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 후 지난 4개월 동안 이명박 정권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영어몰입교육 파동, 인사 파동, 친이 내분 파동, 친박 파동…그야말로 ‘파동’의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의 한나라당 총선 과반. 위기의 근원은 국정철학과 실천의 부재에 있다. 국민은 이명박 정권이 내세우는 ‘실용(實用)’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고 있다. 말과 행위가 따로따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53석 과반’의 함의는 대통령의 말하기 좋고 듣기 좋은 수사(修辭)를 거부한다. ‘정치보다 앞선 국민’은 오히려 대통령에게 ‘과반의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경고장의 요지는 이럴 것이다. ‘출범한 지 달포밖에 안 된 새 정부가 초장부터 흔들려서는 안 되겠기에 밀어준 것이지, 그동안 잘해서 밀어준 건 아니오. 그러니 국민보다 앞서가지는 못할망정 더는 실망시키지 마시오. 앞으로 우리를 어떻게 섬기는지 지켜보겠소.’
“잘 해서 밀어준 건 아니오”
너무 야박한가? 천만에, 후한 평가다. 이번 총선 투표율은 역대 최저인 46%. 절반이 넘게 투표하지 않은 선거에서 절반 이하의 득표율(전체 유권자의 4분의 1 이하)로 과반을 차지했으니 한나라당은 ‘표의 과(過)대표성’을 누리는 셈이다. 이는 한나라당의 정당투표 득표율이 37%대에 머문 것에서도 입증된다.
비록 46%의 투표였지만 민심은 녹록지 않았다. 집권 여당에 과반의석을 줬지만 독주는 허용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내용이 ‘보수 2대(對) 진보 1’의 판도라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는 여당 내 박근혜계와 야당의 이중 견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는 ‘황금분할’이 될 수도 있고, 최악의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그림을 그려내느냐는 결국 이 대통령에게 달렸다.
친박연대와 친박 무소속을 끌어들여 여당 의석을 안정 과반수로 만들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떨어뜨린 탈당파들을 무조건 복당시키는 것은 강재섭 대표의 말마따나 표심(票心)에 어긋나는 것이고, 그들이 한나라당에 돌아온다고 지난날이 없었던 것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어차피 ‘박근혜의 존재’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면 그들이 바깥에 있든 안으로 들어오든 근본적으로 변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칙과 정도(正道)로 가는 편이 낫다. 길게 보아 그것이 민심을 얻는 길이다. ‘수(數)의 정치’는 마스터카드가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는 만성적인 분점 정부, 즉 행정 권력은 대통령이 갖고 의회권력은 야당이 지배하는 대립구도를 보여왔다. 1987년 체제가 내포한 정치의 불안정성은 5년 단임제의 구조적 문제로 부각됐고, 이로부터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같이 시작해서 함께 끝나게 조정하자는 ‘원 포인트 개헌론’이 제시됐다.
그러나 개헌 논의에 따르는 여야의 정략적 접근 및 개헌 시점의 문제, 여론의 분열이 뒤엉키면서 유야무야되곤 했다. 이명박 정부는 임기를 10개월 남짓 남겨놓은 2012년 4월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한다. 2010년의 지방선거를 포함하면 임기 내 세 번의 큰 선거를 치러야 하는 셈이다. 선거로 시작해서 선거로 끝날 판이다.
어떤 ‘실용’인지 의문
물론 여소야대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견제와 상생(相生) 정치가 이뤄질 수 있다면 거여(巨與)의 일방통행보다 민주적이고 생산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여대(與大)면 밀어붙이려 하고 야대(野大)면 발목을 잡으려 하는 한국의 정치문화에서 이는 교과서적인 논리일 뿐이다.
