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300년 숨결 간직한 禮와 達觀의 건축 미학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3-07-30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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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네스코가 ‘일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안후이성 훙춘·시디 일대는 중국 古건축물의 보고(寶庫).
    • 영화 ‘와호장룡’과 ‘국두’의 로케이션 장소로 선택됐을 만큼 독특한 풍광을 간직하고 있다. 상술과 교양을 겸비한 老상인들이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기 위해 혼을 담아 지어낸 집들인 까닭이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홍춘 마을의 남쪽 끝에 위치한 남호. 잔잔한 수면 위로 주위의 경관이 어린다.

    “여기에서 훙춘(宏村) 가는 버스는 없나요?”예의를 갖춰 물었는데도 탕커우(湯口)빈관의 젊은 여종업원은 “없어요”라는 한마디로 끝이다. 무뚝뚝한 게 중국인이라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로부터 이런 대답을 듣는 것은 뜻밖이다.

    황산(黃山)을 둘러본 다음 훙춘과 시디(西遞)를 살펴볼 생각으로 황산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그곳으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려 했던 것인데, 결과는 그렇듯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라 다시 물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나요?”

    “택시를 타면 되죠.”



    대답은 여전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설마 훙춘과 시디 같은 곳으로 가는 버스가 없을라고… 찾아보면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세한 것은 황산 등정을 끝낸 후에 알아보리라 마음먹었다.

    유네스코는 2000년 12월 훙춘과 시디를 일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일괄 유산’이란 둘 이상의 지역이나 건축물을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묶어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린 것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 강화·고창·화순의 고인돌 유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

    훙춘과 시디는 명·청 시대에 지어진 남방 특유의 민가들이 모여 있는 전통민속마을이라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됐는데, 이런 예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드넓은 중국에서도 윈난(雲南)성의 리장(麗江)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번 찾아볼 만한 가치는 충분한 것 아닌가.

    황산 등정을 끝내고 훙춘행 버스편을 알아봤더니 직접 연결되는 것은 없고, 황산 일대에서 가장 큰 도시인 툰시(屯溪·일명 황산)를 거쳐야 했다. 다행히 툰시로 가는 버스는 하루 여러 차례 있었다. 다만 버스는 통합 정류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차주의 사무실 앞에서 떠나기에 출발시간과 출발지점 등을 미리 알아둬야 했다.

    중국에서도 드문 ‘일괄 문화유산’

    툰시로 가는 버스는 계곡 사이로 난 2차선 길을 따라 꼬불꼬불 달렸다. 다시 말해 이렇다 할 평지가 없었다. 어떤 곳에서는 물소를 동원해 논일을 벌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한가하고 또 푸르렀다. 툰시에 닿은 것은 그로부터 40분 뒤. 요금은 5위안(800원)이었다.

    툰시에서 해치워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훙춘으로 가는 교통편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 여행증’을 발급받는 일이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시행한 지 10년이 훨씬 지났는 데도 외국인의 경우 아직 일부 지역에 한해서는 여행허가증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 훙춘과 시디가 바로 그런 곳인데, 공안국(경찰서) 외사과에서 발급해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디에 있는 공안국에서 그 일을 해주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툰시에 닿으면 일단 공안국부터 찾을 요량이었다.

    툰시에서 훙춘으로 가는 버스편은 쉽게 알아냈으나, 외사과는 버스정류장에서 너무나 먼 곳에 있어 어떻게 해야 될지 망설여졌다. 그때 젊은 여인 하나가 “훙춘?”이라고 물으며 내 뒤를 따라붙었다. ‘훙춘으로 간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는 태세다. 경력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눈치가 보통이 아닌 여자였다. 또한 끈질겼다.

    오랜 여행 경험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 가운데 하나는 ‘먼저 덤벼드는 자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상대가 현지의 지리나 정보, 언어 등에 익숙지 못하다는 약점을 이용해 바가지를 씌우려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대꾸를 않는 게 상책이다. 말을 하다보면 걸려들게 마련이니까.

    이번에도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따라오든 말든 무관심한 체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 입에서 ‘훙춘’이란 말이 나온 이상 마치 ‘한번 문 먹잇감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치근댔다. 하지만 나 또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이 바닥의 베테랑이 아닌가.

    나는 그녀를 그늘진 곳으로 데려갔다. 마치 더 이상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체념한 듯한 투로, “훙춘에 가려고 하는데, 여행 허가증은 어디서 발급받으면 되나요?” 하고 물었다.

    “그건 제가 다 알아서 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일단 제 차를 타세요.”

    “그렇더라도 어디서 발급받는지는 알아야 가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닙니까”

    “이셴(헓縣)에서 하면 되니까 걱정 말라니까요. 공안국에 낼 수수료 이외에 200위안만 더 내시면 공안국에서 일을 본 다음 훙춘까지 최대한 빨리 모셔다 드릴게요.”

