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대북비밀송금 수사한 송두환 특검

“돈세탁 솜씨 뛰어나 150억 종착역 못 밝혔다”

  • 글: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입력2003-07-28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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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J, 위법행위 개입 파악 못해 조사 안했다
    • 수사팀 사이에 ‘대가’표현 둘러싸고 논쟁
    • 150억원 발견 전혀 예상치 못한 것
    • 대북송금 의혹, 초기에 잘 대처했어야
    • 특검에 대한 언론 오보 너무 많았다
    대북비밀송금 수사한 송두환 특검

    宋 斗 煥<br>● 1945년 충북 영동 출생<br>● 경기고·서울대 법과대학 졸업<br>● 사시합격·사법연수원 12기<br>● 서울민사지법·형사지법판사<br>● 민변회장 역임<br>● (현)법무법인 한결 대표 변호사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비밀송금 특별검사의 활동시한 연장 신청을 허가하지 않는 바람에 수사가 중단됐으나 막바지에 드러난 ‘150억원+α’에 대한 진상규명 방법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박지원(朴智元)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대그룹에서 받았다는 150억원의 종착역이 밝혀지면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 일대 파란이 일 전망이다.

    송두환(宋斗煥) 특별검사팀은 70일 동안의 수사를 마무리짓고 해단식을 가졌지만 3심 재판절차가 끝날 때까지 공소유지를 하는 검사로서 법정에서 피고인의 쟁쟁한 변호인들과 공방을 벌여야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북정책에 참여한 핵심 인사들에 대한 첫 공판이 열린 다음날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해암빌딩 특별검사 사무실에서 송특검을 만났다.

    송특검은 처음에는 인터뷰 제의를 사절했다.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한쪽 당사자인 특별검사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고, 한마디 할 때마다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 것이 곤혹스럽다는 이유였다. 필자는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고, 영어 표현 그대로 ‘뉴트럴(neutral 중립적)’한 입장에서 인터뷰를 하겠다고 설득해 마침내 ‘며칠 생각해보고 나서 다시 통화하자’는 언질을 받아냈다.

    해단식이 있던 날 오후 특검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송특검이 해단식을 마치고 나서 허전한 기분과 함께 미처 못 다한 말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끼리라고 기대하면서.



    송특검은 특검팀의 공보관 역할을 한 김종훈(金宗勳) 특검보에게 필자에 대해 알아보니 “내 말을 멋대로 왜곡할 사람이 아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인터뷰를 수락했다.

    -어제(7월4일) 첫 공판이 열렸는데 앞으로 재판 일정이 어떻게 진행됩니까.

    “일부 변호인들이 수사기록을 늦게 받아 준비가 덜 됐다고 해 공판이 예상보다 일찍 끝났습니다. 일반 사건은 형사소송법에 의해 1심 6개월, 2심 4개월, 3심 4개월이지만 우리 사건은 특검법상 1심 3개월, 2심 2개월, 3심 2개월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으로 진행됩니다. 2주 간격으로 공판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피고인에 따라서는 특검팀이 제출한 증거에 동의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기간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수사결과에 대해서 자평해본다면 어떻습니까.

    “특검법 제2조 4호에 대북비밀송금과 관련된 청와대 국정원 금감원 등의 비리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를 하게 돼 있거든요. 법에 따라 그 부분에 대한 조사를 해나가려고 계획을 잡았는데 못했습니다.

    사건 전체의 성격을 규명하고 거기에 비추어 송금된 돈의 대가성 여부에 관해서도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설명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부분을 서둘러 정리한 점이 아쉽습니다.

    수사 시작부터 종료까지 주어졌던 여건 내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고 자부합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우리들이 몰랐던 다른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지만요….”

    -수사발표문에서 ‘5억달러 중 현물지원분 5000만달러를 제외한 4억5000만 달러와 정상회담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애매한 표현을 썼던데요.

    “남북정상회담을 사고 팔았고 한 발 더 나아가 노벨상을 받기 위한 공작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있었지 않습니까. 이러한 의혹과 논란은 정치권과 일반 국민 사이에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특별법에는 이러한 국론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송금의 대가성 여부를 밝히라는 취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법은 한번 제정되고 나면 법 제안자가 어떤 주관과 의도, 정치적 동기를 갖고 있었든 간에 이를 벗어나 법 자체의 취지나 논리로 객관적으로 해석돼야 됩니다.

    대가성을 따지는 것은 실로 미묘한 문제입니다. 개개인의 가치판단 또는 정치적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거든요. 특별검사팀도 미리부터 똑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돼 의견 통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대가성 규정을 놓고 벌어졌던 특검팀 내의 논란에 관해서 자세히 말해줄 수 있나요.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대가라는 뜻을 한 가지로 풀이해놓았지만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해, 대화가 왠지 약간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상호간에 서로 일정 정도 연관성이 있으면 그것은 대가라고 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사고 팔았다는 의미로 대북 송금의 대가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상호 연관성의 정도를 넘어 부정적인 뜻이 내포돼 있습니다. 말하자면 중립적인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수사결과 ‘대가였다’ 또는 ‘대가가 아니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전혀 연관성이 없다고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연관성이 없지 않다는 것이 바로 대가라는 뜻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정상회담을 사고 팔았다고 분개하는 쪽에서 말하는 대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대가라는 용어가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봐서 수사결과 발표에서 대가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피했던 것이지요.”

