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그는 헤어디자이너의 길을 택했고, 그 길에서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에게 헤어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요즘 많은 이들이 꿈꾸는 ‘로또복권’인 셈이다. 물론 그 가치와 의미는 전혀 다르지만.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막막한 미래, 가난한 현실에 고민하던 14세의 어린 소년은 결국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단돈 500원을 들고 ‘성공’을 꿈꾸며 무작정 서울로 향한 것. 일단 부딪쳐보자는 생각이었다. 돈은 물론이고 배운 것도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다. 건설현장 막노동부터 구두닦이, 아이스케키 장수, 술집 웨이터까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간 것이 있었다. 친구를 만나러 나간 서울 종로구 YMCA빌딩에 있던 미용실이었다. ‘금남의 구역’처럼 여자들만 가득한 그곳을 보면서 그는 새로운 도전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21세 되던 1972년의 일이었다. 여자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미용실에서의 생활. 그 속에서 그가 겪은 고초와 치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기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로부터 9년 만인 1981년, 그는 드디어 서울 명동의 한복판에 자신의 미용실을 연다. 그리고 미모의 한 여성을 만났다. 미용실을 자주 드나들던 손님의 추천으로 함께 일하게 된 메이크업 아티스트 임승애(林承愛·48)씨. 그녀는 지금 사랑스런 그의 아내이자 동업자다.
“처음 봤을 때는 (수염 때문에) 염소 같았어요. 그런데 같이 일하면서 보니까 성실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더군요. 학술 세미나가 있는 곳이면 지방 어디든지 쫓아갔다가 올라와 밤새워 혼자 공부하고, 또 낮에는 식사시간만 빼고 하루종일 서서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부인 임씨를 반하게 한 건 바로 그의 성실함과 열정이었다.
서울, 부산과 뉴욕, 런던, 밴쿠버, 프랑크푸르트 등 국내외 프랜차이즈가 70개(현재는 90개 정도)에 이를 정도로 유명 헤어디자이너이자 사업가가 된 2000년 1월 그는 또 한 번의 도전에 나섰다. 홀로 영국 유학 길에 오른 것.
“영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런던 시내 어학원을 다녔는데 한국 사람이 많아서인지 별로 늘지 않더군요. 그래서 한국인이 드문 옥스퍼드로 거처를 옮겨 그곳 사람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했죠. 거지 친구(홈리스족)를 사귀었는데 그건 쉬웠죠. 돈만 주면 됐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유학생활 동안 건강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혼자 살면서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기 때문. 그때 그가 주로 애용했던 음식이 바로 ‘닭죽’이다. 기력을 보충하려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닭죽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