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의 한 장면. 신데렐라 유형의 스토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상드리용’을 모델로 삼고 있지만 주인공이 요정 대모의 힘에만 수동적으로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내 기억 속의 신데렐라나 인어공주는 ‘신분상승의 우화’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겪고 지나가야 할 슬픔의 통과의례였던 것 같다. 계모와 자매의 구박으로 고통 받는 신데렐라, 인간이 되기 위해 혀를 잘라내고 목소리를 잃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인어공주. 그녀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강인한(그래서 한편으로는 끔찍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아이샤바. 얼마나 슬펐을까요”로 시작되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신데렐라 이야기가 자아내던 묘한 슬픔의 정서를 기억할 것이다. 이 노래는 ‘얼마나 슬펐을까요’‘얼마나 울었을까요’라고 끝날 뿐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이 없다. 어린 마음에 각인된 신데렐라는 ‘가파른 신분상승’의 이미지가 아니라 계모와 언니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비련의 이미지였다. 인어공주는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으로 일관되던 비극적인 캐릭터다. 혀를 잘라내고 목소리까지 빼앗긴 후 얻게 된 ‘인간의 다리’는 인어공주에게 끝내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상처 혹은 매혹의 풍경
어린이들은 슬픔으로부터도 배운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늘 고난을 딛고 성공하는 것만은 아님을. 슬픔은 교훈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더 짙은 쾌락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된 ‘인어공주’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엄청난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인어공주가 끝내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거품으로 사라져가는 결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이라니. 인어공주의 OST나 아름다운 영상은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인어공주 ‘에리얼’로 인해 내 소중한 슬픔의 한 기원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아니라 디즈니가 만들어낸 ‘에리얼전(傳)’이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신데렐라는 여전히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과 아버지의 외면으로 고통 받고 있고, 인어공주는 인어도 인간도 아닌 거품이 되어 끝없이 바다 위를 표류하는 길 잃은 넋이었다.
우리는 신데렐라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삭제하고 무엇을 섭취해온 것일까. 혹시 비판하기 편리한 형태로,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의 ‘핵심 개념정리’만 열심히 반복해온 것이 아닐까. 백마 탄 왕자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봄으로써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킨다는 식의 비판만으로는 인어공주와 신데렐라의 매혹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이 두 작품은 너무 많은 문화적 테마, 철학적 화두를 담고 있다.
판본의 문제도 크다. 가장 대중화된 신데렐라 판본은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것이다. 이 동화는 페로 개인의 세계관을 강하게 노출하고 있어 민담으로서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르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인어공주 이야기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완전히 변형된 스토리와 세계관을 담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모든 갈등의 디테일을 배제하고 앙상한 잔해만 남은 스토리라인으로 동화를 ‘읽는’ 아기자기한 재미를 제거해버렸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해온 두 동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출하고 무엇을 배제해왔을까. 우리는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간과했을까. 왜 이 동화가 여성의 운명을 상징하는 원형적 스토리로 자리 잡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