    -정책적 차원의 대북 지원금 1억달러를 구분해 발표하지 말자는 논의가 수사팀 안에서 있었다면서요.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과 대북송금이 어떠한 배경과 동기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도 이 공소사실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법원에서 총체적인 평가와 양형을 하자면 대출과 송금에 관여한 사람들이 어떤 인식을 갖고 행동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1억달러의 성격에 대해서는 공소장에 넣지 않았습니다. 법원이 수사기록을 통해 파악하면 족할 테니까요.

    정부 부담 몫이 1억달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거나 분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부 부담 몫이 5억달러라고 판단했던 사람들은 1억달러 정도로 밝혀졌다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본래 수사한 대로 발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억달러 부분, 공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특검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 무더웠다. 송특검은 담배갑을 꺼내 필자에게 권했다. 필자가 “안 핍니다”고 사양하자 그는 “저는 좀 피겠습니다”라며 담배를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 담배가 몸에는 해롭지만 기억을 떠올리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효과가 있으리라.

    “우리가 수사기록을 법원에 재판 증거자료로 제출하게 되면 피고인 또는 변호인들은 열람 등사(복사)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결국 법정에서 공개하게 돼 있습니다. 비밀로 분류해 30∼40년 후에나 공개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봤지만 실제로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한시적 기구인 특검이 수사기록을 영구히 보관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법원이 열람 복사를 제한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1억달러, 4억달러 같은 부분이 공개되는 것을 피할 수 없지요. 결국은 시간 문제입니다. 다만 북쪽에서 관여했던 인물들의 실명 표기, 예금계좌의 번호, 예금주 명칭 같은 것은 수사기록에서 기술적으로 처리해 일반에게 공개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는 열람 복사를 적절히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법원에 건의했습니다.

    1억달러가 정상회담을 사고 팔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정책적 차원에서 대북 지원금이라는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국민의 통일관이나 남북 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 그 정도는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남북관계가 한 단계 진전되리라는 생각에서 발표를 한 것입니다.”

    -법원에 실제로 피고인과 변호인의 열람 복사를 제한해달라고 요청한 부분이 있습니까. 부담이 된다면 내용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부 수사기록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인들의 열람과 복사를 적절히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해주기 바란다는 뜻을 재판부에 전달했습니다.”

    -북쪽에 관계된 내용이겠군요.

    “이 사건 전체가 다 북쪽하고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공표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단한 내용이 있는 것처럼 오해할까봐 하는 얘기인데, 그렇게 엄청나고 충격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법원이 피고인과 변호인의 열람 복사를 제한할 근거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의 희망일 뿐 법원에서 실제로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상선 김충식(金忠植) 전 사장이 산업은행 대출금에 대해 현대가 갚을 돈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대북송금이 알려졌는데요. 1억달러 부분은 특별검사의 수사결과 정책지원금으로 결론이 났으니 현대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 돌려받을 수 있겠군요.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내가 ‘받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아닐 것 같다’ 이런 의견을 얘기하면 안 되지요. 현대가 그런 소송을 낼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법원에서 판단할 사안입니다.”

    -정몽헌(鄭夢憲) 현대 아산 이사회 회장을 통해 북한에 특검수사가 남북관계를 훼손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있던데요. 메시지를 보낸 형식과 경위가 궁급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내가 다짐을 받아둘 게 있어요.”

    대북비밀송금 수사한 송두환 특검

    황호택 논설위원(왼쪽)과 대담하는 송두환 특검

    송특검은 이 대목에서 “인터뷰 약속시간 한 시간 반 전에 사무실에 나와 이것저것 생각하고 고민했다”며 “인터뷰 기사 원고가 완성되면 인쇄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언론사 고문변호사를 지낸 김종훈 특검보의 자문을 받은 것 같았다.

    김특검보는 인터뷰가 성사되는 데도 도움을 주었지만 인터뷰 원고를 사전에 볼 수 있는 방법까지 자문해준 모양이다. 필자는 “원고를 사전에 보여주는 조건으로 인터뷰가 성사됐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보여달라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는다”며 “나를 믿고 인터뷰를 그냥 진행하자”고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중간에 이런 제의를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송특검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 조건을 걸려다가 경황이 없어 말을 못했는데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인터뷰를 못하겠다”며 강하게 나왔다. 그는 “특별검사로서 인터뷰를 하고 난 뒤 자신의 이야기가 충분히 잘 전달됐다고 느낀 적이 열 번에 한두 번밖에 되지 않았다”며 “내가 한 말을 매체 또는 기자의 성향에 따라 입맛대로 재단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원고를 미리 보더라도 무리한 부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계속하자면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었다. 필자는 “쓰는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 원고 내용을 바꾸어달라는 말은 되도록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달아 수용했다.