이번 총선은 중간평가가 아니다. 따라서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자는 안정론의 우세는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1988년 총선도 시기적으로는 이번 총선과 같이 대통령 취임 후 두 달도 안 돼 치러졌지만 결과는 여소야대였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정치 환경은 판이하다. 1987년 대선은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를 얻은 선거였다. 민심은 좌절했지만 의회권력마저 군부 후계세력에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3김의 카리스마는 여전히 강력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이번 총선은 이명박의 대선 압승과 야당세력의 지리멸렬 속에 치러진 ‘원사이드 게임’이었다. 그 결과가 ‘아슬아슬한 과반’이니 이야말로 강력한 경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총선 결과가 ‘과반의 경고장’이라면,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경고의 본질적 의미를 진정 국민을 섬기는 정신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때 이르지만 좋은 매’가 될 것이다. 사실상 이제부터 본격 출발하게 된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려면(적어도 실패하지 않으려면) 국정철학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간다고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국정 철학이 부재하다면 이명박 호(號)의 순항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이념의 시대를 넘어 실용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과연 어떤 실용(實用)인지는 의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고 무엇이든 그 반대로만 하면 실용적 우파인가. 사회의 상식이나 규범을 벗어나는 도덕적 하자가 있어도 일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실용 인사인가. 충돌하는 가치의 양면성을 고려하기보다 효율성만을 앞세워 밀어붙이는 것이 실용 정책인가.
이명박 정부는 성장과 국민통합을 모토로 내세웠다. 박정희의 발전체제가 반대의 논리를 배제한 성장 제일주의였다면 이명박의 신(新)발전체제는 경제성장을 통한 국민통합을 지향한다. 실용주의는 그것을 위한 실천의 방식이다. 그러나 성장과 통합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성장을 위해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를 완화하고, 재벌의 출자총액제한을 폐지하고, 수도권 개발규제를 풀고, 감세(減稅)를 한다고 할 때 재벌의 사금고(私金庫)화 및 문어발식 확장, 수도권 난개발과 환경 악화 및 지방과의 균형발전 저해, 국가재정 감소에 따른 복지비용 축소 등 국민계층간, 지역간, 이해집단간 이해와 갈등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어떻게 설득해 타협을 이끌어내고 조정해 갈등을 최소화하느냐가 정치 리더십이다. 그것을 이념이 아닌 실용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 실용정부의 역할이다.
노조도 재벌도 공정한 법치로
그러자면 정책의 정합성(整合性)을 바탕으로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정책의 정합성이란 시대적 당위성에서부터 일의 순서, 비용 대 효율의 균형 등으로 이해관계의 조율이 가능할 때 획득된다. 이를테면 규제완화가 정부(관료)의 불투명성을 제거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 공정한 시장은 건전한 시장경제를 위해 필수 조건이다. 이 두 조건이 균형을 이룰 때 정책은 충분조건으로서 정합성을 가질 수 있고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노사 문제 또한 예외가 아니다. 법치주의가 노동조합에는 강하게, 재벌에는 느슨하게 적용된다면 노사갈등을 피할 수 없으며, 그런 법치로는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다수 국민의 동의 없이 국회 의석수로 밀어붙이려한다면 아무리 여대야소라고 한들 극심한 갈등비용을 지급할 수밖에 없다. 4년 전 국회 과반수를 이룬 노무현 정부가 민의와는 동떨어진 ‘4대 개혁입법’을 몰아붙이려다 급속히 몰락한 것이 가까운 예다. 노 정부는 정책을 이념의 틀에 맞추려다가 실패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가 이념이 아닌 실용을 국정의 잣대로 삼은 것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어떤 실용인가라는 점이다. 실용주의가 국정철학이라면 ‘어떤 실용인가?’는 중요한 의제가 아닐 수 없다.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말은 ‘행위’를 뜻하는 그리스어 ‘프라그마(pragma)’에서 나왔고, 프라그마는 ‘실천(practice)’ ‘실제적(practical)’의 어원이다. 그런 만큼 실용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실천의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실용주의가 20세기 미국의 철학사상으로 자리 잡은 데는 방법론의 차원을 넘는 역사적 문화적 토양이 그 바탕이 됐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남북전쟁(1861~1864) 이후 미국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과 혼란에서 벗어나 낙관적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상에 목말라 있었다. 미국인의 프런티어 정신에 맞는 새로운 사상은 관념보다는 현실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실용주의였다. 실용주의를 널리 알린 하버드대 교수 윌리엄 제임스는 “실용주의는 고정된 원칙과 폐쇄 체제, 그리고 가장(假裝)된 절대와 기원에 근거를 둔 모든 추상과 현실을 거부한다.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열린 마음이고 구체적인 것에 전념하며 행동과 힘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실용주의는 반대되는 사고방식을 조화시키는 행복한 조화자”라고 했다. 유용성을 중시하되 의견의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강력한 도덕성과 열린 마음
어떤 독단이나 독선도 실용주의의 적이다. 과속이나 일방통행도 금물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용주의는 강력한 도덕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실용주의가 20세기 미국 사상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미국인 특유의 낙관성과 함께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작용했다.