    이미 필요한 정보는 얻어낸 뒤였다.

    “200위안이라고요? 버스 요금이 기껏해야 10위안쯤일텐데 200위안이라니, 내 그렇게는 못하겠소이다.”

    내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정류장을 빠져나와 기차역으로 갔다. 바퀴 달린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면서. 처음에는 버스정류장의 짐 보관소에 가방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짐 관리가 허술해 보이는 데다 밤 10시 이후에는 문을 닫는다고 해서 24시간 열려 있는 역에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역에선 값도 싸서 이틀 맡기는 데 2위안이었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문조(門?)’라 부르는 후이저우 스타일의 대문

    거기에서 한 여고생을 만났다. 영어도 곧잘 했다. 훙춘과 시디를 둘러본 뒤에는 장시(江西)성의 난창(南昌)으로 갈 계획이어서 그곳으로 가는 열차시간을 알려고 왔다갔다 하는 나를 보고 그녀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여학생은 내가 훙춘에 가려 한다고 하자 “역 앞에서 이셴까지 가는 버스가 있으니 그걸 타고 이셴으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훙춘행 버스로 갈아타면 된다”고 친절하게 일러줬다. 그리고는 시디 구경을 끝내고 툰시에 다시 오게 되면 식당도 하고 민박도 하는 자기네 집을 한번 찾아달라고 했다. 나는 이미 밤차로 난창에 갈 요량으로 표를 끊어뒀기에 그녀의 호의에 답하고 싶었다.

    “이셴으로 떠나기 전에 점심부터 해결하고 싶으니 지금 학생 집으로 가지.”

    그녀의 식당은 거기서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장 겸 종업원인 작은 식당에서 5위안짜리 중국식 자장면을 시켜먹고는 “툰시에 다시 오면 또 들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이셴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붕붕거렸으나 좀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손님을 더 태울 생각인지 30여 분을 더 그렇게 서 있었다. 그들에겐 그것이 ‘일상’인지 몰라도 나로서는 인내심을 테스트 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중국에선 중국식에 따라야지.

    버스는 출발한 뒤에도 자주 멈췄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서든 차를 세웠다. 탕커우에서 툰시로 나올 때보다는 평지가 넓어 보였고 제법 큰 내(川)도 흘렀다. 뒤에야 알았지만 그것이 이 지역의 젖줄인 신안(新安)강이었다.

    이셴에 거의 다 다다랐다 싶었을 무렵 오른쪽으로 ‘시디, 세계문화유산 3공리(公里)’란 팻말이 나타났다. 오른쪽으로 3km만 가면 시디가 나온다는 것이다. 드디어 이셴에 닿았다. 정류장에 대기하고 있는 차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셴은 제법 큰 도시인 듯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곳 사람들에게 공안국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그때 도시락을 먹던 젊은 친구가 “공안국?” 하며 일어섰다. “차비는 5위안”이라며 자기가 안내하겠단다. 공안국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공안국 입구에서 “외사과에 볼 일이 있다”고 하니 어디론가 전화를 했는데, 곧 잘생긴 순경 하나가 날 데리러 왔다. 사무실은 2층에 있었고, 내부는 밖에서의 느낌과는 달리 꽤 잘 정돈돼 있었다. 그는 신청서를 건네주며 쓰라고 하고는 수수료로 55위안을 받았다. 그러자 여권만한 크기의 ‘외국인 여행증’을 내줬다.

    그것으로 볼일이 끝났는지, 그는 훙춘 가는 차를 타는 데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와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았다. 그는 쏜살같이 달려 작은 화물차를 개조한 미니카가 서 있는 곳에 나를 내려놓았다. 요금은 거리에 관계없이 2위안이었다. 5인승으로 개조한 미니카라 10위안을 내면 전세를 얻을 수도 있었다. 내가 타고 나서 마지막으로 아주머니와 소녀가 차에 오르자 미니카는 출발했다.

    신안강은 이번에도 나와 동행했다. 물론 그 지류였지만. ‘신안’은 강 이름이면서, 훙춘의 옛 명칭이기도 하다. 황산 일대의 안후이(安徽)성 남부는 예로부터 환난(?南)이라고도 불렸다. 안후이성의 자동차 번호판에 ‘환(?)’이란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니카가 선 곳은 수백 살의 나이를 먹어 잎이 무성한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그게 훙춘의 입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매표소도 있었다. 외지인이라면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또 머무는 날 수에 관계없이 55위안씩 하는 입장권을 떠안겼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후이저우 민속마을의 골목. 길은 좁고 꼬불꼬불 휘어져 있다.

    입장권을 손에 쥔 다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둘뿐. 하나는 좁다란 골목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남호(南湖)라 부르는 커다란 호수로 가는 것이다. 이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려면 먼저 마을 안으로 들어가야 할 터, 나는 주저 없이 전자를 택했다.

