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살육·방화·약탈·강간… 잔혹한 전쟁범죄의 표본

  • 글: 김재명 분쟁지역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3-07-29 1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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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군들이 도끼로 양민들의 손목을 자른 테러로 악명 높은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 국민소득 140달러, 평균수명 34세가 상징하는 불모의 내전지역 시에라리온의 참상을 통해 아프리카 내전의 참혹상을 알아본다.
    살육·방화·약탈·강간… 잔혹한 전쟁범죄의 표본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정녕 ‘이 땅의 저주받은 자들’이 사는 곳인가. 아프리카에 ‘평화와 안식의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유럽 국가들의 오랜 식민지 수탈에서 벗어나 1960년대에 와서야 겨우 독립국가를 이룬 아프리카. 하지만 잇단 내전과 기아, 에이즈(AIDS)의 3중고로 고통받고 있다.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도 아프리카에서는 무력 충돌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주변국가들이 개입해 ‘아프리카의 2차 대전’이란 악명을 얻은 콩고 내전은 지난해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여전히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마냥 불안한 상태다. 수단·소말리아·알제리·중앙아프리카공화국·세네갈·르완다·우간다·부룬디 등도 고질적인 내전 또는 국지적 분쟁을 치러온 나라들이다.

    아프리카 내전의 특징은 풍부한 지하자원 이권을 둘러싼 무장집단 또는 부족 사이의 갈등이라는 점. 만성적인 콩고 내전이나 앙골라 내전, 수단 내전 등이 그러하다. 냉전시대에 아프리카 내전은 미국과 소련의 세계지배 전략과 맞물려 증폭됐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앙골라 내전이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았던 집권당 앙골라인민해방전선(MPLA) 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 앙골라 완전독립민족연합(UNITA) 사이의 유혈투쟁이 35년 넘게 계속된 내전으로 앙골라에선 50만명 이상이 숨졌고 인구의 3분의 1인 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소련이 붕괴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앙골라에서 손을 뗐고 앙골라에는 35년 만에 평화의 빛이 찾아들고 있다.

    서아프리카도 내전에 시달려온 지역으로 꼽힌다. 지난 10년 동안 내전을 치러온 시에라리온과 기니, 라이베리아, 지난해 9월 쿠데타로 내전이 벌어진 코트 디부아르 등이 그러하다. 특히 라이베리아는 현재 수도 먼로비아를 둘러싼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1980년대 말 당시 도우 대통령 정부가 반군에 무너진 후 내전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 20여 만명의 희생자를 낸 내전은 1997년 군벌들이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후 찰스 테일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테일러 대통령의 독재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1999년 내전상태로 되돌아갔다. 라이베리아는 이웃 시에라리온 내전과 깊이 연결돼 있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반군 혁명연합전선(RUF)으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사들이고 그 대신 무기를 대준 혐의로 지난 6월 유엔이 후원하는 시에라리온 전쟁범죄 재판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 기소됐다. 현재 테일러는 반군의 공세로 실각 위기에 몰려 있다.

    20만명 사망, 2000여 명 손목 절단

    인구 500만명인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은 10년에 걸친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코소보 난민의 2배가 넘는 200만명이 피란을 갔고 20만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시에라리온 현지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찌들고 메말라 있었다. 특히 손목 절단이라는 반란군의 무자비한 테러전술은 악명을 얻은 지 오래다. 도끼나 칼로 잘린 두 손목을 붕대로 친친 감고 있는 부상자들이 바로 시에라리온 내전의 희생자들이다. 내전 중 약 2000여 명이 손목을 잘린 것으로 추산된다. 농경사회인 아프리카에서 손목을 잘린 것은 생존수단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고 이는 곧 죽음을 뜻한다. 시에라리온의 실업률은 70∼80%에 이른다. 손발이 멀쩡한 정상인조차 일자리를 얻기 힘든 형편이니, 손목 없는 장애인의 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은 외국 자선기관들이 보내주는 원조식량으로 겨우 굶주림을 면하고 있을 따름이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단계는 1991년 포데이 산코를 지도자로 한 혁명연합전선(RUF)이 조지프 사이두 모모(J.S. Momoh)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비롯됐다. 모모 대통령과 측근들이 부패해 있었고 4만명에 이르는 레바논 정착민과 소수의 세네갈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과 무역, 상업 등 시에라리온 경제의 70∼80%를 쥐고 있다는 점 등이 산코가 일으킨 반란의 명분이었다.

    1단계 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전개됐다. 지하자원은 곧 전쟁자금의 주요 공급원이다. RUF의 포데이 산코는 시에라리온 동부의 다이아몬드 광산들을 장악, 이를 자금원으로 무기를 사들여 세력을 넓혀갔다.