물론 다분히 미국적 사상인 실용주의와 이명박 정부가 말하는 실용주의가 같을 수는 없다. 역사 정치 사회 문화의 풍토가 다르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로 이어진 이념 중심의 좌파정권을 비판하고 차별화하기 위한 우파정권의 정치적 레토릭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용주의를 정부의 성격으로 차용하려 한다면 최소한 실용주의의 가치인 열린 마음, 조화, 도덕성 등에 대한 성찰과 고민,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대통령 당선 이후 이명박 정권이 보인 모습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성찰이나 고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일만 열심히 하고 성과면 내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편의주의나 성과주의에 매몰된 듯한 느낌이다. 문제는 기업이라면 편의주의와 성과주의로 효율성을 높일 수 있겠지만 국가라는 다양한 이해공동체에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더욱이 지금은 ‘박정희-정주영 시대’가 아니다.
다산 정약용은 공직자가 지켜야 할 지침으로 칙궁(飭躬·스스로를 바르게 함), 청심(淸心·마음을 깨끗이 하여 청렴함), 제가(齊家·집안을 바르게 다스림), 병객(屛客·외부 청탁을 물리침), 절용(節用·아껴씀), 낙시(樂施·즐거운 마음으로 베풂)의 여섯 가지를 들었다. 물론 오늘의 공직자에게 도덕군자가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공직자라고 해서 한 시대, 사회의 가치관 및 삶의 양태로부터 통째로 벗어나기는 어렵다. 공직자의 부패는 그 사회의 전반적 부패도 및 부정한 관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그들은 대개 투자라고 말하지만) 또한 일반적 재테크 관행에 따른 것일 수 있다. 돈 많고 능력 있는 이들이 대개 그렇게 사는 사회에서 공직자만(또는 공직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만) 깨끗하고 바르게 살라는 것은 비현실적인 주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내각의 인사 청문회에서 어느 장관후보가 한 “공직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장관이 될 줄 알았더라면) 신변을 조금 더 깔끔하게 했을 것”이란 말은 그래서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 자신 공직자로서 적절하지 못한 삶을 살아온 것을 실토한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의 면면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강부자(강남 땅 부자) 내각’은 그들이 모두 ‘1%의 부자들’이기 때문보다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준 인식의 천박함으로 실용정부에 대한 기대를 절망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들은 청와대가 항변했듯이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富)에 대한 관념에서부터 사회구성원들에 대한 배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사회의 평균 도덕률에도 미치지 못했다.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할 뿐 투기와는 상관없다” “서초동 오피스텔은 내가 유방암이 아니라는 검사결과가 나오자 남편이 기념으로 사준 것” “부부가 교수를 25년 했는데 재산 30억원은 다른 사람에 비해 양반인 셈” 등의 분별없는 발언은 그들의 인식 수준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런 인물들이 실용주의의 본뜻이나 알겠는가. 그런 인물들이 장관이 된다면 과연 열린 마음과 조화로 국민을 통합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인물들이 모여 실용정부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인물들을 첫 내각의 후보자로 내세운 대통령을 진정 실용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노(No)’일 수밖에 없다.