    훙춘을 비롯한 강남 일대에선 골목을 ‘농(弄)’이라 부른다. 농은 꼬불꼬불해 계속 커브를 돌아야 한다. 직선으로 된 길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온통 흰색으로 칠해진 널따란 벽체와 검은 기와지붕을 뒤집어쓴 폐쇄적인 주택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어 시야는 참으로 좁다.

    기와로 지붕을 덮었다면 더러 팔작지붕도 있을 법한데, 모두 맞배지붕이라 흰색의 벽체가 더욱 넓게 보인다.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 그리고 상하이 등지에선 기와로 지붕을 얹지만 용마루와 처마선은 휘어져 날렵한데, 여기에선 모두가 직선이다. 그래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경사진 곳에서는 벽체 또한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마두벽(馬頭壁)’이라 부르는 이 계단식 벽체는 우리네 전통 담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와지붕을 이고 있으며, 높이가 본채 지붕보다 오히려 높다. 그러므로 집은 담장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대문 또한 예사롭지 않다. 사람이 출입하는 문은 좁으나, 그 위에 장식성이 강한 지붕을 얹었다. 그런데 그게 별도의 축조물 형태로 되어 있지 않고 벽체에 조각처럼 붙어 있다. 그 집의 경제력과 신분에 따라 그 형식과 크기, 장식을 달리한다는데, 이것이 황산 일대 후이저우(徽州) 지역 민가 건축의 한 특징을 이룬다.

    마을 입구에서 모퉁이를 몇 차례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은 반달 모양의 못이었다. 그 둘레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못의 이름은 ‘월소(月沼)’ 또는 ‘월당(月塘)’. 우리말로 하면 ‘달 못’ 정도가 된다. 생긴 모양에 따라 붙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곳곳에 원색의 파라솔이 서 있고 그 사이로 오리들이 다니며, 아이들은 스케치북을 펴들고 주위의 경관을 담고 있다. 그들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경관도 볼 만하지만, 실제의 집들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어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렸다.

    ‘민박’이란 쪽지가 붙어 있는 집도 있고, 입장에 5각(角)을 받는다고 붙여놓은 집도 있다. 먼저 ‘수지당(樹志堂)’이란 당호(堂號)가 붙은 2층집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를 받는다는 말이 없기도 했지만, 마루와 붙은 정자에 노인 몇 분이 마작을 즐기고 있어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인인 듯한 노인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정자는 작으나 거기에는 ‘창금사(創琴?)’라는 매우 어려운 글자가 쓰여 있었다. 현판 주위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등(燈)도 달려 있어 섬세한 손길이 거쳐갔음이 절로 느껴졌다.

    며느리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벽에 걸린 그림과 글씨, 마루 뒤쪽의 금색 글씨 등을 보여주며 여러 차례 ‘첸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청나라의 황금기를 연 건륭(乾隆) 황제 시대의 작품이라는 뜻이었다.

    훙춘의 역사는 10세기 중엽 북송시대로부터 시작됐다. 난을 피해 남하한 한족들이 이곳에 터를 잡았던 것이다. 그때의 이름은 ‘신안’. 남송시대인 12세기엔 ‘훙춘(弘村)’으로 개칭됐고, 명말·청초에 이르는 300년 동안 가장 크게 번창했다. 특히 60년간 제위에 있으면서 청조를 번성시킨 건륭제 때가 전성기로, 그때 이름마저 훙춘(宏村)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른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훙춘 마을의 중심을 이루는 월소와 그 주변의 古민가들

    사실이 이러하다면 300여 년 전에 지어지고 만들어진 것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이 된다. 중국인들이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훙춘에 들어서면서 산 ‘中國 南古村落 宏村’이란 책자에 따르면 훙춘은 황산산맥을 위시한 여러 산들에 둘러싸여 고립돼 있으며, 이곳 사람들 또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버리고 싶어하지 않아 옛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남다르다고 한다.

    수지당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근심당(根心堂)을 찾았다. 이 집에선 들어가는 데 4각을 받았다. 좁다란 사각형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홀이 나왔다. 이 홀을 ‘중당(中堂)’ 혹은 ‘편청(偏廳)’이라 불렀다. 앞은 열렸으나 뒤쪽은 벽으로 막혔는데, 거기에 커다란 인물화를 걸어두었다. 조상의 초상화인 듯했다. 그 양쪽에는 글씨를 적은 족자를 세로로 걸고, 양쪽의 벽면도 그림과 족자 글씨로 도배되어 있었다.

    중당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사각 탁자와 몇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모두 손때에 절어 반질거린다. 이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가족들이 만나고 손님을 맞이하는 집의 중심공간인 듯했다. 주인은 중당 외에는 보여주지 않았다. 다른 곳은 사적(私的) 공간이라 보여주기를 꺼리는 것 같았다.

