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이전투구’ 민주당 신·구주류 100일 전쟁

뭉치기엔 너무 큰 상처, 갈라서자니 계산 불투명

  • 글: 조수진 국민일보 정치부 기자 sjcho@kmib.co.kr

    입력2003-07-28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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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신주류와 구주류는 이제 싸울 만큼 싸웠다.
    • 길게는 지난해 12월 대선 직후부터, 더 길게는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국민경선 때부터 시작된 싸움이다. 하지만 가장 치열했던 건 올해 4월 재보선을 전후한 때부터의 100일간. 당을 장악하려는 신주류와 앉아서 당하기 싫어 사생결단으로 버티는 구주류.
    • 두 진영간의 기나긴 전쟁은 이제 최후의 결전만을 남겨놓고 있다.
    ‘이전투구’ 민주당 신·구주류 100일 전쟁
    “늦어도 11일쯤엔 자리를 내놨어야 했어. 책임감 없다는 욕은 좀 먹더라도 하루빨리 내놨어야 했어. 선거 후 뒷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지….”

    2003년 4월17일 청남대에서 열리는 여야 영수회담에 참석하기 전 민주당 정대철 대표는 당사 3층 대표실에서 내뱉듯 한마디를 던진 뒤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몇 개피인지도 모르게 한참동안 담배만 피워댔다.

    “요즘은 잠이 잘 안 와. 밤에도 몇 번씩이나 벌떡벌떡 일어나고, 속절없이 담배만 태우고 있소.”

    5선 중진으로 숱한 선거를 경험한 그에게 4·24 재보선은 해보나마나인 듯 했다. 그에게 가장 큰 걱정거리는 개혁국민정당 유시민 후보를 민주당과의 연합후보로 세운 경기 고양 덕양갑 선거였다. 구주류측 의원들을 다 제쳐놓고 신주류측의 이호웅 의원과 이용희 최고위원을 몰래 개혁당 김원웅 대표와 만나게 해 이뤄낸 연합공천이었다. 그런 만큼 덕양갑의 성적표는 중요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매일 3건씩 여론조사를 했지만, 결과는 별 차이가 없었다. 2건은 지는 것으로, 1건은 오차범위 안에서 이기는 것으로 나왔다.

    “모두가 힘을 합쳐 선거를 치러도 어려운 판에…. 선거 끝나고 당이 어떤 꼴이 될지 무서워.”



    정대표는 신·구주류 모두 각자의 계산에 분주한 현실이 징그러운 듯했다. 신당을 꿈꾸는 신주류측 입장에서 볼 때 덕양갑만 이기면 ‘절묘한’ 것일 수도 있었다. ‘민주당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는 신주류측 주장의 타당성이 증명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주류측 의원들은 덕양갑에서 살다시피 했다. 거꾸로 구주류측은 덕양갑에 만큼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지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재보선 선거 전 노대통령의 암시

    “(대표가) 아닐 땐 그렇게 해보고 싶더니…. 대표를 맡고 보니 단 하루만 좋더라고. 맡은 날은 여기저기서 인사를 받으니 좋았지만, 바로 다음날부터는 고민의 연속이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리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거야. 그러나 대표직을 던져버리면 선거는 어떻게 되냐구. 선거를 안 치를 수도 없고. 게다가 우린 집권여당이 아닌가.”

    그는, 대표란 자리의 특성상 신·구주류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고 중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버거운 자리란 점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오늘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면 한 가지 건의를 해야겠어. 재보선이 끝나자마자 당이 분열로 치달을 텐데 뭔가 용단을 내려달라고 말야. 의원들을 다 한번 초청해달라는 말씀을 좀 드려야겠어. 대통령이 직접 의원들을 만나면 분위기도 좀 좋아지지 않겠나.”

    정대표는 호기롭게 대통령을 만나러 나갔다. 그러나 대통령 면담 뒤 당에서나 청와대에서나 정대표가 건의하겠다던 대통령-의원 간담회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당을 아우르고 모두 함께 가야 할 시점은 지났다는 노대통령의 간접화법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4·24 재보선이 끝나면 민주당은 잠시 멈추었던 신당 논의란 폭풍 속으로 휘말리게 될 것이란 암시였다.