‘강부자 내각’의 천박함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영어몰입교육’ 파동을 보자. 이 문제 또한 인수위가 실용주의에 대한 철학적 사고 없이 단순히 ‘영어’ 수준으로 접근함으로써 빚어진 오류다. 독해 중심, 문법 중심의 영어교육을 듣고 말하기 중심으로 바꿔나가자, 이른바 실용영어를 하자는 방향은 옳다. 그러나 ‘영어몰입교육’은 다르다. 그것은 자원의 낭비, 교육 내용의 질적 저하 등 현실적인 문제 외에도 헌법 정신인 평등의 가치를 훼손시켜 국민통합을 저해하는 본질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공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위한 기초적 장치다. 노무현 정부의 교육평준화정책이 문제된 것은 그것이 결과의 평등으로 하향 평준화를 초래할 수 있으며, 미래 국가발전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화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수월성(秀越性) 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공교육의 중요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교육의 내실화야말로 기회의 평등을 통해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치러진 전국 중학교 1학년생의 학력평가를 보면 서울 강남 지역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서울 강북지역 학교나 지방 학교 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력이 높은 학부모를 둔 강남지역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영어 사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일방통행식으로 ‘영어몰입교육’을 내미는 것은 결코 실용주의가 아니다. 유치원생들부터 영어 유치원으로 몰려들게 하는 ‘아마추어 정책’으로는 실용정부가 될 수 없다. 공교육 내에서 실용영어를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교육현장의 현실과 학생 학부모의 생각을 종합해 장기적으로 마련해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실용적 접근이요, 실용정부가 할 일이다.
뒤늦게나마 이명박 대통령이 “영어몰입교육은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며 사실상 폐기 선언을 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언제는 인수위 손을 들어줬다가 여론이 나빠지자 태도를 바꾸는 식의 대증요법, 하루는 물가 안정을 강조하고 다음날에는 경기부양의 필요성을 말하는 임기응변 또한 실용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좌파 타령, 이젠 안 통한다
초기의 시행착오는 약이 될 수 있다. 국민은 국회 과반수로 새 정부에 힘을 실어줬다. 이제는 공이 온전히 이명박 정부로 넘어간 셈이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失政)에 따른 반사효과는 끝났다. 보수우파가 국회의 200석 이상을 점유한 정치 환경에서 더는 ‘좌파 타령’을 할 수 없다. ‘이명박 -박근혜 싸움’은 여권이 정치력으로 풀어낼 문제이지 그것이 국정혼선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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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글의 앞머리로 돌아가자. 이 대통령은 거듭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다. 그러자면 국정 철학부터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실용정부라면 어떤 실용인지, 이념을 벗어난다면 합리적 진보까지 포용할 수 있을 것인지, 전문경영인이 아닌 국가지도자의 리더십은 어떠해야 하는지, 이러한 근본적 의제에 대해 ‘내가 아는 사람, 나와 인연이 있는 인물’의 좁은 폭에서 벗어나 폭넓게 의견을 모으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실용, 포용과 조화로 통합을 이뤄낼 수 있는 실용정부의 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국정을 차근차근 안정감 있게 이끌어야 한다.
선진화의 나무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균형 있게 수용하는 토양에서 자라날 수 있다.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선동에 휘말려 우 편향으로 쏠린다면 실용주의는 원칙 없는 편의주의 또는 성장 제일주의를 위한 가면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것은 단기적 성과에는 유효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양극화에 따른 구조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킬 위험성이 높다. 이 대통령은 CEO(전문경영인)형 리더십을 넘어 국가 최고지도자로서의 생각, 말, 행동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