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호

콤플렉스로 얼룩진 어른들의 동화

신데렐라와 인어공주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2-02 15:1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제게 남은 삼백 년의 세월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찬란한 세계로 갈 수만 있다면 말이에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 중에서
    콤플렉스로 얼룩진 어른들의 동화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의 한 장면. 신데렐라 유형의 스토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상드리용’을 모델로 삼고 있지만 주인공이 요정 대모의 힘에만 수동적으로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동화를 둘러싼 ‘집단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 사이에는 종종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나에겐 신데렐라와 인어공주가 특히 그렇다. 이 두 이야기는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동화였지만, 커가면서 세간의 무수한 지탄을 목격하고 점점 혼란에 빠졌다. 신데렐라와 인어공주를 좋아하는 내 자신이 정말 ‘공주병’에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된 것이다.

    내 기억 속의 신데렐라나 인어공주는 ‘신분상승의 우화’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겪고 지나가야 할 슬픔의 통과의례였던 것 같다. 계모와 자매의 구박으로 고통 받는 신데렐라, 인간이 되기 위해 혀를 잘라내고 목소리를 잃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인어공주. 그녀들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강인한(그래서 한편으로는 끔찍한) 캐릭터였던 것이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바샤바아이샤바. 얼마나 슬펐을까요”로 시작되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신데렐라 이야기가 자아내던 묘한 슬픔의 정서를 기억할 것이다. 이 노래는 ‘얼마나 슬펐을까요’‘얼마나 울었을까요’라고 끝날 뿐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이 없다. 어린 마음에 각인된 신데렐라는 ‘가파른 신분상승’의 이미지가 아니라 계모와 언니들에게 늘 구박당하는 비련의 이미지였다. 인어공주는 말할 것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슬픔으로 일관되던 비극적인 캐릭터다. 혀를 잘라내고 목소리까지 빼앗긴 후 얻게 된 ‘인간의 다리’는 인어공주에게 끝내 행복한 인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상처 혹은 매혹의 풍경

    어린이들은 슬픔으로부터도 배운다. 동화 속의 주인공이 늘 고난을 딛고 성공하는 것만은 아님을. 슬픔은 교훈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더 짙은 쾌락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각색된 ‘인어공주’를 처음 봤을 때 받은 엄청난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인어공주가 끝내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하고 거품으로 사라져가는 결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왕자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이라니. 인어공주의 OST나 아름다운 영상은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만들어낸 인어공주 ‘에리얼’로 인해 내 소중한 슬픔의 한 기원을 잃어버린 듯한 상실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것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아니라 디즈니가 만들어낸 ‘에리얼전(傳)’이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내 마음속에 살아 있는 신데렐라는 여전히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과 아버지의 외면으로 고통 받고 있고, 인어공주는 인어도 인간도 아닌 거품이 되어 끝없이 바다 위를 표류하는 길 잃은 넋이었다.



    우리는 신데렐라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삭제하고 무엇을 섭취해온 것일까. 혹시 비판하기 편리한 형태로, 신데렐라와 인어공주의 ‘핵심 개념정리’만 열심히 반복해온 것이 아닐까. 백마 탄 왕자를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봄으로써 여성을 남성에 종속시킨다는 식의 비판만으로는 인어공주와 신데렐라의 매혹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이 두 작품은 너무 많은 문화적 테마, 철학적 화두를 담고 있다.

    판본의 문제도 크다. 가장 대중화된 신데렐라 판본은 프랑스 작가 샤를 페로의 것이다. 이 동화는 페로 개인의 세계관을 강하게 노출하고 있어 민담으로서의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르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인어공주 이야기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통해 완전히 변형된 스토리와 세계관을 담고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모든 갈등의 디테일을 배제하고 앙상한 잔해만 남은 스토리라인으로 동화를 ‘읽는’ 아기자기한 재미를 제거해버렸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반복해온 두 동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출하고 무엇을 배제해왔을까. 우리는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간과했을까. 왜 이 동화가 여성의 운명을 상징하는 원형적 스토리로 자리 잡았을까.

