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률 7%’는 이명박 정부뿐만 아니라 노무현 정부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중에 “지킬 수 없는 공약인 줄 알면서도 상대 후보가 6%를 제시하기에 홧김에 7%를 제시했다”고 사과 겸 해명을 했다. 귀에 거슬리는 말투였지만 대통령답지 않은 말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그였기에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걸 질책하거나 공적인 자리에서 노무현 정부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잣대로 거론하지도 않았다. 국민은 경제성장률 공약을 하나의 비전 으로 받아들이지 반드시 실현해야 할 대국민 약속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산조각 난 ‘7% 성장 꿈’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5개월이 지났다. 임기 초반의 ‘의욕’이 너무 앞선 탓일까. 지난 5개월 동안 이명박 정부는 실현불가능한 ‘747공약’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보니 경제상황과는 맞지 않는 ‘거꾸로 정책’으로 경제를 더 불안하게 하고 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세계경제 침체는 유가폭등과 맞물려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침체하는 가운데 물가가 폭등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지난해부터 ‘성장’에서 ‘안정’으로 전환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등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에서 네 번째)이 4월28일 청와대에서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분기 들어선 민간 연구소뿐만 아니라 한국은행과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도 올 성장률 예상치를 4%선으로 하향 조정했다. 그럼에도 5월 말 한 조찬 모임에서 당시 최중경 기획재정부 차관은 “7% 성장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747’은 실현할 수 있는 꿈”이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성장 위주 정책을 밀고 나가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올 4월 말 이명박 대통령은 ‘물가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성장보다는 안정에 방점을 찍은 발언이었다. 그럼에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금리로는 어차피 물가를 잡기 어려우니 성장을 위해서라도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의 정책 금리 차이가 2.75%포인트까지 벌어졌는데 뭐든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미국과 금리 차이가 너무 크면 금리가 높은 한국으로 외국자본이 몰려와 환율이 하락(원화가치 상승)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동력인 수출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냉·온탕’ 오가는 환율정책
환율 상승은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물가 급등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원론에도 나오는 얘기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 5월까지만 해도 물가 급등은 유가가 오르는 데 따른 일시적인 현상이며 어느 정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환율 상승을 부추기는 발언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인플레이션 우려를 제기하면 “중장기 물가를 봐야 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물론 수출을 주도하는 일부 대기업은 환율이 급등하면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면에서는 중소 납품업체들이 납품단가를 올리지 못한 채 수입물가 상승분을 고스란히 떠안고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정책 당국이 알아야 한다. 고환율에 의존한 수출주도형 성장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인 선진국 달성은 요원하다는 얘기다.
정부의 ‘성장 우선’ 정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6월 초가 되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만수 장관도 유가가 150달러에 육박하고 물가가 급등하자 비로소 “물가가 많이 올랐기 때문에 새로운 경제 환경을 감안해서 금리와 환율이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통상 금융정책은 정책 효과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이후에나 나타난다. 시차를 고려한 선제 대응이 중요한 이유다. 경제 전문가들은 물론 일반 국민까지 원자재 가격 급등을 우려하며 물가안정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문하는 마당에 현 정부는 선제적 대응은 고사하고 뒷북이나 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 우리 경제가 이 정도나마 굴러가고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뒤늦게나마 정부의 경제정책이 ‘안정’으로 옮아간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무게중심이 ‘냉·온탕’을 오가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고환율 정책이 우리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갑자기 환투기 세력과 ‘일전불사’를 외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하다. 실제로 7월 초엔 환율 안정을 꾀한다는 목적으로 보유 외환을 하루에도 수십억 달러씩 쏟아 부었다. 이 바람에 7월 초엔 환율 등락 폭이 수십원에 달하기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나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는‘인기 없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추진함으로써 시장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러나 현 정부는 지난 5개월 동안 고도성장의 환상에 빠져 시장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경제정책을 펼쳤다. 설사 연평균 7% 경제성장을 달성한다고 해도 물가폭등으로 서민의 고통만 심화시킨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제 어려울수록 국민과 ‘소통’ 중시해야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인기 없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정치적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국민 신뢰를 바탕으로 국민과 ‘소통’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직접 ‘현 상황이 경제위기’라고 외치면서 심리적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으니 국민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란 말인가.
경제정책이 성공하려면 시장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시장의 신뢰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하더라도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 시장원리에 충실할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이후 보여준 모습은 ‘친(親)기업적’일지는 모르지만 ‘친(親)시장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시장에는 기업뿐 아니라 소비자도 존재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추구하는 가장 바람직한 시장구조는 기업이나 소비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경쟁적인 시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장은 공급자가 힘의 우위를 갖는 공급자 중심 구조를 형성한다. 소수인 공급자는 담합으로 얻는 이득이 커서 결속력이 강한 반면 다수인 소비자는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득이 적어 단합해야 할 유인(誘因)이 적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는 시장에서 약자인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시장감시기구를 두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친기업 정부’라고 공언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 때문일까. 공정거래위원회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 국가 간 수입물가나 비교하는, 조금은 엉뚱한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드보이’들의 생뚱맞은 가격 관리
선진 경제일수록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을 중시하고 정부의 역할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점에서 52개 주요 생필품에 대해 ‘가격 관리’를 하겠다고 한 것은 한마디로 생뚱맞다. 1970년대에나 통용되던 방식 아닌가. 독점가격도 아니고 공공재도 아닌 일반 재화의 가격을 ‘관리’하는 일이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오죽하면 현 정부 경제팀을 ‘올드보이’라고 부를까.
이명박 대통령이 4월28일 재계 총수들을 만나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공격적 경영으로 과감하게 투자해서 일자리를 창출해달라”고 주문했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놓고 고심하는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또 실제로 불황 때 투자해서 호황기가 되돌아왔을 때 열매를 거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 위험관리에 들어가고 재고가 쌓일 때 투자를 줄이는 긴축경영이야말로 진정한 시장경제 원리가 아닌가. 기업은 자선사업가가 아니며 법 테두리 안에서 ‘탐욕스럽게’ 최대한 이윤을 늘려나가는 게 본연의 일이다. 그것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쇠고기 협상 파동 이후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경제적 관점에서는 이를 시장의 기대치에 순응하는 경제정책을 통해 시장의 신뢰를 얻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새 정부 출범 후 처음 단행한 개각에서 ‘소통’을 무시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을 유임시키는 대신 최중경 차관을 경질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대리 경질’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노무현 정부 실패 타산지석 삼아야
시장은 성장론자인 강 장관의 유임을 시장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선택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일관된 경제정책 추진이 필요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해명한 이 대통령의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또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장관을 바꾼다면 그것이 오히려 시장의 신뢰를 잃는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강 장관의 유임으로 경제정책의 기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는 시장의 반응에 대해선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경제를 생각할 때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떠올리곤 한다. 그는 노동자들과 저소득층의 절대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중립적인 정책으로 시장으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으면서 브라질 경제를 살려내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 배경 역시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좌편향적이라는 시비에 휘말리면서 시장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역대 어느 정부보다 서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서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더 많이 지지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시장의 신뢰를 저버리고 선진화 구호를 외쳐본들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21세기 글로벌 경제시대에 개발독재 시대 초기에나 통할 법한 패러다임으로 경제를 이끌어선 얻을 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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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난 5개월 동안의 경제정책이 결과적으로 대기업과 소수 고소득층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에도 한번쯤은 귀 기울여야 한다. 무릇 정치란 고통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끌어안고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글로벌 경제는 경제적 효율성만 우선시하다 보니 양극화가 심화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새 정부의 경제정책을 되돌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