    -특검이 북한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중단이 됐습니다.

    “보도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특검 수사가 남북관계의 장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수사관이 당사자들을 조사하다 보면 남북관계에 대해 이런 저런 소견을 더러 얘기하게 됩니다.

    우리 수사팀 중 한 사람이 방북을 앞둔 정회장을 조사 도중 우리도 남북관계를 손상시킬 뜻이 없다는 것을 당신도 이해해주고 북쪽에서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겁니다. 짐작을 보태 이야기하면 정회장이 방북하기 전에 여기 와서 조사를 받았으니까 북쪽에 갔을 때 특검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큰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라는 등 대화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회장은 느낀 대로 뭔가 얘기했겠지요.”

    우리 사회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법조계는 일반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편이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노무현 정부와 비교적 코드가 맞는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칭점에 있는 단체가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이다.

    민변 공식 입장은 진상규명

    노무현 정부 출범 후 민변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강금실(姜錦實) 법무부장관, 문재인(文在寅) 민정수석, 박주현(朴珠賢) 국민참여수석이 민변 출신이다. 청와대 비서관에도 민변 출신이 5명이나 된다.

    민변은 1980년대 후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변호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돼 지금은 회원수가 390명에 이른다. 송두환 특검과 김종훈(金宗勳) 특검보도 민변 출신이다.

    -민변은 아무래도 김대중 정부의 화해협력 정책을 지지하는 쪽에 가깝지 않았습니까. 민변 내부에서 특검 수사가 너무 나간다는 비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민변 회원 중에는 그런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답니다. 민변에서 공식적으로 한 적은 없고….

    민변의 공식적인 입장은 검찰 수사 혹은 국회 국정감사 등을 통해 진상이 규명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잘 안 되면 특별검사를 통해서라도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 민변 성명서에 나오는 공식 입장입니다. 민변 회원들 사이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민변의 공식적인 견해는 내 개인적인 입장과 일치했습니다.

    나도 특별검사까지 오지 않고 그 이전에 다른 경로를 통해 적정한 해법이 찾아졌으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사를 하게 되면 어떤 결과와 맞닥뜨리게 될지 예측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건의 진상규명을 성실하게 해놓지 않으면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국민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양쪽이 첨예하게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합니다. 다만 양쪽 모두 수긍할 수는 있는 정도의 결과를 내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팀을 짜는 데도 상당히 고심했습니다. 하여튼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수사는 다 한다’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일각에서는 관련자 모두를 초강경한 입장에서 대량 구속하고 샅샅이 들춰놔 남북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한테 여러 가지로 우려하는 얘기가 전달됐습니다.

    수사 자체는 열심히 하되 결과가 나오면 발표와 사법처리는 신중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마 우리의 초반 행보를 보고 불안과 우려를 가졌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DJ 조사와 관련해 미진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일부 있겠지만 수사 기간과 범위에 제약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혹시 대통령과 법무부장관·민정수석이 민변이고 송특검도 민변회장을 지냈으니까 햇볕정책을 손상시키지 않고 현 정부의 코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사를 한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까.

    “직접적으로 비난받은 적은 없었죠.”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적은 있나요.

    “우리 수사가 끝나자 한나라당에서 수사에 일부 미진함이 있다며 재특검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 외에 다른 비난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별로 듣지 못했습니다.”

    -첫 공판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송금의 불법성을 사전에 보고받고서 사실상 묵인하는 이야기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더군요. DJ에 대해서 서면조사라도 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역시 주로 그 쪽에 관심이 많으시구나.”

    송특검은 김 전 대통령 조사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필자의 인식이 어느 쪽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표출했다. 송특검에게 “어떤 편견을 갖고 묻는 것은 아니니까 질문이 마음에 안들면 ‘노 코멘트’해도 좋고 원한다면 질문이 아예 없었던 것으로 정리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수사과정에서 박지원(朴智元) 임동원(林東源) 이기호(李起浩)씨의 진술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을 알고 있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위법행위에 개입했다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해 조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사결과 발표문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이다.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현대측으로부터 150억원을 받은 일이 없다고 부인하더군요. 박씨의 측근 중에서는 심지어 이익치 현대증권 전 회장의 배달사고 가능성까지 제기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습니까.

