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영 대법원장은 여성 법관 중에서 대법관이 나올 때가 됐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건국 이후 첫 여성 대법관을 제청한 대법원장이라는 기록을 남기려는 욕심이었을까. 그는 지난해 8월에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여성인 전효숙씨를 지명했다.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은 사항이지만, 최 대법원장은 대법관 제청자문위원회에 이영애 전수안 김영란씨 3명을 올렸다. 모두 여성 법관이다. 제청자문위는 법조계와 시민단체, 개인의 추천을 더 받아 그중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씨 4명을 골라냈다. 최 대법원장은 이중에서 김영란씨를 노무현 대통령에게 단독 제청했다.
국회에서 인준안이 압도적 다수(찬성 208표)의 찬성으로 통과된 날 남편인 강지원(55)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김 대법관과 함께 있다고 했다. 김 대법관이 “대법원에 나가지 않는 토요일에 집에서 인터뷰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오전 9시에 하자”고 제의하자 “집안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 신경 쓰이는데…” 하면서도 동의했다.
실례를 무릅쓰고 토요일 아침 분당 신도시에 있는 김 대법관 집을 찾아갔다. 강 변호사는 없었다. 그는 매일 아침 KBS 1라디오에서 ‘안녕하십니까, 강지원입니다’라는 시사프로그램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다.
최종영 대법원장이 단독 제청
판사들은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하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간다. 재판연구관은 대부분 판사들이 경력에서 지워버리고 싶어할 정도로 고달프다는 자리다. 김 대법관은 2년 임기의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5년이나 했다. 이때 쌓은 실력과 성실성은 대법관이 되는 데 밑받침이 됐다.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을 할 때 최종영 대법원장은 대법관과 법원행정처장을 번갈아 하고 있었다.
-최 대법원장이 대법관을 할 때 김 대법관이 재판연구관 시절에 올린 검토보고서를 읽어볼 기회가 자주 있었겠군요.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고 뵈었더니 말씀하시더라고요. 내가 썼던 검토보고서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고.”
-그때 실력을 인정받은 거로군요.
“우리가 재판연구관으로 갈 때는 다 실력 있는 사람들로 뽑아간다고 했죠. 동기들이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 갈 때도 나를 안 내보내고 2년간 더 연구관 일을 시켰죠. 내가 동기들보다 1년 먼저 갔고 2년은 동기들하고 같이 있었고 2년은 동기들 떠난 후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5년이죠. 동기인 김수형씨(서울고법 부장판사)와 내가 최장기록을 세웠는데 그 기록이 아직 안 깨지고 있어요.”
재판연구관에는 대법관에 전속된 연구관이 있고 공동 연구관이 있는데 김 대법관은 공동 연구관이었다. 공동 연구관에게는 새로운 판례를 만드는 어려운 과제가 배당된다.
-강병섭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은 법원을 떠나면서 사법부가 바깥바람에 흔들린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요.
“대법원장이 시기적으로 여성 헌재재판관이나 여성 대법관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지 오래라고 해요. 나도 신문만 봐서 잘 모르겠지만 (강병섭 원장이) 무얼 항의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서 역차별이 아니냐고 질문하는 의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청과정에 시민단체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김 대법관은 대법관 제청후보가 발표된 후 사표를 낸 이영애 전 춘천지방법원장(사시 13회)에 관한 언급은 피했다. 김 대법관의 경기여고 서울법대 선배인 이영애씨는 전효숙 헌재 재판관 임명 때도 비켜갔으니 인사권자의 마음 밖에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 같다.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대답하기 난감했던 질문은 어떤 거였습니까.
“국가보안법, 친일진상규명법처럼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안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판사가 분명한 의견을 공개하면 재판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판결의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여당 쪽에 가까운 답변을 하면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돼 야당 쪽에서는 내 판결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