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과의사로, 직업배우로, 성공한 기업가로, 정치인으로, 신영균은 일평생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아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일마다 성공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거뒀다는 점이다. 아무리 보아도 신이 사랑했거나 운명의 여신이 보호했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이 억세게 운 좋고 재수 좋은 배우는, 그러나 ‘노력했다’는 말 외에는 성공의 비결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영균의 성공은 이미 40여년 전에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찾아본 1960~70년대의 인터뷰들은 한결같이 배우 신영균에 대해 ‘말이 없고 겸손하며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말하고 있다.
1962년 ‘여원’지에 당대의 여성작가 장덕조씨가 쓴 신영균에 대한 평가는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인상적인, 명동 어느 바에서 어깨로 도어를 밀고 나온다면 깡패처럼 보일 것이오, 합바지에 저고리를 입고 괭이를 든다면 농삿군일 것이고 미남은 아니지만 쾌남이다. 야성의 정, 신영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표기법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살렸음).
배우로서 신영균은 1960년부터 1978년까지 근 20년 동안 29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데뷔 다음해에 ‘마부’ ‘상록수’ ‘연산군’ 등 대한민국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영화에 줄줄이 출연했던 그는 김수용과 유현목, 이만희, 신상옥 같은 한국 영화계의 거장들이 가장 선호하는 남자 배우였다.
뭐니뭐니 해도 신영균은 선이 굵은 배우다. 당대의 배우 최무룡과 김진규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연기로 정한이 가득한 멜로물에 등장해 고뇌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면, 신영균은 누군가를 호령하고 지휘하는 능동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역시 선 굵은 카리스마를 자랑했던 배우로 남궁원을 들 수 있겠지만, 남궁원이 댄디한 멋스러움, 귀족적인 고아함을 갖춘 배우라면 신영균은 스펜서 트레이시를 사랑한다는 취향답게 자연에 가까운, 속 깊은 심성이 작중 인물에 배어나오는 그런 배우다.
임금 머슴 군인 장남
그리하여 필모그래피에서 신영균의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데뷔작 ‘과부’를 필두로 ‘갯마을’ ‘무영탑’ ‘봄봄’ 등에서 보여주었던 머슴 역할. 이들 영화에서 신영균은 가진 것 없이 힘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연 그 자체의 괴력과 담력을 지닌 사나이로 등장한다.
곰처럼 미련하고 소처럼 순박한 대한민국 민초의 원형적인 모습을 담은 이 역할은 사실 김유정이나 김동리 같은 한국문학 작가들이 즐겨 그려낸 남성상의 하나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신영균이라는 배우가 지닌 자연친화적인 동력은 그로 하여금 1960년대 부흥했던 문예물 영화의 단골주인공으로 자리잡게 하는 요인이 됐다.
둘째로는 배포 큰 임금 역할을 들 수 있다. 신영균은 인터뷰에서도 밝히듯 연극에서 연기 기량을 닦아 행동이 크다거나 내면연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연기가 원색의 곤룡포를 입었을 때는 전혀 사정이 달랐다. 임금임에도 인간적인 고뇌에 사로잡혀 포악함으로 뭇사람을 벌벌 떨게 만든 ‘연산군’은 단연코 신영균을 1960년대 최고스타의 자리에 세워놓았다.
이외에도 ‘대원군’ ‘태조 이성계’에서 그는 당대를 호령하는 권력자의 기개를 펴며 주변 사람들을 압도하는 남성적인 매력을 스크린 가득 발산한다. 껄껄 웃으며 책상을 치거나 여성의 치마폭을 헤집고 다니며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연산군의 이미지는, 신이 내린 어릿광대 같은 비통한 카리스마와 광폭한 에너지가 부딪치며 묘한 자장(磁場)을 형성한다. 그것은 신영균이 선천적으로 지닌 풍모와 장쾌함의 에너지가 연산군의 본질과 가장 맞아떨어지는 지점이었다.
셋째는 군인 혹은 장수의 역할이다. 신영균은 ‘5인의 해병’ ‘군번 없는 용사’ ‘인천상륙작전’ ‘빨간 마후라’ ‘천년호’ ‘남과 북’ 등 여러 영화에서 군인 또는 장수로 분했다. 이 역할이 전자의 임금 역과 다른 점은, 욕망에 충실한 권력지향적인 인물이라기보다 의리와 정절로 똘똘 뭉친 충성스러운 인간이라는 점이다. 진성여왕의 끈질긴 유혹에도 결코 아내를 버리지 않는 ‘천년호’에서의 비운의 장수, 비록 남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녀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깡그리 저버리는 ‘남과 북’에서의 군인 역, 전사한 동료의 아내를 남몰래 사모하는 ‘빨간 마후라’에서의 교관 역 등이 그것이다.
본인 스스로는 “멜로는 어색했다”고 말하지만, 차마 사랑을 입에 담지 못하는, 정서적 억압이 심한 남성상은 신영균의 연기세계에 묘하게도 정서적인 향기를 불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