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는 던져졌다. 율리우스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듯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퇴로(退路)는 스스로 끊었다. 운명과 흥망을 걸고 겨루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다. 승부에는 위험이 따른다. 이긴다고 해도 역풍(逆風)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러날 수는 없다. 진다고 하더라도 당당한 패자(敗者)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당당한 패자에게 관대하다. 더구나 완패(完敗)란 있을 수 없는 싸움이고, 시간은 미래권력의 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세종시 원안을 수정하는 것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삽화(揷畵)로 대신한다면 ‘노무현이 박았던 대못을 이명박이 뽑으려 하는데 박근혜가 막아선 형국’이다. 정세균(민주당 대표)도, 이회창(자유선진당 총재)도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른바 현재권력(이명박) 대(對) 미래권력(박근혜)의 완벽한 구도다. 명색이 제1야당인 민주당은 머쓱할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수정에 반대하는 거야 쌍수를 들어 환영할 노릇이로되 싸움이 이-박의 대결로 부각될수록 자신들의 존재감은 미약해지니 말이다. 충청의 새로운 맹주를 꿈꾸는 자유선진당도 딱해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당 대표를 비롯한 간부들이 줄줄이 삭발을 한들 ‘박근혜의 한마디’에는 어림없으니까 말이다.
박 전 대표는 정부의 수정안에 대해 “(기존의) 특별법 안에 자족기능이 다 들어 있는데, 발표된 내용엔 원안은 빠지고 플러스알파만 있다. 사실 그런 내용은 행복도시특별법의 자족도시 내용에 이미 들어있다.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뢰만 잃게 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충청권 여론이 바뀐다면 생각을 바꾸겠느냐는 물음에는 “(충청여론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이미 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하겠다는 약속을 국민에게 여러 번 했고, 법 제정도 한 것을 두고 정부가 저를 설득하려고 하니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한 것인데 말뜻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고 답했다.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이 시도지사 초청 간담회에서 세종시 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 데 대해서도 “저는 국민과 한 약속을 지키라는 얘기”라며 “약속할 때는 얼마나 절박했느냐”고 반문했다. 충청표를 구할 때는 여러 차례 원안대로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는 노골적인 힐난이다. 이 대통령도 그 점은 이미 인정했고 사과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한다”고 했다. 세종시 수정의 총대를 멘 정운찬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요약했다.
“개인이든 국가든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과거의 약속에 조금이라도 복선이 내재돼 있다면 뒤늦게나마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나라를 생각하는 지도자의 용기 있는 결단이라고 생각한다.”
정 총리가 어렵게 표현한 ‘내재된 복선’을 한마디로 말하면 표(票)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강력하게 반대했던 행정도시 건설을 대선후보가 되자 ‘이명박표 명품도시’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충청표를 얻기 위해서였다. 노무현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2004년 10월)로 무산된 신행정수도를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바꿔 수도 분할을 추진하는데 한나라당이 합의(2005년 3월)한 것도 2007년 대선에서 충청표를 잃을까 우려해서였다. 신행정수도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토 균형발전의 가치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 역시 “(행정수도 공약으로 충청표를 얻는 데) 재미 좀 봤다”고 했다. 결국 세종시 문제의 근원은 표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시 수정에는 표가 작용하지 않을까? 이 대통령 자신이야 더 표를 의식할 이유가 없다. 하기에 “개인적으로는 많은 점에서 불리하다. 욕먹고 정치적으로 손해다”라는 말을 의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세종시 원안 수정은) 정치적 차원이 아니고 백년대계를 위한 정책적 차원”이란 말에서 업적에 대한 욕망이 엿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장의 표와는 무관한 일이다.
그러나 친박계의 유승민 의원은 세종시 수정안 또한 “충청표를 의식한 위선적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한다. 정부가 세종시 원안 파기에 따른 충청도민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국민혈세로 재벌에게 특혜를 주는 정경유착과 세종시 이외의 지방을 모두 죽이는 잔인하고 위헌적인 차별”을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 수정안의 핵심은 “땅값, 세금, 보조금, 과학비즈니스벨트, 이주민에 대한 특혜와 권력이 직접 나서서 기업, 연구소, 대학, 의료기관 등에 세종시로 가라고 강박(强迫)을 서슴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을 특별사면하면서까지 삼성이 세종시에 투자하도록 만든 것이 강박의 명백한 증거”가 아니냐는 것이다.
유 의원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특별사면과 삼성의 세종시 투자를 직접 연계한 근거는 뚜렷치 않다. ‘세종시 이외의 지방을 모두 죽인다’는 표현도 과장돼 보인다. 그러나 특혜는 분명하다. 예컨대 정부는 평(3.3㎡)당 평균 227만원을 들여 조성한 세종시 터를 원가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 가격(3.3㎡당 원형지 36만~40만원+추가 조성비용 38만원=74만~78만원)에 입주 기업과 대학에 공급하기로 했다. 이런 계산대로라면 삼성 한화 웅진 등 대기업과 고려대 카이스트 등 대학은 땅값에서만 2조원 이상의 특혜를 받는 셈이다. 그 몇 배 투자하고 고용을 늘리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헐값 토지에 세제 · 재정 지원, 보조금까지 받는다면 파격적 특혜가 아닐 수 없다. 땅값을 조성원가의 3분의 1, 4분의 1로 하려면 그 차액은 공기업인 토지주택공사 부담으로 돌아간다. 토지주택공사의 부담은 정부의 재정 부실로 이어지고 결국은 국민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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