    살육·방화·약탈·강간… 잔혹한 전쟁범죄의 표본

    RUF 반란군은 어린 아기의 두 팔마저 도끼로 내리찍어 잘라냈다.

    내전 초기부터 RUF 반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을 불지르고 비전투원인 양민들을 공격해 죽이거나 도끼로 손목, 발목을 자르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 부녀자들은 강간당하기 일쑤였다. 국제구조위원회(IRC)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반군은 강간을 하나의 테러전술로 일상화시켰다. 한 마을의 젊은 여자들이 다 도망갔을 경우 60세가 넘는 여성조차 강간 피해자가 됐다. 1999년 1월 이들이 대대적인 공세를 펴면서 프리타운을 절반 이상 점령했을 때 많은 희생자가 났다. 반군은 거의 3주 동안 무차별적인 살육, 방화, 약탈, 강간,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적인 인권감시기구인 ‘Human Right Watch’가 펴낸 한 보고서는 손목 절단을 “시에라리온 8년 내전에서 가장 잔혹하고 집중적인 인권침해 행위”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내전이 전세계의 눈길을 끈 것도 그때의 잔혹상이 언론보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프리타운 중심가에서 자동차를 타고 대서양 연안 쪽으로 10분쯤 가면 시에라리온 내전이 할퀴고 간 상처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국경 없는 의사회’가 운영하는 전쟁부상자수용소가 바로 그곳. 등록된 사람은 약 400명이지만 그 가족들까지 합치면 상주인구는 1000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RUF 반군들이 프리타운 중심부를 포함해 도시 절반을 점령했을 때 이유 없이 손목이 잘렸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의 손목을 도끼로 내리치는 끔찍한 행위는 벨기에가 원조라면 원조다. 그들은 식민지 콩고의 풍부한 자원을 수탈하면서 현지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러왔다. 손목 절단은 한마디로 더러운 식민지적 유산이다. 포데이 산코의 테러전술에는 다음과 같은 수사학이 깔려 있다. “손이 없다면 투표도 못할 것이다(No hands, no more votes).” 1997년 시에라리온 대통령선거에서 현 대통령인 티잔 카바의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에게 지지표를 던진 손들을 자른다는 괴상한 논리였다. 하지만 많은 어린이 피해자들은 그런 논리의 허구성을 입증한다. 프리타운 전쟁부상자수용소에서는 어린 소녀들조차 손목을 잘린 채 어두운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희망 없는 잿빛 나날들뿐이다. 현장에서 만난 피해자 가운데는 세 살 난 아기도 있었다.

    범죄 행위 사면받은 반군

    시에라리온 내전 제2단계는 1999년 7월 맺은 평화협정 뒤의 ‘불안한 평화’를 가리킨다. 1991년 이래 8년을 끌어온 시에라리온 내전은 로메 평화협정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미 클린턴 행정부까지 적극 개입한 이 평화협정으로 시에라리온 정부와 RUF 반군 양측은 싸움을 그쳤다. RUF 반군들은 내전 기간 동안 자행한 무차별 살육, 손목 절단, 강간 등 범죄행위를 사면받는 대신 무장해제를 하기로 했다. 양측은 임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2년 뒤(2001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그때까지 RUF를 상대로 싸워온 것은 허약한 정부군이 아니라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에서 나이지리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이었다. 평화협정에 따라 1999년 10월 유엔은 유엔 시에라리온사무소(UNAMSIL)를 창설, 평화유지군을 파병했다.

    손목 절단이란 무시무시한 테러행위로 악명 높았던 RUF의 반군 지도자 포데이 산코는 그동안 저질렀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포괄적인 백지 사면(blanket pardon)을 받고 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됐다. 그는 각료 4명의 임명권까지 손에 쥐었다. 오랫동안 시에라리온 동부 밀림지대에서 지냈던 산코는 수도 프리타운의 호화저택에서 지내며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해 대권을 노리기까지 했다. 1990년대 발칸을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전쟁과 코소보전쟁에서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수십 명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살육·방화·약탈·강간… 잔혹한 전쟁범죄의 표본
    하지만 평화협정 후 반군의 무기 반납은 지지부진했다. 평화협정에는 ‘반군이 무기를 반납하면 300달러의 정착금을 받고 민간인으로 돌아간다’ ‘본인이 바랄 경우 심사를 거쳐 시에라리온 정부군으로 재편될 수도 있다’는 조항이 있다. 300달러는 시에라리온 물가로는 5인 가족이 6개월 동안 살 수 있는 큰돈이다. 이에 10개 지역에 무장해제 전투원들을 수용하는 집단시설이 생겨났다. 이른바 비무장수용소다. 하지만 포데이 산코 무장반란군의 주력이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반군에서 손을 떼겠다는 자들은 정부군 출신 반란군이거나 병약자 등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부군으로 편입되길 바랐다. 총을 버리고 민간사회로 복귀한다 해도 뾰족한 생활대책이 없는 탓이었다.