    편청은 특이하게도 천장이 아주 높아 2층 높이까지 뻥 뚫려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다는 점이다. 하늘을 향해 난 구멍이 무어냐고 묻자 주인은 내가 건넨 메모지에 ‘천정(天井)’이라는 두 글자를 써 보였다. 말 그대로라면 ‘하늘에 난 우물’ 또는 ‘하늘이 담겨 있는 우물’이란 뜻이 된다. 학자들은 이 천정을 일러 중국 강남의 주거문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왜 그들이 이런 특별한 장치를 마련하게 됐을까.

    중국의 남방은 후텁지근하다. 후텁지근한 지역에선 일반적으로 나무로 집을 짓고 창이나 문을 크게 낸다. 집 앞으로는 마당도 둔다. 담은 두되 외부인이 쉽게 넘지 못할 정도 높이로만 세운다. 바람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더위를 이기는 최선의 방법은 자연의 바람이었다. 열린 집, 또는 바람을 담는 우리의 한옥은 이래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황산 아래의 후이저우 지역에선 집을 짓는 데 나무를 많이 쓰긴 하지만, 외벽은 벽돌로 높이 쌓는다. 대문도 작다. 따라서 집은 어쩔 수 없이 닫힌 구조를 갖는다. 그리하여 후이저우의 주택은 내향적이고 폐쇄적이며 방어적인 중국 주택의 일반적 특성을 공유한다.

    이 지역 주택이 폐쇄적이 된 데는 물론 까닭이 있다. 이곳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좁지만, 사람은 많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은 돈벌이를 위해 객지를 나돌게 됐다. 그들 중 일부는 소금과 차, 포목과 목재 등 생필품에서 서적과 벼루, 먹 등 문방구까지 취급하는 상인이 됐고, 더러 큰돈을 번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을 일러 ‘휘상(徽商)’이라 불렀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수지당(樹志堂)의 마루 겸 정자인 창금사. 노인들이 마작을 즐기고 있다.

    중국 10대 상방(商幇) 가운데서도 으뜸의 지위에까지 오른 휘상은 유학적 교양에 기반을 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했다 하여 특히 ‘유상(儒商)’이라 불리기도 한다. 중국판 ‘상도(商道)’라 할 수 있는 ‘상경(商經)’의 주인공 호설암(胡雪巖)도 후이저우 출신이며, ‘주자학’ 하면 떠올리게 되는 정이(程헊)·정호(程顥) 형제도 훙춘 이웃마을에서 태어났다.

    휘상은 다른 지역의 상방들과는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나는데, 일반적으로 다음의 것들이 지적되곤 한다. ▲활동범위가 넓다 ▲경영업종이 다양하다 ▲자본이 윤택하다 ▲투자에는 적극적이고 과감하다 ▲동족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동족집단과의 긴밀한 관계다. 호설암도 태평천국의 난 때 진압군 사령관이던 좌종당(左宗棠)과 결탁해 큰돈을 벌었으나, 그의 힘이 약해지자 호설암의 사업도 시들해졌으니 정치 권력과의 결탁은 어디서나 경계의 대상임에 틀림없는 모양이다.

    휘상은 한번 집을 떠나면 10년, 20년을 나다니기 때문에 집을 오래도록 비웠다. 그래서 집에는 아녀자와 노인만 남게 됐기에 ‘열린 집’을 갖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살기 위해서는 바람과 빛이 필요했기에 하늘을 향해서라도 구멍을 뚫는 수밖에 없었다.

    못 가장자리의 최대 명물은 월소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낙서당(樂?堂)’이란 이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이다. 흰색 벽체는 보이지 않는 대신 대문이 크고, 그 안쪽엔 마당과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명초 영락 연간인 15세기 초(베이징에 자금성이 지어지던 바로 그때)에 지어진 전형적인 명대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폐쇄적인 후이저우 스타일이 명초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양식은 적어도 명나라 중기 이후에 등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낙서당이란 당호는 ‘질서(즉 삼강오륜)를 지키면 화와 복이 영원하다(秩序敦倫, 永履和樂)’는 말에서 나왔다고 해서 안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대문에 커다란 자물통이 채워져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낙서당 옆으로도 돈본당(敦本堂), 경수당(敬修堂) 등 들어가보고 싶은 집들이 줄을 이었지만, 훙춘 최고의 명가라는 승지당(承志堂)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농(골목)으로 들어갔다.

    ‘존비위서’ 형상화한 承志堂

    승지당은 월소로 흘러드는 도랑을 끼고 자리잡았다. 너비 0.7m, 깊이 0.5m 정도인 도랑물이 깨끗해 사람들은 나물과 과일을 씻기도 했고 세수도 했다.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데다 물살도 느리지 않아 그렇듯 깨끗했다.

