行確(행동 확인)’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 경찰이 24시간 그의 뒤를 밟다가 12월14일 주일미국대사관이 있는 도라노몬역 근처에서 놓쳐버린 것이다.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가지 않았느냐는 소문이 나온 것이다.
사실 이 망명설이 나올 만한 근거도 있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허종만은 벌써 여러차례 김정일의 소환명령에 불응하여 괘씸죄로 찍힌 사실이 있었다. 2001년 11월 하순에도 그는 니가타 항에 정박해 있던 ‘만경봉 92호’에 불려갔다가 하루만에 배에서 내렸는데, 강제 소환을 간신히 면했다는 것이다.
또 소환 문제를 둘러싸고 가족회의가 열렸는데 가족 모두가 “갈 테면 혼자 가라”고 북한행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 소환된 조총련 부의장 김병식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소환 그 자체는 재산 몰수와 동시에 일종의 숙청이었다.
허종만은 북한의 소환령 이외에 일본 당국으로부터도 압박을 받고 있었다. 조긴도쿄(朝銀東京)신용조합 자금유용 의혹사건 수사의 최종 표적이 허종만이라는 소문이 일본 경시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한으로 갈 수도 없고, 일본에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서 그가 미국 망명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던 중 12월22일 동중국해상에서 북한공작선으로 추정되는 괴선박이 일본 해상보안청 함정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허종만 행방불명과 괴선박 침몰, 이 두 사건을 둘러싸고 온갖 억측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때 서울에서 조긴도쿄 사건, 허종만 실종사건, 괴선박 침몰사건 등을 한줄기로 엮을 수 있는 의미있는 분석이 나왔다.
전 조선노동당 연락부 일급공작원 출신 김아무개씨는 북한이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허종만을 제거하기 위해 급박하게 특공조를 보냈는데, 이 배가 침몰한 괴선박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수사당국이 밝힌 괴선박 루트를 따라 한국으로 7번이나 침투한 경력이 있는 그는 괴선박의 항로와 시간대별 침투 일정, 임무 등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소상히 풀이했다.
김아무개씨의 분석은 이러하다. ▲괴선박이 일본 순시선과 맞닥뜨린 지점이 북한 공작선의 통상 항로와 일치한다.(1976년 거문도 공작 당시에도 공작선은 남포 기지에서 출항, 중국 양쯔강 하구 중간기지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 근해 공해상에서 자선(子船)을 분리한 뒤 공작지점까지 자선으로 침투하는 전술을 구사한 바 있음)
▲북한은 2001년 7월 일본으로부터 중고어선 48척을 밀수입한 사실이 있다. 그 이유는 공작선을 일본 어선으로 위장하기 위한 것이다. ▲김씨는 이를 근거로 북한 공작선의 움직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2월15일:허종만씨 행방불명 뒤 해주기지 출항→16일:대동강변 보산기지→18일:양쯔강 하구 중간기지→일본 규슈 공해상→19일:특공대 침투→20일:엔진고장으로 표류→22일:교전 중 침몰.
북한 공작선은 공작원의 이송이나 철수 임무가 가장 많다. 이 경우는 공작모선(약 100t급)으로 일본의 영해 부근까지 접근하고, 모선에 실려 있는 공작 자선을 분리하여 영해 안으로 들어간다. 귀순 공작원 김아무개씨는 “일본 해안은 한국 해안에 견주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 일단 모선에서 자선을 분리해서 해안 가까이 침투했다가 해안을 몇백m 남겨 놓고서는 잠수해서 상륙한다”고 말했다.
괴선박의 임무가 테러요원 침투라고 주장한 이 전직 북한공작원의 증언처럼 침투 공작원들에게는 일본 해안은 침투하기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는 곳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안선이 한국보다 훨씬 길 뿐만 아니라, 1999년 3월 이전에는 발각되더라도 일본측이 발포한 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으로 침투하는 북한 공작원들은 아예 무기를 휴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는 국가보안법도 없고, 스파이방지법도 없기 때문에 무기만 없으면 걸려보았자 출입국관리법 위반 정도로 구류를 며칠 살다가 본국으로 송환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날씨가 나빠서 긴급피난했다고 하면 금방 풀려난다는 것이다.
허종만 망명설과 그의 테러설이 사실이라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사건을 능가하는 메가톤급 뉴스였다. 허종만의 직위는 황비서보다 낮지만, 그는 김정일의 돈줄이기 때문이다.
허종만은 조총련의 대북 송금 열쇠를 쥐고 있는 조총련의 최고간부였다. 그는 김정일의 측근중의 측근으로 2001년 2월에 사망한 한덕수 조총련의장 시절부터 조총련의 재정담당 최고책임자였다. 조총련을 꾸려가는 실질적 기구인 중앙상임위원회는 의장과 책임부의장, 부의장 및 국장단 1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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