    “150억원은 우리들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는데 튀어나온 것입니다. 자금의 조성 또는 이동 경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150억원을 발견하고 시기와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춰 특검 수사대상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익치(李益治)씨를 포함해 관련자들의 진술이 상호 부합됩니다. 상당히 치밀하게 돈세탁이 됐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범죄사실을 인지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할 만한 범죄의 소명은 됐습니다. 소명은 아직 증명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단계입니다. 수사기간이 연장돼 150억원이 어떻게 처리됐는지를 파악했다면, 주었다는 쪽과 안 받았다는 쪽의 진술 중에 어느 쪽이 더 믿을만한지 가릴 증거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수사기한 종결로 그 부분에 대한 추가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현금으로만 움직였다면 당사자들의 진술만 가지고 법원에서 유죄 무죄를 따져야 하겠지만, 양도성 예금증서(CD)가 예금계좌에 들어갔다가 다시 채권으로 바뀌는 돈세탁을 거쳤습니다. 우리가 성급하게 기소를 해버리면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면죄부를 쥐어줄 가능성이 있고 또 공소시효에도 충분히 여유가 있어 다른 기관에 의해 수사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기소하지 않았습니다.

    이 수사를 해나가다 보니 아주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김영완(金榮浣) 임태수씨 같은 핵심 인물이 비슷한 시점에 전부 출국해 장기간 해외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사람들의 진술을 확보해야 탄탄한 보강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금의 종착역은 어디입니까. 자금추적을 하다가 중단이 됐지만 그래도 짚이는 곳이라도 있는지….

    “통상 한두 번 거치는 단순한 세탁이었으면 우리 선에서 수사가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금 세탁이 전문가 수준으로 치밀하고 여러 단계를 거쳤습니다. 특검팀에도 일류급 자금추적 전문가들이 와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도 고수들의 돈세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의 종착역을 밝히지 못한 중간 단계에서 멈췄습니다.

    우리 수사는 종착역을 찾아내 그곳을 문제삼고자 하는 수사가 아니었습니다. ‘돈 주었다’ ‘안 받았다’는 상반된 진술 가운데 어느 말이 옳으냐 하는 것을 판단하는 자료로 삼기 위한 수사였습니다.”

    -돈을 받은 시점이 2000년 4·13총선 전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150억원이 총선자금으로 흘러간 것인가요.

    “직접적인 총선 자금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중간에 추적을 그만둬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언론에서 150억원과 별도로 250억원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부분은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 만큼 확인된 게 없습니다.”

    -김영완씨 집 강도 사건은 특검 수사와 연관성이 깊지 않은가요. 150억원을 돈 세탁했던 인물이니까. 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영완씨가 5공 때부터 무기중개상을 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박지원씨와는 언제부터 알았고 무슨 일을 해줬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추측으로 얘기할 수도 없는 성질이고….”

    -5억달러 가운데 5000만달러는 현물로 인도됐다고 했는데 5000만달러(600억원)를 정치적으로 빼돌려 전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50억원도 600억원의 일부 아니냐는 관점도 있구요.

    “그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수사 과정에서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현대가 5억달러를 조성해놓고 4억5000만달러만 송금했다면 5000만달러의 전용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지만, 현대 실제로 4억5000만달러만 조성했거든요. 현대가 북한과 교섭할 때 정주영 체육관 건립 기금 등을 감안해 4억5000만달러만 받으라고 해 북한과 합의가 됐다는 것입니다. 여러 관계자의 진술이 일치했습니다.”

    -흔히 남북 대화가 투명하게 진행돼야 한다고 하지만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될 부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수사해본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투명하고 공개된 절차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원칙이겠지요. 다만 남북관계의 특성에 비춰 공개리에 다루기 어려운 사정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경우에도 제한된 성격의 공론화 절차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정치권에서 야당의 수뇌부와 협의해 양해를 구한다든가, 아니면 국회 통일외교 특위 같은 데로 범위를 좁혀 비공개 보고를 하고 협의할 수도 있었겠지요.”

    김보현 국정원 3차장에 대한 고려

    대북비밀송금 수사한 송두환 특검

    6월25일 대북송금 의혹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박광빈 특검보와 송두환 특검, 김종훈 특검보(왼쪽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내내 햇볕정책을 줄기차게 밀고 나갔고 대통령의 참모들은 그 정책을 보좌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표현이 조금 이상한 감이 있지만 ‘하수인’에 불과한 사람들을 구속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 하는 관점이 존재합니다. 이기호 전 경제수석비서관의 경우는 초기에 특검수사에 협조를 하지 않아 괘씸죄에 걸렸다는 이야기도 있구요.

    “재판이 진행중이기 때문에 내가 충분히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항용 ‘구속은 곧 형벌’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형사소송법상 구속 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증거인멸 또는 도주의 염려거든요. 증거인멸의 우려 때문에 구속영장을 청구한 측면이 있습니다.”

    -특검팀 수사관들은 박지원씨 조사를 마치고 구치소로 보내기 앞서 폭탄주를 함께 마셨다지요. 이 방에서 마셨나요.