    4·24 재보선의 성적표는 정대표의 예상대로 참담했다. 민주당 후보를 낸 수도권 두 곳은 지고, 덕양갑의 개혁당 유시민 후보는 승리했다. 민주당의 간판으로 승자가 된 곳은 없었다. 선거 다음날인 4월25일. 세월을 낚던 신·구주류는 바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신주류측은 정치개혁과 정계개편, 나아가 신당 창당을 ‘패키지’로 묶어 분위기를 띄웠다. 신주류는 “개혁과 변화 그리고 세대교체에 대한 국민적 명령”이라며 유의원 당선에 의미를 뒀다.

    4월25일 하루에만도 당내 최대 의원모임(62명)인 열린정치개혁포럼, 재야 출신 의원모임, 바른정치실천연구회 등이 잇따라 열렸다. 특히 열린개혁포럼에서 이재정 의원은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단정지었다. 장영달 의원은 “사형선고가 아니라 이미 사형이 집행됐다”고 발언 강도를 높였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이번 선거는 사실상 DJ정부에 대한 국민의 마지막 평가”라며 패배의 원인을 구주류측에 돌렸다.

    4월28일 이상수 천정배 신기남 의원 등 대선 당시 선대본부장을 지낸 신주류 핵심인사들이 개혁신당론을 공식화했고, 이해찬 이재정 이호웅 의원 등 재야출신 인사들이 개혁신당론에 합류했다. 또 대선 직후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했던 서명파 의원 23명도 별도의 회동을 갖고 개혁신당 창당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했다.

    이 무렵 동교동계 김옥두 의원은 신당 창당을 주창하는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통화 요지는 “호남의 지지 없이 노무현 정부 탄생이 가능했겠냐”는 것이었다. “신당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나가서 당을 만들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험담도 곁들여졌다.

    정균환 총무는 패배의 원인을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의 오만 방자함 때문”이라고 규정했다. “독선적인 당 운영으로 갈등을 유발해 이 꼴이 된 것”이라고도 했다. 구주류측은 “호남 민심의 이완현상이 드러난 결과”라면서 양재호 전 양천구청장(서울 양천을) 패배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상반된 분석은 정국의 불안정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불안정한 정국구도는 정계개편의 원동력 혹은 정치권 지각변동의 명분이 됐다. 또 양측의 사고 차이는 정치적·정책적 내홍으로까지 구체화했다. 여기에 한화갑 전 대표의 ‘신주류 개혁독재론’ 발언, 대북송금 특별검사 도입과 노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 고영구 국정원장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신·구주류간 갈등은 확대 재생산됐다. 4·24 재보선의 책임론은 단순한 계파 갈등의 수준을 넘어 당의 분열과 정계개편의 고리가 됐다.

    초반기엔 신주류가 파죽지세로 민주당을 접수하고, 이에 저항하는 구주류는 일패도지(一敗塗地)로 정치생명을 부지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신주류는 개혁이라는 명분과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이라는 힘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해, 구주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이미지에 대선을 거치면서 노대통령에게 미운 털까지 박혀 있었다.

    그러나 전면전을 개시한 지 100일이 가까워지는 지금, ‘정치는 생물’이란 말처럼 형세를 점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신·구주류는 늘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다. 다만 힘을 갖춘 신주류는 아직까지 당을 접수하지 못했고, 구주류는 “절 싫으면 중이 떠나라”며 신주류를 압박하는 입장이다.

    이처럼 백중세가 된 것은 ‘밥 빌어다 죽도 못 쑬’ 신주류의 정치력 부족에 기인한다는 평가가 대체적이다. 우선 그들은 준비 안 된 상태에서 거사에 착수했다. 신당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전략을 세워 공론화와 동시에 전광석화처럼 몰아붙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 조직, 반대파 제압 등 모든 면에서 전혀 준비가 없었다.

