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8월호

헤어디자이너 박준의 ‘보양닭죽’

가위손의 환상요리, 한여름 더위를 죽이는 죽(粥)

  • 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사진: 김용해 기자 sun@donga.com

    입력2003-07-30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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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유의 마늘 향에 구수한 국물이 일품인 닭죽.
    • 부드럽고 소화가 잘 돼 입맛을 잃기 쉬운 여름철 보양식으로 최고다. 여기에 인삼과 대추, 버섯, 밤 등을 함께 넣으면 맛과 영양이 배가된다.
    헤어디자이너 박준의 ‘보양닭죽’
    “헤어디자이너가 아니라면 가수가 됐을 겁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최고의 남성 헤어디자이너 박준(朴俊·52)씨의 요즘 애창곡(속칭 18번)은 남진의 ‘모르리’. 최신곡이다. 그의 가창력은 ‘가수 뺨칠 정도’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평가다.

    하지만 그는 헤어디자이너의 길을 택했고, 그 길에서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에게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요즘 많은 이들이 꿈꾸는 ‘로또복권’인 셈이다. 물론 그 가치와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막막한 미래, 가난한 현실에 고민하던 14세의 어린 소년은 결국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단돈 500원을 들고 ‘성공’을 꿈꾸며 무작정 서울로 향한 것.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이었다. 돈은 물론이고 배운 것도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건설현장 막노동부터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수, 술집 웨이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서울 종로구 YMCA빌딩에 있던 미용실이었다. ‘금남의 구역’처럼 여자들만 가득한 그곳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도전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21세 되던 1972년의 일이었다. 여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미용실에서의 생활. 그 속에서 그가 겪은 고초와 치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기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로부터 9년 만인 1981년, 그는 드디어 서울 명동의 한복판에 자신의 미용실을 연다. 그리고 미모의 한 여성을 만났다. 미용실을 자주 드나들던 손님의 추천으로 함께 일하게 된 메이크업 아티스트 임승애(林承愛·48)씨. 그녀는 지금 사랑스런 그의 아내이자 동업자다.



    “처음 봤을 때는 (수염 때문에) 염소 같았어요. 그런데 같이 일하면서 보니까 성실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더군요. 학술 세미나가 있는 곳이면 지방 어디든지 쫓아갔다가 올라와 밤새워 혼자 공부하고, 또 낮에는 식사시간만 빼고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부인 임씨를 반하게 한 건 바로 그의 성실함과 열정이었다.

    서울, 부산과 뉴욕, 런던, 밴쿠버, 프랑크푸르트 등 국내외 프랜차이즈가 70개(현재는 90개 정도)에 이를 정도로 유명 헤어디자이너이자 사업가가 된 2000년 1월 그는 또 한 번의 도전에 나섰다. 홀로 영국 유학 길에 오른 것.

    “영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런던 시내 어학원을 다녔는데 한국 사람이 많아서인지 별로 늘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이 드문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겨 그곳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했죠. 거지 친구(홈리스족)를 사귀었는데 그건 쉬웠죠. 돈만 주면 됐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유학생활 동안 건강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혼자 살면서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 그때 그가 주로 애용했던 음식이 바로 ‘닭죽’이다. 기력을 보충하려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닭죽을 먹었다.

    헤어디자이너 박준의 ‘보양닭죽’

    “헤어디자이너는 최고의 아티스트다. 살아 움직이는 예술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닭죽’은 매우 독특하다. 일반적인 요리법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먼저 신선한 닭을 골라 깨끗이 씻은 다음 배 한가운데를 갈라 찜통에 넣고 마늘과 함께 1시간 이상 푹 곤다. 마늘은 닭 1마리 당 4∼5통 정도 넣는다.

    마늘이 다 으깨질 정도로 삶아지면 인삼과 대추, 밤, 세송이버섯 등을 넣고 익힌 후 마지막으로 미리 (30∼40분 이상) 불려놓은 찹쌀을 넣는다. 이때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밥알이 푹 퍼질 때까지 주걱으로 잘 저어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삶은 닭을 꺼내 뼈에서 살을 발라내고 닭국물에 쌀을 넣어 죽을 쑤는 데 반해 ‘박준표 닭죽’은 닭을 통째로 함께 삶는다. 닭은 충분히 삶아지면 찜통 안에서 거의 부서진다. 간은 마지막 단계에서 소금과 설탕을 조금씩 넣어 조절하거나 나중에 취향에 따라 조절해 먹어도 된다.

    특유의 마늘 향과 구수한 국물에 담백한 찹쌀이 어우러진 닭죽의 맛은 입 안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에 딱 맞다. 뜨거운 복날 땀에 흠뻑 젖으며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금세 원기가 회복되는 것만 같다.

    박준씨도 그 덕에 2년 반 정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유학생활에서 그가 체험하고 배운 것은 무척 많다. 국내에서 최고의 헤어디자이너로 손꼽히던 그가 영국 현지 미용실에서는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직접 체험하고 느꼈다. 그는 프로였다.

    유명 헤어아카데미에서 강좌를 듣고, 3개월 정도 런던 시내 미용실에 취직해 직접 영국 사람들의 머리를 손질하면서 실내청소까지 도맡아했다. 30여 년 전 그가 미용실에서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을까.

    헤어디자이너 박준의 ‘보양닭죽’

    박씨의 요리솜씨를 지켜보고 있는 한기철, 구남희씨 부부.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낸다고.

    “항상 처음 시작하던 그때처럼 살고자 노력합니다. 어려울 땐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곱씹죠.”

    그에게도 실패는 있었다. 헤어디자이너로 성공한 이후 웨딩드레스 전문점을 열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아야 했던 것.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여기에서 그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앞으로 제 분야가 아니면 외도를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도전을 좋아하다 보니 전문분야가 아닌 것에도 많은 유혹을 느끼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이제는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꿈도 새롭게 세웠다. 지금까지는 헤어디자이너 양성과 재교육을 위한 ‘헤어디자이너 전문대학’을 세우는 것이 인생 목표였지만 이제는 아니다. ‘박준’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두발제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꿈이다. 세계적인 헤어디자이너 비달 사순이나 폴 미첼, 토이 앤 가이처럼.

    “저는 모방을 좋아합니다. 창조력은 조금 떨어지거든요”라며 환하게 웃는 얼굴에 겸손함과 소탈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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