    옛날에, 아내가 죽자 재혼한 어떤 귀족이 있었어요 … 남편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은 죽은 어머니를 닮아 아주 착하고 온화했어요. 결혼식이 끝나자 계모는 고약한 마음씨를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 계모는 착한 딸에게 힘든 집안일을 모두 맡겼어요. 착한 딸은 설거지와 계단청소는 물론, 새어머니와 그 딸들의 방도 청소해야 했어요. 착한 딸은 지붕 밑 다락방에서 짚을 넣은 초라한 침대에 누워 잠을 잤어요. 불쌍한 소녀는 아버지에게 불평도 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뎠어요. 소녀는 불평을 하면 아버지에게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계모에게 쩔쩔맸거든요.

    -샤를 페로 글, 에바 프란토바샤 그림, 유말희 옮김, ‘페로동화집’, 주니어파랑새, 2001, 235쪽.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신데렐라. 그 첫 번째 의혹은 ‘신데렐라가 정말 그렇게 착하기만 했을까’하는 것이다. 다소 ‘삐딱해진’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착한’‘불쌍한’이라는 형용사가 반복적으로 쓰인 것이 썩 유쾌하진 않다. ‘착한’ ‘불쌍한’이라는 형용사는 약자를 향한 연민을 자극하고, ‘참고 견디다’ ‘혼날지도 모른다’ ‘쩔쩔매다’ 등의 표현은 신데렐라가 처한 상황의 ‘어쩔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만 같다. 페로는 신데렐라의 강인한 성격보다는 그녀가 처한 불가피한 운명적 고통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신데렐라의 행동반경을 좁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분 사회의 적자(嫡子) 신데렐라

    페로는 신데렐라를 철저히 수동적 순종적 존재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착하기만 한 캐릭터로 단순화해 신데렐라의 주체적 욕망을 교묘하게 억압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도회에 반드시 나가겠다고, 무서운 계모에게 세 번이나 강력하게 어필하는 그림형제판 신데렐라의 적극적인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페로의 신데렐라는 신데렐라의 ‘계급성’을 강조한다. 신데렐라가 평소처럼 재투성이로 무도회에 나갔다가는 절대로 왕자의 눈길을 끌 수 없음을 강조하며 그녀의 신분을 나타낼 수 있는 외형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데 주력하는 것이다. 호박을 마차로 바꾸고 쥐들을 마부로 변신시키고 누더기를 드레스로 바꾸는 것은 모두 요정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 신데렐라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다. 왕자 또한 유리구두에 발이 딱 맞는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후에도 우선 공주들과 공작의 딸들에게 먼저 신발을 신게 함으로써 신붓감의 계급을 제한하고 있다.