    “이 방에서 내가 마신 게 아닙니다. 수사관들이 피조사자하고 장시간 부딪치면서 문답을 하다 보면 인간적인 교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지요. 밤 늦게까지 조사를 해야 하니까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주문할 때 소주도 한 병 같이 올려보내달라고 해서 권하기도 합니다. 수사한다고 항상 눈 부릅뜨고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비록 신분은 조사자와 피조사자로 나눠져 있지만 서로의 입장과 고충을 이해하고 있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소주 한 잔 권하는 것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영장이 청구돼 착잡한 사람의 심정을 위로할 겸 한잔한 거라고 봐야겠지요.”

    -특검이 출범하고 나서 노대통령과 3당 대표가 4월17일 청남대에서 만나 특검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해놓고 몇 번 재협상하다가 흐지부지됐습니다. 노대통령과 3당 대표의 합의가 특검수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여야 사이에 그런 논의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처음 한번은 북으로 송금된 이후의 사정은 수사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의미한 부분이었지요. 북으로 넘어간 이후의 사태는 수사할 방법이 없어요.

    청남대에서 합의한 대로 수사와 관련한 세부적인 기준이 만들어졌으면 우리가 고민할 몫이 줄어들었겠지요. 그런데 정치권에서 계속 발등에 불이 떨어져 그런지 그 부분 논의가 슬그머니 실종됐습니다. 국민이 같은 염려를 하고 있으니 정치권에서 그런 논의가 나온 거라고 봐서 정치권에서 논의됐던 정신을 존중했습니다.”

    -김보현(金保鉉) 국정원 3차장은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이기호 이근영(李瑾榮)씨보다 더 깊숙이 개입한 사람인데 대북 채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기소하지 않았다는 추측이 나오는데….

    “재판의 대상이 된 분들과 직접 비교해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건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관점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행위의 위법성이나 가벌성을 평가할 때는 조금 다릅니다. 문제가 된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었고 그 사람의 본래 직분은 뭐였으며 그 사람이 당시에 인식한 사실관계에 비추어 어떤 역할을 해야 될 임무가 있는데 그 임무를 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따지게 됩니다. 그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특검은 의미 있는 제도

    -수사팀 구성이 다양했습니다. 민변 출신도 있고 현직 검사들도 있었습니다. 파견검사들이 수사범위와 처벌 수위에서 좀더 강경한 입장이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렇게 짐작이 될 수 있겠지요. 경험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한 팀이 돼서 일을 하게 됐으니까 생각이 다양했지요. 처음에는 상호간에 토론할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초기에 파견검사들은 수사에 열심이었고 민변 쪽 변호사들은 주로 남북문제, 그리고 남북경협 사업의 진행과정, 정상회담의 의미, 경협사업의 바람직한 방향 등에 관해 기본적인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치중했습니다. 중반부터는 양쪽 작업이 통합되었습니다. 수사가 연장됐더라면 더 많은 토론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의 지퍼게이트 이후 특검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네 번째 특검이 발동되고 이번에 다시 새 특검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검찰이라는 조직이 있는데도 특검법이 거푸 제정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요. 검찰이 신뢰를 받지 못하는 측면도 있고 야당의 정치공세적 성격도 있습니다만….

    “특별검사로서 일해본 경험 때문에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기가 거북한데, 아무튼 특별검사제도는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검찰 조직에 대해 기본적인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검찰에서 처리되는 것이 기본 원칙입니다.

    그러나 몇몇 사건에서 검찰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성이 짙거나 검찰 고위층이 관련됐다는 의혹이 있는 사건은 특별검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 때문에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항구적인 제도는 아닙니다.

    특검이 네 번째 발동됐는데 일단 제한된 기간에 소수의 인력으로 성과를 거뒀습니다. 미국 특별검사 제도하고 똑같은 시각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국 특별검사의 활동기간은 2~3년 이상이고 또 그만큼 천문학적인 예산을 씁니다. 그렇게 장기 수사를 하고서도 국민이 흡족할 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산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고 국민의 염증이 생겨, 지금은 특검법이 일단 종료된 뒤 다시 논의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한국과 직접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미국에서 스타 검사가 공화당 쪽에 가까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탄핵할 거리를 찾기 위해 돈을 물 쓰듯 하며 수사를 했지만 실제 소득은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스타 검사는 미국에서 특검이 사라지게 하는 데 일조를 한 셈이지요. 한국과 미국 특검의 예산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아요. 송 특검팀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얼마나 썼습니까.

    “공개되고 나서 반응이 좋을지 모르겠네요.”

    -어차피 공개될 거 아닙니까.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해야 하잖아요.

    “사실 기밀은 아니죠. 내 입으로 언론에 공개하면 경솔하게 그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국회에서 어차피 알려질 건데….

    “당초 책정된 예산은 10억원이 조금 넘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출한 예산은 거기에 조금 못 미칩니다.”

