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들은 사람들의 언어습득 능력은 S자 곡선을 그리며 발전한다고 말한다. 즉 언어실력이 학습량에 따라 점진적으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답보상태에 있다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국어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한동안 변화가 없던 회화실력이 어느날 갑자기 외국인과의 대화에서 유창해지는 것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것은 학습 초기엔 변화가 미미해 감지하지 못하다가 공부할수록 아는 것이 많아지면서 응용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이다. 변화 없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을 ‘플레토(高原)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데, 인내가 없는 사람은 이 단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공부를 그만두기도 한다. 하지만 플레토를 거치고 나면 자신도 놀랄 만큼 실력이 향상되므로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언어학자는 충고한다.
정치변동도 S자 곡선을 그린다고 생각한다.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해가 1987년이다.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함으로써 독재시대를 종식하고 본격적인 민주주의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경제·사회적 환경에도 우리의 정치는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정치는 늘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하면서 새로운 후보에 대한 지지가 폭발했을 뿐만 아니라 젊은층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 급증했다.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정치변동에 어리둥절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동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평소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정치변동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를 촉발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에 변화를 위한 조건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느날 외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갑자기 향상된 자신의 외국어실력을 발견하는 것처럼, 실제로 정치변동은 변화를 촉발하는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방에 가스가 차 있다고 해서 폭발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여기에 불을 붙여야 폭발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정치변동은 국민과 정치인의 합작품이다. 과거 왕조국가 시대에도 민심을 거스르는 왕이 성군이 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여론이 정치변동의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유권자가 정치변동을 위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항상 정치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불을 댕기는 정치인이 출현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경쟁하는 여러 정치인 중에서 불을 붙이는데 성공하는 정치인은 국민의 가장 가려운 부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이때 국민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 무엇이냐 하는 논란은 선거의 쟁점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볼 때 정치변동이 학습곡선과 같이 S자를 그리는 것은 확실하다. 유권자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아무리 정치인이 불을 댕기려해도 불이 붙지 않는다. 반면 유권자들이 정치변동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어도 정치인이 엉뚱한 곳을 긁으면 불발탄에 그치고 만다. 이른바 ‘임계집단(critical mass)’이 형성되기 전에는 변화의 욕구가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지만, 일단 임계집단이 만들어지고 정치인이 이를 촉발시키면 ‘전염효과(contageous effect)’가 생겨 유권자의 변화욕구가 급속도로 확산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정치변동은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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