    겉에서 본 승지당은 여느 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목조로 된 의문(儀門)을 넘어서자 눈이 부셨다. 너무나 화려했던 것이다. 천정 아래의 편청은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목질 부분에 새겨진 투각(透刻) 문양과 목각 장식은 보는 이를 별세계로 이끌 만큼 대단한 수준이다.

    전해오는 말로는 이 목각 장식을 위해 장인 20명이 4년에 걸쳐 동원됐다고 한다. 천장을 지탱하는 목구조인 선자(扇子) 서까래는 튼튼하기 그지없는데, 그곳도 기둥과 벽 못지않은 목각으로 장식해놓았다. 거기에다 화지(花池)라 부르는 작은 못과 뜰도 곳곳에 들어서 있어 집주인이 얼마나 고심해 승지당을 지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방문객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문화재로만 남아 있는 이 집의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마지막엔 편청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는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후이저우 주택의 핵심요소 중 하나인 천정(天井)

    이 집을 지은 이는 청나라 말기에 소금장사로 큰돈을 번 왕정귀(汪定貴)란 휘상인데, 그는 고향 훙춘에서 16세가 되기까지 남호서원에서 ‘유학(幼學)’ ‘천자문’ ‘당시(唐詩) 삼백수’에 이어 논어, 주역, 경략전세(經略傳世), 가학(家學) 등을 배웠다. 그리고는 양저우(揚州), 주장(九江), 상하이 등지로 나가 소금 전매에 매진했다. 그 세월이 통틀어 70여 년. 8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고향으로 돌아와 노후를 보낼 요량으로 승지당을 지었던 것이다. 1855년 완공을 보았다. 왕정귀는 이 집에서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후이저우 일대에 남아 있는 집 대부분이 왕정귀처럼 오랜 객지 생활을 보내다 말년에 귀향한 이들이 큰돈과 정성을 들여 지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恨)이 서린 집인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인생을 되돌아보는 자의 달관이 이뤄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승지당의 ‘당(堂)’은 민간 저택을 일컫는 용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황제의 것은 전각이라 부르고 민간의 것은 당이라 한다(王有殿, 民有堂)”고 되어 있다. 당은 곧 살림집으로, 가족 또는 종문의 공동주택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것을 말한다.

    후이저우는 예절을 중시해온 고장이라 존비위서의 관념이 투철한데, 이는 건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7개의 누층(累層)과 9개의 천정, 60여 개의 방으로 이뤄진 승지당은 면적만 3000㎡에 이르는데, 이를 전공후사(前公後私)의 원칙 아래 편청, 뜰, 회랑 등은 공동구역으로 삼고, 나머지 개별 공간은 존비·장유·내외·친소 관계에 따라 적절히 배치했다.

    승지당 주위에는 승덕당(承德堂), 덕의당(德義堂), 삼립당(三立堂) 등이 자리잡았다. 청나라 초 강희 연간에 지어진 승덕당은 승지당에서 보았던 세련된 목각 부조를 자랑했고, 덕의당은 못과 정원이 볼 만했다. 방문객들도 뜰 이곳저곳에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청말의 염상(鹽商) 출신인 왕선곤(汪善坤)·선명(善明)·선신(善梓) 3형제가 함께 살았다는 삼립당에선 훙춘에서 흔치 않은 석주도(石雕圖·돌을 새겨 만든 그림)가 눈에 띄었다. ‘삼립(三立)’이란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일컫는다. 그 중 입언이란 말의 권위를 세운다는 뜻. 말이 많아 말의 힘과 권위가 상실돼가는 요즘 귀담아들을 얘기다.

    승덕당 뒤로는 구릉이다. 그 서쪽에 내가 흐르고, 남쪽 아래에는 반달 모양의 월소가 있으며, 마을 가장 남쪽에는 남호(南湖) 라는 커다란 못이 자리해 훙춘은 한 마리의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한다. 농과 같이 꾸불꾸불 흐르는 도랑은 소의 창자, 월소는 위, 남호는 배, 위의 양쪽에 즐비한 민가는 몸통, 냇가에 놓인 네 개의 다리는 소의 네 다리에 각각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믿는 풍수이론에 따르면 누워 있는 소의 형상, 즉 와우(臥牛)형 마을은 대대로 복을 누리고 훌륭한 자손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한다.

    ‘와호장룡’ 첫 장면 장식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훙춘 최고의 명소로 꼽히는 승지당의 편청

    이렇게 마을을 한바퀴 둘러본 다음 남호로 향했다. 앞서 본 월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다. 전망까지 탁 트여 시원하다. 한쪽은 오래된 민가들이 둑을 따라 들어섰고, 나머지 3면은 하늘을 찌를 듯한 수목들이 그늘을 만든다.

