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좌파(그들을 진정한 의미의 진보좌파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로서는 보수우파의 분열이 가뭄 끝의 단비 격일 것이다. 어부지리의 덕이라도 봐야 재집권의 요행이 찾아들 수 있는 고단한 처지인 바에야 겉으로는 뭐라 하든 속으로까지 싫어할 까닭이 있겠는가.
아무튼 관객의 처지에서는 재미없던 대선 게임이 아연 활기를 되찾은 셈이다. 그러나 국민이, 유권자가 대선 게임의 관객일 수는 없다. 대의(代議)민주제의 주권자가 자신의 주권을 위임할 지도자 선택을 재미로 한다면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위기다.
1987년 이후의 대통령들
보수우파니 진보좌파니 하는 이분법도 유권자의 선택을 제약하거나 흐리는 요인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는 상대적이고 상호보완적 개념이지 적대적 배타적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정파야 이념적 차별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유권자마저 그것에 물색없이 휘둘릴 필요는 없다. 진정 따져볼 것은 누가, 어떤 정치세력이 내게, 내 가족에, 우리 사회공동체에, 나라에 도움이 되고 희망을 줄 것인지다. 그것이 한 시점에서 하나의 공통인식으로 모아지면 시대정신이 된다. 따라서 누가 우파고 보수이고, 누가 진보고 좌파인 것에 앞서 누가 시대정신에 더 맞는 인물이고, 어떤 정치세력이 시대정신을 구현하는 데 더 적합한 세력인지를 가리는 일이 중요하다.
1987년 민주항쟁 이후 네 번의 대선이 있었다. 1987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당연히 민주화였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의 양대 축이던 YS(김영삼)와 DJ(김대중)의 분열로 승리는 군부세력의 후계자인 노태우에게로 돌아갔다. 5년의 ‘연성(軟性) 권위주의’를 거쳐 1992년 대선에서 YS가 이겼으나 민주화세력의 온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1990년 노태우-YS-JP(김종필) 연합의 ‘김대중 배제(排除)’가 승리의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1992년 대선의 초점은 오히려 정주영의 출마였다. 이는 박정희 정권 이래 지속된 권력과 재벌의 수직적 종속구조가 해체됨을 의미했다.
1997년 대선에서 DJ가 승리한 것은 헌정사상 최초로 국민의 직접투표에 의해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비록 JP와의 호-청(호남-충청) 연대를 통한 지역연합의 한계를 지녔고, 그것이 오랜 기간 DJ 정부의 발목을 잡았으나 국민의 선택에 따른 여야 정권교체는 그 자체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완성이란 가치를 지닌다.
2002년 대선에서 비주류 정치인 노무현이 집권에 성공했다. 그것은 지역주의와 개인적 카리스마의 결합으로 이뤄진 양김시대의 ‘형식의 민주주의’에서 ‘내용의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계기였다. 2002년 대선의 시대정신은 기득권 세력에 대한 국민의 변화 요구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이념 과잉에다 미숙한 국정운영, 독선과 분열의 리더십으로 시대적 변화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경제의 성장 동력을 약화시키고 빈부 양극화를 심화시킴으로써 ‘진보좌파의 실패’로 귀결됐다.
당장 경제 안 살아나도 좋으니…
선적을 기다리는 수출용 자동차들.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는 정치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으로 열정과 책임감, 균형감각을 꼽았다. 열정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 헌신이요, 책임감은 나라와 국민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책무이며, 균형감각은 역사와 시대를 읽는 통찰이자 통합을 이끌어내는 리더십의 기초다. 역대 대통령치고 나름의 열정과 책임감이 없었던 대통령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균형감각 없는 열정과 책임감은 오히려 시대정신에 역행함으로써 나라와 국민은 물론 권력자 자신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현대사가 그런 대통령들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이승만은 건국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독재와 부패로 몰락했다. 박정희는 근대화의 초석을 쌓았으나 유신독재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전두환은 정통성 없는 권력이 끼치는 폐해를 남겼다. YS와 DJ는 민주화 투쟁의 중심이었으나 가부장적 리더십으로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특히 지역주의를 권력기반으로 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역기능을 초래했다. 노무현은 비주류의 피해의식 및 주류에 대한 적의(敵意), 독선적인 도덕적 우월감 등으로 지역주의의 틀을 벗어나 국민통합을 이끌어낼 기회를 스스로 날려버렸다. 리더십의 실패는 정권 실패를 넘어 국가 실패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새 대통령은 열정과 책임감에 더해 균형감각을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는 보수 진보가 따로 없다. 균형감각이 없으면 시대정신도 제대로 읽을 수 없으며, 다양한 이해관계의 집합체인 국민을 통합할 수도 없다. 균형은 어정쩡한 중도(中道)의 방편이 아니다. 무(無)이념의 기회주의도 아니다. 시대의 핵심을 꿰뚫는 정도(正道)다.