    그리고 시에라리온 경제의 핵인 다이아몬드 광맥을 포함한 국토의 절반 가량은 여전히 반군들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시에라리온 유엔평화유지군조차 그곳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필자는 로메 평화협정이 맺어진 후 프리타운에 간 적이 있다.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반군들은 예나 다름없이 시민생활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시에라리온과 외부세계를 잇는 유일한 관문인 룽기 국제공항에서 내려 수도 프리타운으로 가려면 헬리콥터를 타야 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길은 곳곳에 반란군들이 매복하고 있어 위험했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은 이름뿐이고 끊임없는 소규모 충돌 속에 언제 다시 전면적인 내전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언론인에게도 죽음의 땅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병사 10명이 순찰 도중 100명쯤 되는 반군들의 매복에 걸려 총상을 입은 사건도 일어났다.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반란군의 매복을 피한다 해도 무장건달들에게 시달릴 각오를 해야 했다. 그들은 도로 곳곳에 돌더미를 쌓아놓고 검문소를 설치해 지나는 운전자들의 주머니를 갈취하곤 했다.

    시에라리온은 언론인들에게도 죽음의 땅이었다. AP통신 소속 스페인 사진기자 미구엘 길 모레노, 로이터통신 기자 쿠르트 쇼르크 두 사람이 길거리에서 반군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숨졌다. 반군들은 수도 프리타운을 점령했을 때 10명의 기자들을 죽였다. 프리타운에서 만났던 한 신문기자는 RUF 반군들이 처치 대상 기자들의 명단을 작성해 집집마다 다니면서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기자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고 증언했다. 몇몇 기자는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이 프리타운을 반군으로부터 되찾았을 때 반군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즉결처형 당하기도 했다.

    내전의 3단계는 유엔평화유지군들이 반군의 잇단 공격에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무장충돌 속에서 포데이 산코가 체포된 후다. 2000년 5월1일 프리타운에서 북동쪽으로 140km 떨어진 마그라카 지역에서 포데이 산코 휘하의 RUF 반군이 투항한 RUF 병사 10명이 반납한 무기를 도로 내놓으라며 유엔평화유지군 소속 인도군 소령을 포함한 3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틀 후 4명의 케냐 병사가 피살됐고 500명의 잠비아군이 RUF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채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800명의 특수부대 병력과 해군함정을 프리타운에 파병했다. 5월8일 프리타운 시민들이 RUF 반군의 잇단 무력도발에 항의하는 데모를 벌였고 이에 포데이 산코의 경호원들이 데모대에 총격을 가했다. 9명의 사망자가 생겨나자 RUF의 라이벌 무장세력이자 정부군 출신들로 구성된 혁명평의회군(AFRC)이 산코의 집을 급습했다. 1주일 후 이들은 포데이 산코를 붙잡았다.

    산코가 극적으로 체포됨에 따라 로메 평화협정은 사실상 백지화됐다. 반군 지도자 산코가 전범재판에 회부되면서 반군 세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2002년 5월 선거에서 집권당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이 압승, 티잔 카바 대통령이 다시 집권했고 시에라리온에는 조금씩 평화가 찾아들고 있다. 2002년 7월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했던 영국군이 철수했다. 하지만 전세계 유엔평화유지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1만4500여 명의 다국적군이 시에라리온의 불안한 평화를 지키고 있다.

    살육·방화·약탈·강간… 잔혹한 전쟁범죄의 표본

    반군에게 납치돼 성적 노리개로 학대받던 13세 소녀의 가슴에 ‘RUF’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아프리카 내전의 일반적 양상인 종족 사이의 갈등과 별로 관계가 없다. RUF 안에도 여러 부족의 전사들이 뒤섞인 채 카바 정권에 맞섰다. 시에라리온에는 북부 지역의 템네스 부족과 남부·동부 지역의 멘데스 부족, 수도 프리타운을 중심으로 한 크리오 부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영국 식민주의 세력은 이들 부족간의 갈등을 적절히 활용해왔다. 하지만 10년 내전을 치르면서 예전의 부족 갈등은 희석됐고 단순히 ‘RUF 반군 편이냐’ ‘아니냐’로만 갈린 상태다.