    특히 신당이 될 뻔하면 어김없이 ‘누구누구는 찍어내야 한다’ ‘누구누구는 함께 갈 수 없다’ 등과 같은 ‘말실수’가 터져나왔다. 이강철 대구시지부장 내정자의 ‘신당 동승 불가’ 5인방, 15인방 언급은 결과적으로 구주류를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신기남 의원은 “선혈이 낭자하더라도 신·구주류간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고까지 했다. 신주류측의 신당 작업을 권력선점으로 시인하고 나선 것이다.

    더구나 노대통령은 당정(黨政)분리라는 이유로 신당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뚜렷한 리더도 없고 대통령이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집권당이 만들어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노대통령의 지지도마저 떨어지자 구주류의 저항이 힘을 얻게 됐다. 여기에 특검 등을 둘러싸고 호남 민심이 이상기류를 보이면서 신·구주류는 승자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장기전을 이어가고 있다.

    통합신당과 리모델링은 ‘이웃사촌간’

    신주류는 이제 모두가 함께 가는 통합신당을 깃발로 “끝까지 당을 고집한다면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고 구주류측에 항복문서를 요구하고 있다. 구주류측은 이에 맞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의 리모델링이다. 갈 테면 가보라”며 결사 항전하는 양상이다.

    신주류측이 신당추진기구를 독자적으로 발족해 신당의 틀을 잡으려 하자, 구주류측은 민주당의 정통성을 지키는 모임, 약칭 ‘정통모임’을 구성해 대응하고 있다. 신주류측이 신당추진의 당위성을 알리는 국민토론회를 벌이면, 구주류측은 즉각 민주당 사수 토론회로 응수하고 있다.

    그런데 양측이 내세우고 있는 통합신당론과 리모델링론에 대해 그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양측에 소속된 의원조차 그 차이점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이는 별로 없다. ‘민주당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당내외의 각계 정파와 세력을 아우르는’ 통합신당과, ‘민주당의 기반에서 많은 수의 인사를 영입하는’ 리모델링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어찌 보면 통합신당과 리모델링은 정대철 대표의 표현대로 ‘이웃사촌간’처럼 백지 한 장 차이일 수도 있다.

    이는 아무리 겉모양을 포장해봐야 신당에 대한 입장 차이가 궁극적으로 권력투쟁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정계개편을 하고 싶은, 당내 주역이 되고 싶은 속내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전투구’ 민주당 신·구주류 100일 전쟁

    지난 6월4일 당무회의에 앞서 분당 반대 구호가 적힌 현수막 철거를 놓고 신당추진파와 민주당사수파 의원들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신주류측 의원들 사이에서는 박상천 정균환 김옥두 최명헌 유용태 박종우 이윤수 최선영 의원 등 동교동계나 대선 당시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이하 후단협) 핵심의원들이 배제대상으로 거명된다.

    신당 싸움이 시작된 뒤 신주류가 첫 번째로 지목했던 ‘청산대상’이 정총무였다.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흔들었던 그룹의 대표자”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호남 중진인 데다 원내총무란 자리를 내놓지 않고 구주류의 숨통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신주류측에겐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한편 구주류는 ‘신당론으로 당내 분열을 주도한 6명’의 의원을 문제 인물로 꼽는다. ‘신당 추진 강경파’로 불리는 신기남 정동영 천정배 의원과 ‘당직자 또는 중진으로서 당 분열을 획책했다’는 명목으로 김원기 이상수 이해찬 의원 등 모두 6명을 해당(害黨) 행위자로 지목한 것이다.

    민주당은 지금도 전국정당?