오늘의 시대정신이라는 ‘경제 살리기’의 경우를 보자. 노무현 정부 4년간의 평균경제성장률은 4.25%로 같은 기간 세계 평균경제성장률 4.9%에도 못 미쳤다.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력도 일궈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장이 필요하고 우선되어야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장만으로 일자리가 늘어나고 양극화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기술혁신과 정보화로 ‘고용 없는 성장’은 이제 낯선 말이 아니다. 최근 통계청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제조업체의 유형자산이 10억원 늘어났을 때 고용증가 인원은 2003년 36.7명에서 2004년 18.2명, 2005년 3.0명, 2006년 2.3명으로 급속히 줄어들었다. 근로자 300명 이상 대기업의 경우 유형자산을 10억원 늘려도 고용인원 증가는 1.6명에 그쳤다. 이는 대규모 제조업체의 투자가 자동화 설비를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투자확대에 따른 고용창출 효과가 갈수록 떨어지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비정규직은 지난 4년 새 110만명이나 늘어난 570만명으로 전체 임금근로자의 36%에 달한다. 이들의 임금수준은 정규직의 63.5%다. 그렇다고 당장 해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을 무리하게 정규직으로 전환하려 들 경우 오히려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없어지는 악순환을 피하기 어렵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 질서 아래서 양극화는 일정부분 상수(常數)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분배가 성장의 대립적 가치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성장은 우파, 분배는 좌파의 슬로건이 아니다. 성장을 통한 분배는 좌파든 우파든 피할 수 없는 공통의 과제다.
‘국민성공시대’ ‘가족행복시대’ ‘따뜻한 시장경제’란 구호보다는 어떻게 성장하고 분배할 것인지 구체적 청사진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하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당장 일자리를 늘리고 양극화 문제를 풀겠다고 흰소리를 치기보다는 그 과정의 어려움을 인내하고 함께 노력하자고 해야 한다. 그렇게 비전을 제시하고 실행에 대한 신뢰를 얻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열정과 책임감, 균형감각 있는 바른 리더십이 아닌가. 새 대통령은 이런 리더십을 국민에게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대북정책, 원칙 지키되 유연하게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 전경.
제1의 원칙은 평화공존이다. 흡수통일이 비현실적이라면 우선은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결단코 허용해선 안 된다. 북의 핵 폐기는 평화의 전제조건이다. “핵무기 개발이 자위용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식은 평화공존의 제1원칙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원칙이 무너지는 데서 남남(南南) 갈등이 증폭된다. 국제 공조도 흔들리게 된다.
제2의 원칙은 북의 개혁개방을 촉구하고 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비록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절대적 상호주의는 불가능하더라도 남측의 지원이 북한 주민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김정일 세습정권의 강화에 기여한다면 ‘퍼주기식 지원’을 계속할 수는 없다. 평양 정권이 개혁개방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고 그런 말은 아예 하지 말자고 하는 무원칙으로는 세금 내는 남한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 없다.