    페로가 살았던 시대(1628~1703)는 루이 14세가 주도한 호화로운 궁중문화가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다. 무도회장은 여성이 결혼을 통한 평생 재테크를 꿈꿀 수 있는 인생역전의 기회일 뿐 아니라 사교계로 진출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자정이 넘어 신데렐라의 화려한 모습이 변해버리자 도망치는 신데렐라의 모습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왕자. 평소에는 신데렐라를 닥치는 대로 구박하다가 막상 화려하게 치장한 신데렐라 앞에서는 그녀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계모와 언니들. 이런 식으로 페로는 겉모습만 번드르르하게 치장하면 누구든 그 신분을 의심하지 못한다는 점을 꼬집어 당대의 신분 사회를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신분상승의 강력한 우화’로 알려진 신데렐라 이야기는 실제로 드라마틱한 신분상승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귀족과 기사도’(콘스탄틴 브리텐 부셔 지음, 강일휴 옮김, 신서원, 2005) 등에 따르면 페로의 신데렐라가 출판될 당시 왕족이 결혼할 수 있는 대상은 귀족 서열 중 가장 높은 ‘공작’까지만 허용되었다. 왕궁의 시종들이 유리구두의 주인을 찾기 위해 신데렐라의 집까지 오는 것은 ‘평민을 향한 파격적 우대’가 아니라 신데렐라가 귀족의 딸 중 서열이 가장 높은 공작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아들과 공작의 딸 사이의 결혼은 당시 신분질서에 전혀 어긋남이 없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신데렐라가 왕자에게 선택받은 것은 단지 그녀의 미모와 교양 때문이 아니라 공작에 걸맞은 복장과 격식을 갖춤으로써 ‘재투성이’로 가려진 자신의 원래 신분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데렐라는 불가능한 신분상승이 아니라 가능한 한도 안에서 신분의 ‘안정’을 꾀한 셈이다. 이것이 신데렐라와 인어공주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기도 하다. 신데렐라는 화려하게 치장해 자기 신분을 숨긴 게 아니라 화려하게 치장함으로써 ‘원래 신분’을 되찾은 것이다. 신데렐라를 불가능한 신분상승의 대표주자로 만든 것은 후대인의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게다가 민담으로서의 신데렐라 이야기는 신분상승이라는 세속적 테마보다 부모형제와의 원초적 갈등이 중요하다. 계모로 탈바꿈한 ‘친엄마’에 대한 본능적 증오(어릴 때 자신의 엄마가 계모가 아닐까 의심하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딸을 독점하려는 아버지의 소유욕을 분석한 연구도 있다. 또한 ‘재투성이’라는 존재 자체가 ‘비천한’ 것이 아니라 세속과 신성을 이어주는 ‘샤먼’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 연구도 있다. 요모조모 따지고 보면 신데렐라는 ‘신분상승의 테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우리의 짐작을 훨씬 넘어선 다중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꿈꿀수록 불행해지는 인어공주의 슬픔

    콤플렉스로 얼룩진 어른들의 동화

    안데르센 원작 속의 인어공주는 꿈꿀수록 불행해지는 슬픈 존재다.

    한편 ‘인어공주’는 어린 시절 읽은 가장 슬픈 동화 중 하나였다. 어른들은 눈만 뜨면 ‘꿈을 크게 가지라’고 웅변하는데, 정작 내가 가장 좋아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은 꿈을 크게 가지다가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인어공주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은 인어공주를 가르치고 보살피는 데 아낌없이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인어공주의 언니들은 머리카락까지 마녀에게 팔아 마지막으로 인어공주를 살릴 수 있는 방책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어공주를 살릴 수 없었다. 왜 모두 최선을 다하는데 그녀를 구할 수 없었을까.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을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왕자를 찌르는 인어공주였다면 우리에게 이토록 전폭적인 ‘편애’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어공주의 끝없는 신비는 등장인물 모두 자신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완전한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비극적 정서에 있는 게 아닐까.

    인어공주는 사랑을 얻기 위해, 그리고 ‘인간만이 얻을 수 있다는 영혼’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왕자 또한 자신을 살려준(살려주었다고 믿고 있는) 여인을 찾기 위해 분투하고, 인어공주의 언니들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마녀 또한 자신의 잃어버린 매력과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다. 인어공주의 비극적 정서는 누구에게도 이 꼬일 대로 꼬인 운명의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디즈니가 개작한 ‘인어공주’에서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원작이 갖고 있는 모계사회의 뉘앙스를 완전히 삭제한 점이다. 인어공주의 멘토 역할을 하던 할머니 인어는 모계사회의 수장 격으로서 인어공주의 ‘꿈을 키워주는 역할’과 ‘꿈을 억압하는 역할’을 동시에 해낸다. 할머니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어들은 자신들이 사는 바닷속 세계에 만족하고 인간세계를 동경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잠깐 미혹되는 환상쯤으로 인간세계에 대한 동경을 제한하는 것이다. 이들과 인어공주의 다른 점은, 인어공주는 이 ‘불가능한 꿈’을 생의 끝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이다. 할머니와 언니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위험을 배제하는 소시민적 삶을 선택하는 것에 비해 인어공주는 환상을 기어이 현실로 바꿔내려는 이상주의자이자 탐미주의자다. 그녀는 왕자의 ‘조각상’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에 반해 왕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위험도, 그러니까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인어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는 없나요?”