    국민소득 140달러, 평균수명 34.2세

    시에라리온은 인구 500만에 국민소득 140달러(세계은행 2001년 통계)가 말하듯 가난에 찌든 나라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로는 오랜 내전과 기아, 에이즈 탓에 평균수명이 34.2세로 매우 짧다(남자 33세, 여자 35세). 아프리카의 평균 수명이 47세인 점에 비춰봐도 시에라리온의 생존 여건이 극히 척박함을 알 수 있다. 종교는 이슬람과 토속신앙, 식민지 종주국 영국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자리를 잡았다. 시에라리온은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약탈기지로 서양사에 등장한다. 시에라리온은 ‘사자(lion)의 산들’이란 뜻을 지녔다. 1462년에 처음 포르투갈인들이 프리타운에 왔을 때 겪었던 폭풍우가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 같았다는 데서 비롯됐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이권을 노린 포르투갈과 영국의 약탈자들이 몰려오기 전,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은 원주민들 사이에 ‘울부짖는 자들의 땅’이란 뜻의 ‘로 마롱’으로 불렸다. 시에라리온 강이 바다와 맞닿는 곳에서 생긴 험한 물살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그들의 가족이 울부짖곤 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 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시에라리온의 중심도시 프리타운은 서부 아프리카 약탈무역의 중심기지가 됐다. 18세기 후반 영국이 노예제도 자체를 금지하면서 영국은 본토와 식민지에서 풀려난 해방노예들을 정책적으로 이곳에 실어 날랐다.

    20세기 시에라리온이 걸어온 정치적 혼란의 발자취는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의 전형이다. 1961년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시에라리온은 초기에 정치적으로 다당제를 도입,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듯했다. 하지만 두 차례의 군사 쿠데타를 겪은 후 1967년부터 20년 동안 전인민회의(APC)당의 시아카 스티븐스가 일당독재를 이끌었다. 1985년 스티븐스가 지명한 조지프 사이두 모모 장군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모모 장군은 집권 초기부터 경제난으로 흔들리다 1991년 산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위기를 맞았고 1994년 군부 쿠데타로 물러났다.

    그 후 시에라리온 정부를 어렵사리 이끌고 있는 티잔 카바 대통령은 유엔 개발프로그램(UNDP) 간부 출신. 1996년 5월 선거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러나 1년 후 조니 폴 코로마 소령이 이끄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때부터 정부군은 포데이 산코의 반란군과 ‘기묘한 동거’를 해왔다. 쿠데타 직전까지만 해도 총을 맞대고 싸우던 반란군을 정부군이 수도 프리타운으로 불러들여 군사혁명평의회(AFRC)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군사정부는 정부로서의 기능은커녕 대중적인 지지도 얻지 못했다.

    무장병력이 없는 초라한 처지로 전락한 티잔 카바 대통령은 이웃나라 기니로 피신했다. 그러다가 1998년 2월 나이지리아가 주축이 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이 개입한 덕에 다시 수도 프리타운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이지리아가 개입한 이유는 서아프리카 지역의 패권을 넓히고 다이아몬드 이권을 차지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판매대금으로 무장한 RUF 반군 1만5000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나이지리아군은 강둑 너머로 다이아몬드를 캐내는 반군을 마주보면서 똑같이 다이아몬드 채취에 열중해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당신은 내게 무엇을 줄 겁니까.” 필자가 수도 프리타운의 관문인 룽기 공항에 내렸을 때 출입국 관리사무소 공무원으로부터 들은 첫마디다. 경찰이 거리에서 운전자들을 갈취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관공서를 찾는 민원인들은 ‘급행료’를 건네야만 일을 수월히 끝낼 수 있다. 오랜 내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시에라리온엔 후진국형 부패가 일상화돼 있다. 시에라리온에선 급행료를 ‘사기 촉진제’로 부른다. 이를테면 이곳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사기 촉진제를 갖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익숙해 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한다. 정신병리학자들이 시에라리온 내전을 진단한다면 아마도 시에라리온을 거대한 정신병원으로 여길 듯하다. 비전투원인 시민들의 손목을 도끼로 마구 내리치던 10년 내전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고 지치게 했다. 어린이들조차 소년병이란 이름으로 어른들의 싸움에 참여해야 했다. RUF 반군 병력 상당수가 15세 이하의 소년병들이었다. 유엔아동기금(UNICEF)이 추산하는 전세계 16개 분쟁지역의 소년병은 약 30만명. 비정부기구인 ‘어린이들 구하기(Save the Children)’는 약 5000명의 소년병이 시에라리온 내전에 휘말린 것으로 보고 있다. RUF 반군은 공격하는 마을마다 어른들은 죽이고 소년, 소녀들은 납치, 전투나 탄약운반 등을 시켰고 성의 노예로 활용했다. 이 경우 코카인이나 마리화나 같은 마약이 하나의 통제수단으로 널리 사용됐다. 시에라리온에서는 마약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프리타운에서 남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는 반군과 함께 있다 풀려났으나 마땅히 갈 곳이 없는 소년, 소녀들이 임시로 모여 사는 수용소가 있다. 모두 110명의 소년병 출신들이 50여 명의 고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몇몇 소년들은 “반군이 강제로 먹인 마약에 취해 사람들을 죽이거나 손목을 잘랐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은 저마다 내전이 남긴 깊은 상흔을 안고 있었다. 어떤 소년들은 좌절감과 우울증이 깊어 실어 증세마저 보였다. 일부 소년, 소녀들의 가슴에는 ‘RUF’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반군들이 면도날로 새겨넣은 것. 그래서 이들은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이 검문 과정에서 RUF 문신이 보이면 어린아이라도 즉결 처형했기 때문.