    신주류측이 내세우는 신당론은 신당의 영남권 진출방안 연구 과정에서 출발했다. 기존의 호남 구주류와 일정한 선을 유지할 때만 영남의 지지표를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다. 한 소장파 의원은 “영남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호남 출신, 즉 구주류를 안고 갈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세대교체와 변화에 부응하면 신당이 호남에서 선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주류 강경파인 이강철 특보는 공·사석에서 스스럼없이 “호남에서 10석을 잃어야, 영남에서 10석을 얻는다”고 설명한다. 지금처럼 호남에서의 독식체제로는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을 수 없는 만큼, 영남에서 단 몇 석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호남의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는 논리다. 여기에는 원외 인사가 대부분인 영남 출신들이 원내로 들어오고픈 욕구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

    구주류측이 내세우는 신당불가론은 ‘민주당은 지금도 전국정당’이라는 논리로 접근한다. 영남을 제외한 전지역에서 의석을 가장 많이 얻은 정당인 만큼 전국정당이란 얘기다. 또 신주류측의 셈법 논리의 오류를 지적한다. 호남에서 몇 석을 잃어야만 영남에서 그만큼의 의석을 얻는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것. 여기엔 ‘신호남 소외론’이란 지역정서가 깊이 작용한다.

    구주류 의원들은 “호남소외론이 기정 사실화할 경우, 호남의 9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선된 노대통령과 현 정권은 정치적 기반을 상실하는 중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호남을 배제한 개혁신당은 섣불리 창당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공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반면 신주류 인사들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유권자가 판단할일”이라며 호남정서론을 피해나간다.

    양측은 대선 승리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신주류는 대선 승리를 민주당의 승리가 아닌 노무현의 승리로 평가한다. 일종의 정권창출론이다. 그러나 구주류측은 이번 대선은 민주당의 전통적 기반에 영남 표 일부와 노사모라는 노대통령 개인 팬클럽 표 일부가 더해진 것으로 해석한다. 정권은 재창출됐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노대통령은 호남의 일반 국민에게는 무한한 부채의식을 갖고 있지만, 호남의 지역민심을 부추기는 정치인에겐 부채의식이 없다”는 노대통령의 최측근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장의 발언은 신·구쥬류간 해석의 차이를 대변한다. 신주류 의원들은 “우리 입장을 제대로 표현했다”고 하고, 구주류 의원들은 이런 일련의 발언을 호남 세력 교체론 혹은 호남 물갈이론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차이들은 결과적으로는 호남을 중심으로 한 주류들이 비주류로 전락했는 데도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비호남을 중심으로 한 기존 비주류가 주류가 되고 나서 확고부동하게 권력의 이동을 굳건히 하고 싶어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피비린내 나는 신·구주류간 대립의 역사는 그 뿌리가 작년 6·13 지방선거 직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형성됐던 친노 대 반노·비노의 대결구도가 대선 이후 신주류와 구주류로 이름만 바뀐 것이다.

    2002년 6·13 지방선거가 끝난 다음날부터 민주당에선 당의 변화와 함께 청와대와 정부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DJ에 대한 포문을 연 것이다. 한마디로 그간의 성역을 깨뜨리며 청와대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무현 후보의 정무특보였던 천정배 의원은 부패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 당의 책임을 강조하며 “우리가 청와대를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에서 응답을 하든 안 하든, 강력한 공세를 통해 DJ와의 연을 끊고 국민들 앞에 노무현당으로 변신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탈민주당을 노리는 당내 세력들의 거사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8·8 재보선도 참패로 끝나면서 그동안 신당 창당에 미온적이던 반 노무현 세력도 “현재의 민주당으론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데 대해 아무런 이의를 달지 못했다.

    친노 세력과 반노 세력은 ‘침몰하는 민주당’을 버리고 민주당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의 신당을 띄워야 한다는 대의명분에선 일단 합의를 봤다. 그러나 지향하는 항로는 서로 달랐다. 친노 세력은 개혁중심 세력의 ‘노무현 신당’을 선호한 반면 반노·비노 세력은 자민련, 민국당, 정몽준 박근혜 의원, 이한동 전 국무총리 등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망라하는 통합 신당을 선호하고 있었다. 노후보는 신당이란 도도한 흐름을 거부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신당논의에 합류했다.

    그런데 당시 당내에는 노후보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었다. 노후보를 싫어하는 의원들이 들고 나온 논리가 ‘자질론’이었다. 노후보의 급진적인 이미지와 튀는 언행 등으로 인해 ‘대통령 감’으로 보긴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후단협의 주축멤버이자, 반노파의 선봉에 섰던 최명헌 의원 얘기를 들어보자. “어떻게 된 게 대통령 후보란 사람이 구두끈이 없는 막구두를 신을 수 있나. 거기에 발가락 양말이라니….”