    특검 수사가 진행되는 70일 동안 언론에는 특검 기사가 연일 대서특필됐다. 특검 사무실이 있는 강남구 대치동 해암빌딩 1층 기자실에는 100여 명의 기자가 상주하며 취재를 했다. 김종훈 특검보가 하루 두 차례 공식 브리핑을 했는데 언론보도에 대한 특검의 평가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아까 마음에 드는 보도가 열 번에 한두 번이라고 말했는데요. 그 정도로 언론 보도에 불만이 많았습니까.

    “부분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오류가 더 많았습니다. 기사는 비교적 내가 말한 것에 가까웠는데 제목은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인지 기사내용과 배치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기사를 꼼꼼하게 읽거나 언론 특성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일반 독자들은 오해하기 쉽지요.

    기자들은 오보가 나가면 데스크들한테 책임을 미루던데 진짜로 데스크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기자들이 항의를 받을 때마다 쓰는 방어수법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조사를 받고 나오는 사람들이나 엘리베이터 앞에서 수사관에게 한두 마디 들은 얘기에다 추측을 섞어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사소한 오류까지 포함하면 한이 없지요.”

    -오보는 전쟁을 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지만 기자들에게도 어려움이 있어요. 마감시간에 쫓기고 수사팀이 보안을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에 취재의 한계에 부딪히고…. 기사의 큰 줄거리가 맞다면 부분적인 오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런 것은 이해합니다. 언론이 생래적으로 속보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속성은 이해하고 있어요. 한발 더 나아가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주려는 취재보도 활동의 의미도 인정합니다. 우리가 수사 기밀을 다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수사의 기본적인 진행상황에 관해서는 기자들에게 당연히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오전 오후 정례 브리핑을 했습니다. 그런데 과열경쟁에서 오는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기자들이 참 고생하며 열심히 하더군요. 매일 새벽부터 나와 밤늦게까지 취재하고. 심지어 어떤 기자는 실신한 일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기자들도 약간 차이가 있더군요. 어떤 기자들은 명백하게 우리가 발표한 것이나 명확하게 밝혀진 것만 갖고 기사를 썼습니다. 짐작으로 앞질러 예단(豫斷)하는 보도를 안하는 거죠. 반면 어떤 기자들은 끈질기게 묻다가 누가 불쑥 한마디 하면 그것을 적당히 가공해서 씁디다.”

    -민변 회장할 때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부회장을 했더군요. 특검에 관한 강장관의 견해가 특검 출범 전과 후에 달라지던데요.

    “강장관의 견해를 나한테 묻는 것은 이상합니다.”

    -노대통령과 함께 만났을 때 의논을 했으니까….

    “내가 강장관의 생각을 대변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처음에는 강장관이 특검법 공포에 관해 거부권을 행사해야 된다고 주장했지요. 특검 수사가 진행될 경우 남북관계가 훼손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을 우려해서였겠지요. 그런데 특검이 발족된 후에는 기간 연장을 해주는 게 옳다는 입장이었어요. 특검법이 공포된 이상 특검팀이 수사상 연장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1차로 30일 정도 연장해 미진했던 부분에 대해 말끔히 수사를 마무리할 수 있다면 해줘야 한다는 의견이었죠. 그 후에 보는 바와 같이 재특검 논쟁이라든지 150억원 수사를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잖아요.”

    -민변 활동을 하며 두 분이 가깝게 지냈겠군요.

    “달리 특별한 교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민변에서 회무(會務)를 같이 상의하는 과정에서 의견교환할 기회가 있었지요. 신문지면이나 강장관에 대한 여러 가지 평을 읽고 잘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법조인으로서, 민변 회원으로서 활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겼던 경험이 법무부 장관으로서 업무를 해나가는 데 좋은 토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민변은 정의감 있는 변호사들 모임

    송특검과의 인터뷰는 무려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송특검의 말이 조금 느린 편인데다 준비해간 질문을 모두 묻고 대답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송특검은 인터뷰 시간이 길어지자 “의자 위에 양반다리로 앉고 싶다”며 양해를 구했다.

    “온돌방에서 양반 다리 하고 앉아 있으면 괜찮은데 의자에 장시간 이렇게 앉아 있으면 불편해요.”

    -민변에 가입해 회장까지 지냈는데요. 민변에 가입한 동기에 대해 말해줄 수 있습니까. 노대통령을 비롯해 참여정부에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민변 출신이 많습니다. 민변에서 활동하는 변호사들의 생각이 어떤지 궁금해요.

    “일부 민변 회원들이 정치권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지만 이는 민변 회원들이 지향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약간 예외입니다. 우리 민변은 단순화해서 얘기하면, 정의감 있고 비판정신이 있는 변호사들의 모임입니다. 남들이 잘 돌아보지 않는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법조인들입니다.