    그렇다면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배울 교훈은 무엇일까. 국제법 측면에서 보면 시에라리온 내전은 잔혹한 전쟁범죄 행위자들에게 평화협정과 사면이란 절차를 통해 면죄부를 준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내전 과정에서 포데이 산코가 이끈 RUF 반군이 저지른 잔혹행위들은 제네바협약을 위반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전쟁범죄자에게 백지 사면을 내려준 1999년 로메 평화협정은 국제법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일.

    무장집단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무차별 전쟁범죄를 저질렀는 데도 평화협정으로 사면을 받은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는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의 안이한 정치적 판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미국은 서부 아프리카의 소국 시에라리온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인권차원의 개입을 해봤자 1993년 소말리아에서처럼 정치적 불이익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미국은 소말리아에 미군을 파병했다가 1993년 소말리아 모가디슈 시가전에서 18명의 군인이 사망한 후 자국내 여론이 악화되자 철수했다). 세계의 경찰을 자부해온 미국이지만 시에라리온내전은 석유가 걸린 걸프전쟁도 아니다. 그러니 강력한 군대를 파견하기는커녕 유화책을 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로메 평화협정 체결과정에서 클린턴 미 대통령은 제시 잭슨 목사를 특사로 파견해 산코를 설득했다. 백지 사면은 평화협상 과정에서 산코가 고집스레 요구한 사항이었다. 협상이 막바지 진통을 거듭하자, 클린턴은 산코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말고 어떤 반란군 지도자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나?”고 말했다. 이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 여론이 일어났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아프리카 내전의 아프리카식 해법’이냐”는 비판이었다. 로메 평화협상 과정에 적극 개입했던 미국무성 아프리카담당 차관 수전 라이스는 “사면은 시에라리온의 국내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얻은 ‘싸구려 평화’에 대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반군들은 사면만 받은 채 무장해제를 거부했고 평화협정 1년도 안 돼 영국군의 시에라리온 파병까지 불렀다. 시에라리온 내전에서 우리는 “전쟁범죄에 대한 백지사면은 나쁜 선례로 평화의 길을 막는다”는 교훈을 얻은 셈이다.

    1996년 시에라리온 내전에 개입한 이래 티잔 카바 대통령의 현 정권을 사실상 지탱해온 물리적인 힘은 나이지리아군이 주축인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이었다. 시에라리온 유엔평화유지군(UNAMSIL)은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과 큰 차이가 있다. 유엔평화유지군은 말 그대로 중립적인 평화유지군으로,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과 달리 반군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반군의 잇단 도발에 맞서려면 자위 차원의 중립적인 역할보다는 적극적인 무력개입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 시에라리온 내전이다.

    현재 1만4500명에 이르는 유엔평화유지군 병력의 주축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잠비아, 케냐,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같은 제3세계 병력들이다. 이들은 반군을 쉽사리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포로가 되는 등 시에라리온 평화를 이끌어내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최근 “시에라리온의 이웃나라 라이베리아의 수도 먼로비아에서 벌어진 공방전으로 생긴 유혈사태와 대량난민을 막으려면 강대국 미국이 무력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이다. 걸프지역 파병으로 석유만 챙기려 들지 말고 아프리카 평화도 챙기라는 원론적인 요구가 먹혀들 가능성은 그러나 매우 낮다. 미국이 파병한다 해도 극히 작은 규모에 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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