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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시대의 현장 ② 전라남도 여수시

‘3麗통합’으로 거듭난 다기능 도시

  • 양영훈 < 여행작가 > travelmaker@hanmir.com

‘3麗통합’으로 거듭난 다기능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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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여수항과 일본 나가사키항 간에는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실은 연락선이 수시로 왕래했고, 여수 일대의 바다에서 잡힌 갖가지 해산물은 여수항에 집결됐다가 다시 전라선 열차에 실려 광주나 서울 등지로 팔려나갔다. 이즈음부터 여수항은 사람과 돈과 물자가 흔한 곳이 되어, 한동안 남도지방에서는 “여수 가서 돈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자랑 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여수항이 있는 여수면은 1931년에 여수읍으로, 그리고 해방 후인 1949년에 여수시로 승격됐다. 그에 따라 여수는 여수항 일대의 여수시와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여천군으로 나누어졌다. 또한 1970년대에는 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선 여천군의 삼일면과 쌍봉면이 여천출장소를 거쳐 여천시로 승격됐다. 여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세 개의 기초자치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 고장 사람들은 오랫동안 같은 여수사람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살아왔기에 여수와 여천이 서로 다른 고장이라는 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상적인 불편함과 경제적 손실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여천군의 돌산도에 사는 사람이 시내버스를 타고 지척의 여수항에만 가려 해도 시내요금의 몇 곱절이나 되는 시외요금을 내야 했다. 서로 다른 두 시·군을 잇는 도로를 확·포장하거나 개설하려면 두 자치단체 사이에 업무협조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계획 자체가 무산되거나 어설프게 마무리되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주민들 사이에서는 여수시와 여천시·군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이른바 ‘3려통합’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되자 통합에 대한 주민들의 논의와 열망은 더욱 뜨거워졌고, 1995년에는 처음으로 주민의견조사가 실시됐다. 비록 당시 재정자립도가 가장 높았던 여천시의 반대로 통합은 무산됐지만, 그 뒤로도 인근 순천시와 광양시가 1995년의 도농(都農)통합 이후 지방자치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에 고무된 주민들은 3려통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마침내 이들 지역의 자치단체장들과 의회가 주민들의 의견을 수용함으로써 1997년 9월9일 행정구역 통합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됐다. 투표 결과 88.4%라는 압도적 우세의 찬성표가 나왔는데, 특히 여수시는 95.6%로 가장 높은 찬성률을 보였다. 3려통합에 미온적이던 여천시와 여천군도 각각 83.5%와 70.2%의 높은 찬성률을 기록했다.



이로써 지방자치제도의 취지와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게 된 3려지역 주민들은 농촌과 도시, 어항과 공단, 도서(島嶼)와 내륙이 공존하는 도시, 그리고 인구 33만 명의 전라남도 최대 도시인 통합 여수시를 출범시켰다. 아울러 국내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행정구역 통합’이라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걸음마 단계인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도의 정착과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여수시가 3려통합으로 얻은 가시적 성과는 적지 않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행정기구와 인력감축으로 행정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여수시는 통합 이후 두 차례의 구조조정을 통해 전체 공무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549명을 감원했다. 또한 시장 관사를 포함한 57동의 불용(不用) 관사를 매각하거나 반납했으며, 통합 전의 3개 청사는 2개만 사용하고 하나는 매각을 위해 중앙정부에 용도변경을 요청한 상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재무구조가 크게 개선되어 1999년에 예산액 대비 14.6%(584억원)였던 부채비율이 지난해에는 9.8%(332억원)로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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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훈 < 여행작가 > travelmaker@hanmi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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