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요즘은 세상이 더 무서워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이제 도처에 말 퍼뜨리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호들갑 떨 일은 아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만인에 대한 ‘선택받은 소수’의 감시보다야 얼른 봐도 합리적이지 않은가.
어쨌거나, 말 퍼뜨리는 자들 사이에도 급이 있다. 그 중 진중권(42)은 단연 ‘슈퍼 울트라 급’이다. 우선 이 자는 자유롭다. 특정 조직에 속해 녹 먹는 바 없기에 걸리적거릴 것이 없다. 그러나 말 퍼뜨리는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어디 그뿐인가. 진짜 무서운 건 ‘내 편’이다. 이미 형성된 전선에서 적을 ‘씹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 어설픈 공격으로 심한 부상을 입는다 해도 위생병이 달려올 것이다. 상이군경으로 등록돼 훈장을 타고 노후 보장까지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는 종종 아군을 씹는다. 그가 말 퍼뜨리는 자로 활동한 수년 동안, 적지 않은 별 셋, 별 다섯짜리들이 ‘아군’인 그의 비판과 조롱 앞에 스타일을 구겼다. 그의 말 자체가 파괴적인 경우도 있었고 공격당한 울분을 참지 못한 그들 스스로 자해를 한 사례도 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도무지 이 자의 진짜 아군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의 ‘좌파적 사고’와 ‘당파성’, 또는 ‘인간적 친분’을 이유 삼아 그를 내 편이라 자랑했던 많은 이들에게 그는 유리알처럼 감정 없는 눈으로 ‘배신’의 쓴잔을 내밀었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다니, 세상에, 우리편이 아니었다니. 진중권의 이 방자한 자유로움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진중권을 말 퍼뜨리는 자 중 단연 돋보이게 하는 두 번째 것은, 누가 뭐래도 놀라운 그의 재능과 직관이다. 그는 글을 잘 쓴다. 매체와 대상의 성격에 맞게, 찰지게, 재미있게, 배꼽 빠지게, 때로는 무겁게, 유장하고 가슴 떨리게. 발상은 신선하고 공격은 매몰차다. 다양한 철학적 문제 의식을 지금 여기의 구체적 상황과 맥락 속에 끌어들여 예기치 않은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항용 철학한 자는 숭고하지 않은 것들과는 대거리를 꺼린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이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니콜라스 푸생의 유화를 앞에 놓고 난숙한 미학이론을 펼치다가도, 몇몇 사이트에 들어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주저없이 가차없이 한 마리 ‘개’가 된다. 풍자와 되받아치기에 능통한, ‘모든 우연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 시니시즘(犬儒主義)의 참여정부형 버전. 진중권의 철학은 그의 ‘철학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그에게 말 퍼뜨리는 자의 막강한 힘을 선사한 세 번째 것은 수많은 매체들이다. 여러 신문과 잡지, 방송과 출판사가, 각종의 인터넷 사이트들이 그의 글을 기다린다. 물론 꼭 잘해 보자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때릴 놈’이 없어 그를 찾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가 뭘 쓰면 자꾸 말이 나고 싸움이 일어난다. 그러니 이 아니 좋은가. 그는 말 퍼뜨리는 자다. 진중권의 무엇이 이 계산 빠른 지식의 도떼기시장에서 도무지 그를 소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는가.
감정을 비운, 언뜻 무서운 눈
진중권은 경기도 김포의 아파트촌에 산다. 어머니와 그, 두 식구 살림이다. 방학이 되면 독일에 유학중인 일본인 아내가 돌아온다. 세 살 난 아들은 아내와 함께 있다. 그의 집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아무래도 가볍지 않다. 말 퍼뜨리는 자(기자)가 훨씬 더 왕성히, 열정적으로 말 퍼뜨리는 자를 헤집으려 가는 길 아닌가. 말 퍼뜨리는 자는 폭발하는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참고로 그는 자·타칭 ‘빨간 바이러스’, 남다른 전염력과 파괴력을 지닌 말의 다이너마이트다.
그런데 평범한 30평 아파트 거실에 마주앉은 그는 폭탄 노릇하기엔 좀 말랐다 싶다. 하얀 얼굴, 얌전한 음성, 가지런히 돋은 이.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아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다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것저것 잘 챙겨주고 대답도 성심성의껏 하는데 왠지 모를 불균형이 느껴진다. 말을 하긴 하는데 안 하는 게 있다. 일부러 감추는 게 아니라 그냥 말이 되어지지 않는 무엇. 말이 되어지지 않음으로써 그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하는 그 무엇. 분명 두 사람인데 그는 혼자 있는 듯하다. 튀지도, 거칠게 구는 것도 아니련만 무리 속에 섞여 있는 그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장난스런 눈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아 언뜻 무섭고, 입가의 미소는 순진함의 표상인지 노회함의 가장인지 가늠키가 난망이다.
그렇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매우 예의 바르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웃는다. 손톱은 보이지 않는다. 이빨도 없다. 그저 이렇게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당연한 걸 모르죠?” 그는 자기 세계 안에서 한없이 차분하고 명쾌하다. 문득 부신 햇살 아래 홀로 소꿉놀이하는 아이가 떠오른다. 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