    연꽃도 더러 피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그늘 아래에는 이젤을 펴고 붓을 놀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는 베이징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다는 젊은 여선생도 있었다. 열흘 정도 이곳에서 지내다 황산에 잠깐 들른 다음 베이징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그녀를 통해 훙춘의 민박 요금이 하룻밤에 30위안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남호 한가운데에는 호수를 반으로 가르기라도 하듯 무지개 다리가 놓여 있다. 정적인 공간 속에 무언가 인공적인 것이 솟아 있으니 파격은 파격이다. 하지만 귀여운 파격이다. 이러한 남호의 정경은 리안(李安)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의 첫 장면에 나온다. 영화에서는 부산한 모습이었지만,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남호는 더없이 한가롭다.

    그 다리의 한쪽 끝에 ‘호심루’라는 누각이 있고, 그 옆이 왕정귀가 어린 시절 수학했다는 남호서원이다. 커다란 대문에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공자를 모시는 유학의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서원인 만큼 편청은 아주 넓다.

    1814년 낙성된 남호서원도 4개의 커다란 천정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드넓은 마루를 밝힌다. 아름드리 나무로 기둥과 서까래를 삼아 튼튼해 보이는데, 거기다가 목각 장식까지 더해 정교함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승지당의 목질 부분을 장식한 투각 문양

    서원의 서쪽에는 ‘망호루’라는 찻집이 있다. 여주인은 굳이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타고 2층 누각에 오르라 한다. 경치가 삼삼하다나. 정말 그랬다. 차를 한 잔 마시자 피곤이 온몸을 감싼다. 종일 얼마나 마음을 졸였고, 얼마나 걸어다녔던가. 내게 여행은 휴식이 아니라 24시간 노동이다.

    찻집을 나와 남호를 다시 일견하고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 승지당 근처의 송학당(松鶴堂)에 이르렀다. 베이징에서 온 미술선생이 권한 바도 있어 하룻밤을 보낼 생각이었다. 장기 투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게는 40위안을 받았다. 방은 2층이었으나 식사는 1층의 정자에 차려줬다. 지방신문에 훙춘이 소개된 기사를 모아둔 스크랩이 있어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나왔다. 이른 시각인데도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밥그릇을 들고 나와 골목 한쪽으로 흐르는 도랑물에 부시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는 방금 잡은 물고기의 배를 가르기도 한다. 그들 사이로 두부를 파는 사람도 지나간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필자에게 이런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현실의 삶은 우리들에게 바삐 뛸 것을 강요하지만, 마음은, 그리고 가슴은 그 옛날을 그리워한다. 과거는 단지 지나간 시절이라지만 어떻게 보면 미래일 수도 있다. 인정이 넘치고, 깨끗한 환경에서 무엇에건 쫓길 것 없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며 느긋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면 말이다. 현실과 이상,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은 서로 딴 길을 달린다. 그렇다면 우리의 운명은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결정되는 것 아니겠는가.

    국두(菊豆)가 살던 집

    다시 마을 입구로 나왔다. 훙춘을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이셴으로 갔다가 거기서 난핑(南屛)으로 갈 계획이다. 미니카는 손님을 더 태우려고 기다렸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급한 나로서는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운전기사에게 “10위안을 줄 테니 당장 이셴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시동을 걸었다. 이셴에서도 그런 식으로 난핑까지 달렸다. 난핑은 이셴 남동쪽에 있기에 시디(西遞)로 가기 전에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코스를 잡았다.

    난핑은 세계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장이모(張藝謀) 감독이 영화 ‘국두(菊豆)’를 찍은 곳이라 찾고 싶었다. 난핑은 너무도 조용했다. 산이 저 멀리서 마을을 굽어보고, 찾는 이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외국 관광객인 내가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됐다. 20위안인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에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안내원이 난핑은 이러이러한 곳이라며 투박한 영어로 일장 연설을 퍼붓는다.

    영화에서 국두가 결혼해서 살던 집은 마을 입구에 ‘엽씨지사(葉氏支?)’란 편액이 걸린 서질당(?秩堂)이었다. ‘지사’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집은 살림집이 아니라 사당이다. 가문의 번성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대문도 크고 내부도 넓다. 특히 대문은 후이저우에 흔한 ‘문조(門?)’ 형식과 달리 목조 3칸 크기에다 지붕도 크다. 용마루는 직선을 그리나 그 양쪽 끝에는 용의 꼬리 같은 것이 올려져 있다. 천장 또한 높다. 아무튼 보통집이 아니다. 그런데 내부는 온통 나무로 되어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벽면 한쪽에는 ‘국두’에 나오는 몇몇 장면이 사진으로 걸려 있다.

    현대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장이모 감독은 1990년에 ‘국두’를 찍었다. 시대 배경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 곡선은 어디에도 없고 오직 직선만이 지배하는 후이저우 스타일의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중국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인공은 염색공장의 주인인 양금산과 그에게 시집온 젊고 아름다운 아내 국두(쿵리 扮), 그리고 이들의 조카로서 집안 일을 거드는 양천청, 세 사람이다.