개혁개방만이 북한이 살길이고, 그래야만 동족인 북한 주민의 비참한 삶도 개선될 수 있음이 분명할진대 그러한 원칙도 없이 무조건 포용하자고 해서야 진정한 남북관계의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햇볕정책은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를 확산하고, 남북 교류를 확대하는 긍정적인 측면을 감안하더라도 김정일 정권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 결국 실패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패의 원인 역시 원칙의 부재(不在)에 있다면 당연히 원칙을 가다듬고 지켜야 한다. 그렇다고 남한 사회 구성원을 ‘친북 좌파세력과 대한민국 수호세력’으로 이분화하는 냉전적 사고로 되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원칙은 지키되 국민의 대북 자신감과 국제공조를 바탕으로 유연한 대북 정책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원칙을 세우고 그에 따라 국민을 설득하면 남남 갈등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이것이 새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이다.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버려라’
대통령책임제의 특징 중 두드러지는 것은 승자가 권력을 독식한다는 점이다. 불과 1~2 % 차이로 이겨도 승리의 과실(果實)은 승자가 100% 가져간다. 책임 또한 모두 지지 않느냐고 하지만 무책임의 경우 그 피해는 몽땅 국민에게 돌아간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패거리 정치’다. 내 사람들끼리만 하겠다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노무현 정부의 ‘코드인사와 386그룹’을 들 수 있다.
권력은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는 것이다.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패거리 정치와 부패가 잉태된다. 역대 정부에서 공기업 개혁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를 보자. 내 사람들, 선거에서 도와준 내 편에게 공기업 사장, 감사 자리라도 나눠주느라고 개혁의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게 아닌가. YS·DJ 정권에서도 그랬고, 노무현 정권에서도 그랬다. 다음 정권은 과연 다를 것인가. 새 대통령은 분명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백 마디 개혁 소리보다 공기업에 낙하산 인사 하지 않는 실천 하나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가(佛家)에서 이르기를 ‘사벌등안(捨筏登岸)’이라고 했다.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버리라는 것이다. 벌(筏·뗏목)이란 정법(正法)을 비유한다. 정법의 뗏목이라도 응당 버려야 할 때가 있는데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지 않으냐는 가르침이다. 새 대통령은 언덕에 오른 다음 뗏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내 사람들 모두 끌어안고 논공행상을 하려 한다면 처음부터 실패를 예약하는 셈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장관 자리도 내 사람들 자리 나눠주기에 악용됐다. 그러다 보니 장관 평균 임기가 1년도 안 되는 기현상이 되풀이된 것이다. 장관이 뜨내기 신세인데 국정이 어떻게 제대로 될 수 있겠는가. 내각은 정파를 뛰어넘는 ‘코리아 드림팀’으로 짜야 한다. 그리고 특별한 잘못이나 책임져야 할 경우가 아니라면 바꾸지 말아야 한다. 선거용으로 빼고, 선거에서 졌다고 위로용으로 앉히는 식의 인사가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 새 대통령은 이것만 분명히 해도 국민의 박수를 받을 것이다.
상식의 정치, 통합의 언어
노무현 대통령은 “작은 정부보다 효율적인 정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직속위원회가 47개나 됐고, 공무원 수는 5만7000여 명이나 늘었다. 하지만 노 정부가 효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가. 국민의 조세부담만 가중됐을 뿐이다. 당연히 ‘효율적인 작은 정부’로 바꿔야 한다. 새 대통령이 취임 이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말을 앞세울 필요는 없다. 말없이 실천하면 된다. 정부 개혁은 우물쭈물하다가는 못한다. 정권 초기에 밀어붙여야 한다. 국민은 새 대통령이 어찌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정권의 성패가 달린 일이다.
이념보다 상식의 정치를 해야 한다. 상식은 한 시대의 보편적 가치다. 보수이고 진보이고 간에 보편적 가치인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궤변이거나 헛소리다. 국정 운영의 기본 상식은 법치(法治)다. 그러나 지도자의 리더십은 인간의 얼굴을 한 법치여야 한다. 그것은 지도자의 품격이 뒷받침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지도자의 권력 행사는 말로써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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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되고 격조 있는 대통령의 언어는 갈등을 해소하고 세상의 분위기를 순화할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리더십의 요체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교육을 개혁하는 것도 지도자가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 국민의 마음을 얻으려면 정당한 권위를 회복해야 하고 최소한의 존경이나마 받을 수 있는 품격을 갖춰야 한다. 새 대통령은 마땅히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채 갖추지 못했으면 족집게 과외라도 받아야 한다. 말로써 말 많은 대통령을 계속 봐야 한다면 우리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정당한 권력과 국민의 자발적 동의가 합해질 때만이 헤게모니가 이루어질 수 있다. 새 대통령이 누구이든 열정과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각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고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차선(次善)의 결과이든 차악(次惡)의 결과이든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마저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