    1990년 법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학교 시절, 그리고 판사로 있을 때 나를 관찰했던 후배들이 기대하고 있었던지 민변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나도 민변 활동을 지켜보면서 학창 시절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참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송특검께서 1982년 서울지법 북부지원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해 1990년 그만둘 때까지 우리 사회는 민주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시기였습니다.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 구속된 학생들이 재판을 거부하고 ‘어용판사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는 법정소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 학생 사건의 형사재판을 맡은 적이 있습니까.

    “결론을 먼저 얘기하면 시국사건으로 불릴 만한 사건을 담당할 기회가 없었어요. 1988년 서울형사지법에서 단독판사를 하면서 데모 학생들을 재판해본 적은 있는데 6·29 이후입니다. 마지막에 형사법원 수석부에서 배석판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 가기 직전에 임수경 학생과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을 재판했더군요. 큰 사건을 재판하느라 미제사건이 산적해 뒤치다꺼리하느라 바빴습니다.”

    -법관을 하면서 사형선고를 내려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흉악무도한 살인 강도범 재판을 맡아본 일은요.

    “무기징역을 할 것이냐, 사형을 할 것이냐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토론해본 사건이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죄목은 뭐였습니까.

    “강도살인이었죠. 합의 재판부에서 내가 주심 판사였습니다. 첫 번에 합의가 안 돼서 일주일 뒤에 다시 합의를 하고 또 그때도 합의가 안 돼 세 번 만에 합의를 해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그때 어느 쪽 의견을 냈습니까.

    “그런 얘기 해도 되나 모르겠습니다.”

    판결문은 공개되지만 법관들의 합의내용에 관해서는 비밀에 부쳐진다.

    확고한 사형제 폐지론자는 아니지만…

    -법 철학에 관해 알고 싶어서요.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합의 당시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즘 더디기는 하지만 사형을 폐지하자는 쪽으로 여론이 이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제엠네스티와 국제인권연맹, 가톨릭 평신도 단체인 산체지디오 등으로 구성된 사형반대 국제연대가 11월 30일을 사형반대의 날로 정하고 칠레 터키 등의 국가가 사형제도를 폐지했다. 그러나 사형집행 건수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사형집행 건수의 90%가 중국 미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루어졌다. 타이 예멘 북한 등 일부 국가에서는 공개처형도 실시한다.

    -흉악범이 많은 나라에서는 사형제도 존속 여론이 높은 편이에요. 예를 들면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은 텍사스 주지사 시절 무려 153명 죄수의 사형집행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인기에 영합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서 될수록 이런 얘기는 안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답변을 거부할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나는 확고한 사형폐지론자는 아니지만 폐지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에 신문 사회면을 완전히 도배할 만한 충격적인 사건들이 있었잖아요. 이름을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막가파랄지 지존파랄지…. 사형폐지 쪽으로 기울다가 그런 사건을 생각하면 확신을 못 가지는 거죠.

    내가 주심으로 맡았던 사건은 격분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아주 계획적이고 흉악한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아주 나쁜 정상이 여러 개가 뭉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장환경과 피해자와의 관계 등을 보면 과연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지울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나쁜 정상과 좋은 정상이 함께 있었어요.

    나는 합의를 하면서 확고한 사형폐지론자는 아니지만 사형폐지론자들이 주장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감안해 사형은 극히 제한적으로 선택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반드시 사형으로만 단죄해야 된다고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반대 주장도 만만치 않아 토론이 오래 끌었습니다.

    우리의 행형 실태에 문제가 있어요. 국경일 특사, 대통령 취임 경축 특사 또는 행형성적 우수자에 대한 감형·가석방 등을 하다 보면 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해봤자 어떤 경우에는 11~12년 지나면 길거리를 걸어다니게 됩니다. 잔인무도한 흉악범이 12년 정도 후에 시치미를 떼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그게 과연 타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사형시키자는 쪽의 주장을 나도 어느 정도 이해하겠어요. 그래서 논쟁이 길어지고 치열하게 토론을 했지요.”

    동기보다 9년 늦게 사시 합격

    송특검은 1971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나 고시에는 8년 뒤인 1980년에 합격했다. 그는 재학 시절 고시공부를 하는 대신에 경기고 서울대 법대 2년 선배인 고 조영래 변호사가 이끄는 사회법학회에서 활동했다. 대학 졸업하고 5년간 공군장교 생활을 한 후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사법시험 22회에 합격했으니까 서울대 법대 동기생인 송광수 검찰총장(13회)보다 무려 9년 늦은 셈이다.