    일찍 상처한 데다 아들도 없는 양금산은 얼마간의 돈을 주고 국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잠자리에서도 국두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너를 돈 주고 샀으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해댄다. 그는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첫 부인에게서도 아이를 얻지 못했다. 때문에 젊은 아내에게 성적,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했다.

    그의 조카 양천청에 대한 태도도 다를 바 없다. 양금산은 이웃사람들에게 “그놈의 애비가 죽고 난 뒤 내가 그를 돌봐주지 않았다면 벌써 굶어죽었을 것이다”고 한다. 천청은 숙부의 이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고도 어쩌지 못하고 주어진 일을 말없이 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주인집 화장실로 난 구멍을 통해 숙모가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게 된다. 그러면서 별스런 꿈까지 꾼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남호서원의 편청. ‘만세사표’라 쓰인 현판에서 공자를 모시는 유학의 공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국두 또한 그 구멍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놀라 구멍을 막으려 했으나 그냥 두고 만다. 그 구멍은 결국 인륜의 벽을 헐고 두 사람이 몸을 섞는 통로로까지 작용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 천백이란 아들이 태어난다. 양금산은 천백의 출생의 비밀을 모른다. 금산에게 천백은 자신의 아들이자 천청의 동생일 뿐이다.

    양금산은 어느 날 타지로 나갔다가 몸을 크게 다쳐 하반신 불구가 됐고, 결국 붉은 물감이 가득 담긴 염색물통에 빠져 세상을 하직한다. 그래서 국두와 천청 둘만 남았으나, 숙모와 조카라는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의 불륜은 계속됐다.

    하지만 천백이 커가면서 그것마저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천백이 현장을 목격한 것이다. 그리하여 천청도 염색물통에 떠밀려 죽는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하고 세 사람, 아니 천백까지 포함해서 네 사람 모두가 불행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국두’가 전통 사회체제의 굴레를 뛰어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암울한 형상화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두’에서 서질당은 비인간적인 남편으로부터 고통받던 국두가 그 도피처로서 조카와 불륜을 저지른 곳이자,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의 현장으로 묘사된다. ‘국두’에 나왔던 물레와 염색 도구들이 지금도 바닥에 그대로 놓여 있어 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선 1층은 작업장, 2층은 살림집으로 그려져 2층으로 올라가 보고 싶었으나, 계단 앞에 ‘출입금지’란 팻말이 서 있어 나는 그리 단단해 보이지 않는 나무계단을 바라보며 ‘국두’의 마지막 장면을 그려보았다.

    토굴에서 일을 벌이다 기진맥진한 두 사람은 천백에 의해 집 안으로 옮겨진다. 국두는 자기 침대로, 천청은 1층 작업장의 염색물통으로. 그러나 그것으로 용서할 천백이 아니었다. 늘 말이 없던 그는 등에 업힌 천청을 그때도 아무 말 없이 염색물통 속으로 떠민다. 천청이 허우적거리는 소리가 국두의 귀에까지 들려와 그녀는 기어서 계단을 내려오려 하지만, 이미 기운이 소진된 뒤라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연인이 죽어가는 것을 알고 그녀는 아들을 향해 “제발 그러지 말라”며 간곡히 호소할 따름이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영화 ‘국두’의 주촬영 장소인 난핑의 명소 서질당의 대문. 서질당은 살림집이 아닌 사당이라 내부가 넓다.

    천청은 죽고, 집안 가득 널려 있던 옷감은 불에 탄다. 불은 끝내 그녀의 보금자리마저 태우고 만다. 잘못된 사랑이 모든 것을 무화시키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국두는 왜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신은 그녀에게 끝까지 관용을 베풀지 못했던 것일까.

    장이모는 이 영화를 필두로 자기만의 독특한 색채 영상미학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국두’에서 흰색은 슬픔과 순수함을, 노랑은 빛과 자유를, 청색은 노동과 격렬함을, 빨강은 섹스와 즐거움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그려냈다. 그의 이런 기법은 최근작인 ‘영웅’과 지난 5월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공연된 대형 뮤지컬 ‘투란도트’에까지 이어졌다.

    후이저우 ‘생과부’들의 밤

    서질당은 ‘국두’뿐 아니라 ‘와호장룡’의 로케이션 장소이기도 하다. ‘영웅과 전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는 중국 속담에 바탕을 둔 영화 ‘와호장룡’의 첫 장면은 무당산(武當山)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무사 리무바이(저우룬파 扮)가 청명검을 갖고 돌아오는 광경을 그리고 있는데, 그때 그가 들어간 집이 훙춘의 남호 변에 있는 수련(양쯔칭 扮)의 집이다.

