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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한인 발자취를 찾아서 ③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집은 크고 튼튼하며 마당엔 잘 자란 가축이 놀고

  • 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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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중 국경지역 한인마을들

연추지역에 있는 파타쉬 마을(현재명 카므이쇼브이 마을) 입구.

장고봉전투와 노몬한전투는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해 공포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특히 일본 군벌 내에서 유럽식민지인 동남아시아로 진격하자는 해군중심의 이른바 남진파(南進派)가 득세하고 소련과 전쟁을 벌이자는 육군중심의 북진파(北進派)의 입김이 약화되는 중요한 원인이 됐다. 장고봉과 노몬한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대규모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을 좌우한 하나의 계기였던 셈이다.

한편 핫산지역에 있었던 한인마을의 한자식 이름은 와봉(臥峰)이었다. 와봉마을은 다시 상(上)와봉과 하(下)와봉의 두개 마을로 나누어졌다. 한인들은 이들 두 마을을 순수한 우리말로 부르기도 했던 것 같다.

러시아기록에는 상와봉은 파드고르니(Podgornyi) 또는 우니불미(Unnyburmy), 하와봉은 나고르나야(Nagornaia) 또는 니불미(Nyburmi)라고 표기돼 있다. 이를 좀더 설명하면 ‘니불미’는 ‘누울 뫼’ 즉 한자어 ‘와봉’이 되고 ‘우니불미’는 ‘상와봉’이 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한인마을 가운데 현재의 핫산은 과거 상와봉이 위치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비숍이 “강 위에 솟아 나온 경사진 언덕에 높다란 표지석이 러시아와 청국 간의 국경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묘사한 곳이 바로 이 핫산이다. 여기에서 표지석이란 러시아와 청국 간의 국경조약에 따라 세워진 정계비(定界碑)를 말한다. 핫산지역은 또한 1908년 여름 안중근을 비롯한 동의회(同義會) 의병부대가 국내 진격시 경흥으로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와봉의 북한 쪽 건너편은 용현(龍峴)이다.

어쨌든 이 두 마을(상와봉, 하와봉)을 구별하지 않고 총칭할 때는 나고르나야 데레브냐(Nagornaia Derevnia)라고 했다.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는 1875년 남쪽에 한인마을 크라스노예 셀로가 형성되면서 여기에 부속돼 있다가 1889년에 독립됐다. 초기의 주민 대다수는 조선에서 직접 건너온 사람들이었지만, 일부는 포시에트만의 크라베(Krabbe)섬에서 이주해온 가구들도 있었다. 1895년 무렵에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는 세 개의 작은 마을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 18가구, 8가구, 4가구였다. 러시아당국이 1906~07년경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나고르나야 데레브냐의 인구는 38가구 260명(입적자 27가구 203명, 비입적자 11가구 57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14년경에는 70가구로 늘어났으며, 러시아문무성의 인가를 받은 마을학교에는 1명의 교사가 38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고종(高宗)에 의해 1880년대 초 남부우수리 지역에 파견돼 이 지역의 한인마을들을 조사했다. 이들이 귀국 후 1885∼86년경에 작성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서 남북 10리 동서 20리, 남쪽으로 녹둔과 70리, 서쪽으로 경흥과 40리, 북쪽으로 나선동(羅禪洞)과 40리, 동쪽으로 연추영(延秋營)과 60리 떨어져 있다고 설명한 한인마을 서선택촌(西仙澤村)이 바로 이 나고르나야 데레브냐로 추정된다. 당시 주민은 76가구 478명에 달했다. 이 지도에는 서선택촌에 러시아수비대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수비대의 막사가 비숍이 1894년 가을 하룻밤을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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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반병률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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