    -법원을 일찍 떠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부모님은 내가 법과대학 들어갈 때부터 ‘고시공부 열심히 해 법조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학교 졸업하자마자 공군장교를 지원해 훈련기간 5개월에 임관 후 4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니 벌써 노총각이 돼버렸어요. 동기 가운데 군대 안 가고 일찍 사회에 진출한 친구는 대기업의 전무 부사장이 됐는데, 일반 기업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하기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실은 언론사를 지망할 생각이 있었습니다. 1975년이었지요. 일부 메이저 신문사에서 해직사태가 생겼고 군대에서 몇 년 쉬다 보니까 ‘언론고시’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노동법 전공으로 입학 등록을 해놓고 군입대를 했습니다. 1976년 봄 대학원에 복학하려고 했더니 등록금을 다시 내라고 해요. 나는 인상분 차액만 내겠다고 주장했더니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신림동에 새 캠퍼스가 엄청나게 크게 들어앉아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될지도 몰라 대학원 복학을 포기하고 고시공부를 시작한 거죠.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연후에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천천히 생각해나가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니까 졸업과 동시에 시험에 합격해 막바로 들어온 후배들하고 9년 차이가 나는 거예요. 판사 생활도 당초 생각보다는 오래 있었던 겁니다. 보람도 있었고 적성에도 어느 정도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활동력이 왕성할 때 변호사로 나가기 위해 법원을 떠났습니다. 평범한 이유입니다.”

    -다시 특검 이야기를 조금 더해보지요. 특검시한 연장허가를 신청해놓고 노대통령과 만난 것에 대해 한나라당이 비판을 하더군요.

    “대통령이 서면에 나오는 신청 사유를 검토해 결정했더라면 가장 좋았겠지요. 그러나 임명권과 수사시한 연장허가권을 가진 대통령이 직접 만나 보충 설명을 듣고자 하니 갔던 거죠. 특검법에 보고의 형식을 서면 혹은 대면으로 명시하고 있지 않거든요.”

    남북 화해는 옳은 방향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에 대해서는 양극의 평가가 있습니다. 뇌물 주고 정상회담을 사서 노벨상 받았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쪽도 있고 남북간에 화해협력의 길을 열어놓은 것은 민족사적 진전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합니다. 이 사건을 수사했으니 묻는건데 DJ의 대북정책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는 남북화해협력 정책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급하게 서두를 일은 아니지만 민족적 당위를 생각하면 남북간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해, 언젠가는 하나로 합쳐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시킨 것을 비난할 국민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얘기로 논란 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남과 북 사이에 상당한 국력 차이가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아주 치열한 싸움을 해서 칼부림을 했다고 해봅시다. 피차 극도로 원망하고 서로 분노하며 헤어져 연락도 끊고 수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형제가 평생 이러고 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용단을 내려 형이 동생 집을 방문했다고 합시다. 동생은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고 형은 상당한 정도의 부를 축적해서 여유가 있습니다. 집안 살림에 비춰 별 무리가 안 되는 정도라면 형이 동생 집에 갈 때 봉투 하나 들고 가서 도와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옳다 그르다를 떠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것을 비밀리에 처리하려고 했던 데서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변명하기 어려운 비리가 생겼습니다.

    국민 전체에게 공개하고 동의를 구하자면 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염려를 했겠지요. 분란을 단기간에 극복할 자신감이 부족했다고 생각되는 측면이 있지만 좀더 바람직스러운 방향은 다소간의 혼란, 약간의 논쟁을 감수하고서라도 반대하는 쪽을 성의 있게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합니다.

    대북송금 의혹이 정치권에서 최초로 불거져나왔을 때라도 사정을 진실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널리 이해를 구했더라면 조기에 사태가 해결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아마 남북관계가 한 단계 더 진전해나갈 수도 있었을 거고요. 그 점이 안타깝습니다.”

    -수사기간 중에 가장 어려웠던 대목에 대해….

    “특검 수사를 바라보는 양쪽의 시각이 너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어서 무척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단 수사를 성실하게 하고 난 후 성격을 규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수사결과가 미처 나오기도 전에 이 사건의 성격을 단정해놓고 여러 가지 걱정과 염려를 제기하면서 특검 수사 중단, 특검팀 해체 같은 주장이 튀어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대해 즉각 대응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상반된 입장의 사람들이 양쪽에서 공격해 심적으로 괴로웠습니다. 언론에서 미리 선입견이나 예단을 가지고 앞질러가는 기사를 썼을 때도 일일이 해명할 수 없어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1억달러, 4억달러라서 ‘일사회’ 구성

    -특검팀 해단식을 하면서 ‘일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지요.

    “수사를 하면서 특검팀 구성원들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애정과 신뢰를 쌓였습니다. 그래서 수사팀이 해체되고 난 이후에도 가끔 만나기로 했지요. 수사에서 가장 고심한 문제가 1억달러와 4억달러의 성격규정이어서 ‘일사회’라고 한 것이죠. 이걸 한글로 써놓으면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송특검은 특검사무실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강남구 대치동 우성아파트에서 노모(76)를 모시고 산다. 부인 정복영(48)씨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특검 수사 과정에서 마음 아파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말은 자르지 말고 꼭 써주었으면 좋겠어요.”

    초벌 원고를 약속대로 이메일로 보내주었더니 송특검은 몇 군데 법률용어와 고유명사의 오류를 잡아내는 데 그치고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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