    수련의 집은 외형적으로는 남호서원이지만, 실제로 리무바이가 안으로 들어가 수련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던 공간은 남호서원이 아니라 서질당이었다. 서질당은 수련이 이용(장즈이 扮)과 무술 대결을 벌인 곳이기도 하고, 이 영화에서 최고의 장면으로 평가받는 ‘대나무숲 결투’ 직전에도 나오는 등 여러 차례 등장했다.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시디의 입구에 세워진 호문광(胡文光)의 파이방. 파이방은 우리네 열녀문 같은 것이다.

    나는 ‘와호장룡’을 보다가 그렇듯 멋있는 곳이 있다는 걸 알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중국 여행길에 꼭 그곳에 들르고 싶어 훙춘과 난핑을 찾게 된 것이다. 현실의 장소가 영화 속의 그것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까 매표소에서 만난 여자 안내원이 한 무리의 학생들을 이끌고 그 집으로 들이닥쳤다. 나는 그들을 따라 서질당 옆의 300년 된 사당 건물인 규광당(奎光堂)과 상소당(尙素堂), 신사당(愼思堂), ‘국두’에 약포(약방)로 나왔던, 그래서 일명 ‘국두 약포’로도 불리는 집과 정씨(程氏) 사당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안내원이 한가한 틈을 보일라치면 가까이 다가가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국두 약포는 청대에 지어진 민가로, 주인 노부부가 방문객을 친절히 맞아줬다. 그들은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 심지어는 청대의 부잣집 부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방까지 보여주면서 여기서는 고기를 다듬고, 저기서는 차를 끓인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난핑은 작은 마을이다. 더구나 이미 훙춘에서 후이저우 양식의 건축물들을 살펴봤기에 한번 둘러보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표소로 다시 나와 얼마간 기다리고 있는데, 차가 한 대 들어오길래 그걸 집어타고는 시디로 가자고 했다.

    시디는 훙춘, 난핑과는 달리 마을 입구에 대형 관광버스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도 다녀갔다며 그를 담아낸 대형 그림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만으로도 시디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디 입구에는 또 커다란 파이방(牌榜)이 서 있었다. 파이방은 장식용으로 세워두는 것으로 알았는데, 여기 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종의 열녀문 같은 것이었다. 후이저우 여인들은 남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에 혼자서 아이들과 노인들을 돌봐야 했다. 그러면서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한마디로 ‘생과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다 남편이 큰돈을 벌어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늙고 병들었거나 아니면 먼저 저세상으로 떠나고 난 뒤이기 일쑤였다. 남자들은 그런 아내의 정절을 기리고자 파이방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의 여인네들은 남편이 없는 긴긴 밤을 견디기 어려울 때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보냈다는데, 후이저우 여인들은 저녁이 오면 동전 한움큼을 땅바닥에 뿌리고 줍기를 거듭하다 새벽녘에야 잠에 들곤 했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우람하지만, 파이방에는 그런 슬픈 사연이 담겨 있다.

    최소 150년 역사의 고건물 군락

    ‘와호장룡’과 ‘국두’의 고향 훙춘(宏村)·시디(西遞)

    시디 마을은 효를 숭상하는 곳으로, ‘효(孝)’자를 크게 써붙여 놓은 집들이 많다. 경애당(敬愛堂)도 그런 곳의 하나인데, 천장의 목질 부분은 굵은 선자 서까래로 되어 있어 탄탄해 보인다.

    시디는 훙춘보다는 작은 촌락이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골동품 가게가 즐비하다. 모두 중국 전통생활에 쓰이던 것들로, 그 중엔 수석(壽石)과 차(茶)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한 쪽에선 풀무질로 불을 일으켜 농기구를 다듬는 작업장도 보였다.

    보트 모양으로 생긴 시디는 가옥의 구조와 형태, 크기에서 누워 있는 소의 형상을 한 훙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곳에서는 효를 보다 중시하는지,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朱熹)가 쓴 ‘효(孝)’ 자를 본뜬 글씨를 걸어둔 곳이 많았고, 문중의 사당도 자주 눈에 띄었다. 또 성씨별로 족보를 가르쳐주는 족보방도 있었다.

    이들 세 마을엔 현대식 건축물은 아무것도 없다. 최소 150년의 역사를 가진 것들로 이뤄져 있다. 이런 사정은 이들 세 곳뿐 아니라 이셴 일대의 어정(漁停)과 기문(祁門), 휴녕(休寧), 툰시 동북쪽 흡현(?縣) 일대의 지시(績溪), 당모(唐模), 웅촌(雄村) 등에서도 마찬가지라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니 후이저우를 ‘소도원(小桃園)’이라 부른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각국은 지금 고유의 문화유산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단순히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생존권과 연계돼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겠지만 아직 이런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신기해 보였다.



    가치(price가 아니라 value)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 안의 힘으로. 생각을 바꾸면 내 안의 힘은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못할 게 있겠는가. 지금은 문화의 시대이고, 관광은 둘도 없는 고부가가치산업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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