    정균환 총무의 반감도 사소한 데서 출발했다. 정총무는 후보단일화 전 노무현이란 사람에 대한 느낌을 이렇게 나타낸 적이 있다. “경선이 끝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노후보한테 난데없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뜸 내게 ‘누가 이인제를 당에 데려왔습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 ‘네?’라고 반문했다. 노후보는 다시 한번 물었다. ‘누가 이인제를 데려왔느냐구요’라고.” 그러면서 정총무는 이런 말을 곁들였다. “무엇이든지 화합하고, 함께하려고 애써온 사람과 사사건건 충돌하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식의 사람과는 다르다.” 노후보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나, 상당한 반감의 표현인 셈이다.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후보단일화가 완성되기 전 후단협 소속으로 있다가 탈당, 한나라당에 입당한 강성구 의원은 탈당 전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명색이 언론사(MBC) 사장을 지낸 나다. 그런데 노후보는 언론대책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면 한 손으로 받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응도 없었다. 도저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작년 4월 대통령 후보가 된 뒤 당내 의원들과 개별적인 만남을 거의 갖지 않았다. 노대통령 측근들은 “자기 사람을 심고 계보를 만드는 구시대적 정치는 안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지만, 상당수 의원들에겐 “무조건 싫다”는 반응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게다가 노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세였고 회복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노후보가 탐탁치 않았던 반노·비노 의원들로선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 격’이 된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의 신당 추진은 반노 의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시작됐다.

    10월4일 반노·비노 의원들은 후단협을 구성했고, 11월4일엔 집단탈당을 감행하며 후보단일화를 요구했다. 노후보의 지지도가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상수 이호웅 이해찬 의원 등 친노 진영에서도 “일단 노후보에게 최선을 다하지만 안 되면 대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느냐”는 ‘선 노후보 지지, 후 후보단일화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후보단일화가 성공하면서 신당논의는 유야무야됐다.

    그러나 12월19일 대선 직후 신당론은 다시 용틀임을 재개했다. 12월23일 친노 의원 23명이 ‘당의 발전적 해체’와 ‘기득권 폐지’를 선언한 것. 당 권력구조를 바꾸기 위한 신당논의를 이제는 친노 쪽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노대통령의 후보시절 거의 유일한 지원세력이었던 천정배 의원은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후보를 흔들어대는 것 자체가 후보의 지지율을 떨어뜨린 요인이 됐다”며 “대표적으로 책임이 큰 분들이 책임을 지도록 범위를 최소화하는 게 좋다. 나머지 분들은 2004년 총선 등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심판받게 하면 된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대선 때 반노·비노 세력이었던 의원들이 즉각 반발했다. 후보단일화의 동력을 제공한 것은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노대통령이 후보단일화 카드를 수용해 후보단일화가 이뤄졌다고는 해도 탈당을 감내하면서까지 후보단일화를 압박한 것은 자신들이었고, 이 공은 인정돼야 한다는 논리였다.

    반노·비노 의원들은 “이대로 앉아서 죽을 순 없다”며 행동에 돌입했다. “말로만 개혁이지 친노파가 당권을 잡자는 얘기가 아니냐. 우리들을 다 솎아내겠다는 건데 그냥 죽을 줄 아느냐. 정당하게 물러나라면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한때 당권파가 많았던 반노·비노 의원들은 구주류, 당권에서 소외됐던 친노 의원들은 신주류가 돼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당으로서는 정권 재창출이었지만, 의원들에게는 역학구도의 재편이었던 것이다.

    요즘과 작년의 신당 논의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비슷한 점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선거의 완패가 직접적인 논의의 발단이 됐다. 신당 논의 시점이 작년엔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 직후, 이번엔 4·24 재보선 직후다. 여기엔 모두 ‘민주당 간판 가지곤 안 된다’는 절박감이 내재돼 있다.

    신당을 명분으로 당내 역학구도를 바꿔보려는 속셈도 똑같다. 두 차례 모두 스스로가 주체가 된 신당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권력을 잡아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전개 양상 또한 닮은꼴이다. 작년 신당은 백지신당이냐 통합신당이냐가 쟁점이었다. 요즘은 개혁신당이냐 통합신당이냐의 문제다. 백지신당과 개혁신당은 기존세력의 기득권 포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맥을 같이한다.

    차이점이라면 신당 추진세력이 바뀌었다는 점 정도다. 작년 신당론자들은 반노·비노파, 즉 요즘의 구주류였다. 반면 현재의 신당론자들은 친노파, 즉 신주류다. 그래서 신주류 의원들이 과연 작년 후단협 의원들처럼 탈당을 감행할 수 있는지가 관심사다.

    그러나 천정배 의원은 처음부터 “탈당은 없다”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가 탈레반이란 별칭까지 얻은 신주류 강경파란 점에서 천의원의 너무나도 분명한 탈당불가론은 진위논쟁까지 불렀다. 그러나 천의원은 “당 밖에 나간 뒤 뒷심이 실리지 않을 경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후단협의 교훈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구주류측은 후단협의 전례를 들어 신주류에게 탈당을 압박하고 있다. 신당은 당 밖에 나가서 하라는 논리다. 나가지 않고서 당내에서 민주당을 깨부수자는 것은 최악의 해당 행위라는 논리도 내세우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 탈당파 의원들과 당 외곽의 각종 개혁세력들은 신주류의 탈당을 요구, 신주류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신당을 둘러싼 신·구주류의 전쟁은 당내 권력구도뿐만 아니라 정치생명이 걸려 있다는 점에서 어느 쪽도 후퇴할 수 없다. 한 쪽이 이기면 다른 한 쪽은 지는 싸움인 만큼 양쪽 모두 배수진을 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신당의 성패를 가를 최대 변수는 누가 뭐래도 노대통령의 지지율과 호남 민심의 향배에 달려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도가 상승할 경우 신당 창당은 개혁을 기치로 시너지 효과를 얻을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창당 자체마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표를 안고 가느냐의 여부도 신당 성패의 관건이다. 신당 성패에 관계없이 단 10석이라도 하겠다는 식의 창당 자체에 목적을 둔다면 모를까, 신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신당의 상징적 리더가 될 노대통령의 지지율이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신당 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던 이유도 노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안팎으로 하락한 것과 관련이 있다. 노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할 경우 현재 신당 창당 작업에 동참하고 있는 현역 의원들조차 신당 대열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고 신주류측은 우려하고 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김성호 의원은 “노대통령의 지지율이 현재보다 더 떨어질 경우 아무리 대의 명분이 있더라도 신당의 추동력은 떨어질 것”이라며 “다만 최소한 현 수준만 유지해도 신당은 해볼 만하다”고 말했다. 김의원은 “노대통령에 대한 현 지지율은 거의 바닥 수준”이라면서 “철도노조 파업 수습 등을 통해 노대통령의 지지도가 완만하게 반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균열되느냐의 여부도 신당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신·구주류 대부분이 한목소리로 분당은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도 ‘분당=호남표 분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는 수도권에서 전통적 지지기반이 신당과 민주당으로 갈라질 경우 둘 다 공멸할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다만 호남표를 지나치게 의식해 민주당을 환골탈태시키지 못할 경우 호남표와 더불어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중 하나인 개혁성향 표가 이탈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신주류측의 강한 의욕만으로 볼 때 신당은 창당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내년 총선에서 개혁신당 대 현재 민주당 대결을 피할 수 없는 형국이다. 특히 호남 지역의 총선과정과 결과는 집토끼, 산토끼 논쟁을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민주당은 뭉치기에는 감정을 너무 다쳤고, 흩어지기엔 계산이 안 서는 형국에 처했다. 일각에선 민주당 안에서 자해행위를 계속할 것이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갈라서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도 나온다. 연대를 전제로 한 분당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민주당은 과연 깨질까. 정계개편은 현실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알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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