    “만일 한 남자가 자신의 부모보다 너를 더 사랑해서 네 생각만 하고 오직 너 하나만 사랑한다면 가능하지. 그 남자가 신부님 앞에서 네 손을 잡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면 그 영혼이 네 몸으로 흘러들어가 인간의 행복을 함께 누릴 수 있어.”

    -안데르센 글, 밀로스라프 디스만 그림, 곽노경 옮김, 안데르센 동화집, 주니어파랑새, 2005, 36~37쪽.

    인어공주가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사랑은 ‘아는 동생’한테 보내는 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가족도 신분도 모두 포기하고 오직 그녀만을 생각하고 그녀만을 바라보는, 절대적 사랑이었다. 어쩌면 안데르센은 자신이 사랑하던 ‘고귀한’ 신분의 여인들과 그 자신이 얻지 못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받기 위해선 상대방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사랑이 없다면 자신은 절대로 ‘그들만의 리그’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을. 빈민가 출신의 안데르센이 평생 넘을 수 없던 신분의 장벽은 ‘인어’와 ‘인간’의 차이만큼이나 높았다. 그가 사랑한 모든 사람은 높은 신분이거나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였다. 그들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감격했고, 안데르센의 스폰서나 열혈 독자가 되어줬지만, 안데르센을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편입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마녀가 설명했습니다.

    “넌 걸을 때마다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낄 거야. 그래도 괜찮다면 도와주지.”

    “네, 참겠어요.”

    “사람이 되면 다시 인어로 되돌아올 수 없어. 다시는 언니들과 아버지가 사는 용궁에 내려올 수가 없지. 그리고 왕자가 너를 부모보다 더 사랑하고 네 생각만 하며 너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영원한 영혼도 얻을 수 없어. 왕자가 다른 아가씨와 결혼하면 다음날 네 심장은 산산조각이 나서 물거품이 되고 말 거야.”

    “그래도 하겠어요.”

    … “하지만 네 목소리를 내게 줘야 해. 귀한 물약을 얻으려면 가장 귀한 것을 주는 건 당연하잖아!”

    … “제 목소리를 빼앗아가면 남는 게 없잖아요?”

    “아름다운 모습이 남지. 날아갈 듯 우아한 걸음걸이와 그윽한 눈빛이 있잖아. 이것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해.”

    - 위의 책, 40~42쪽.

    어쩌면 인어공주는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이 될 수만 있다면, 혀가 잘려 말을 할 수 없어도, 바닷속뿐 아니라 인간세계를 통틀어서도 가장 아름다운 그녀의 목소리를 빼앗긴다 해도, 왕자의 유일무이한, 절대적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 인어공주가 아름다운 머리칼이나 어여쁜 얼굴이나 몸매가 아니라 ‘목소리’를 빼앗긴 것은 의미심장하다. 목소리를 빼앗긴다는 것은 언어와 노래가 불가능한 세계로 추락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인어공주가 그토록 갈망하던 ‘영혼’의 공간을 빼앗기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왕자가 그토록 찾고 있던 존재(바닷가에서 자신을 구해준 존재)가 바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혀’가 있었다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몸집이 좀 작은 어른’을 위한 동화

    또한 그녀가 하필 목소리를 빼앗겼다는 것은 ‘인어’(하층계급)는 ‘그들’(상류사회)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는, 계급과 계급 사이의 본질적인 소통불가능성을 환기시킨다. 마녀는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목소리(영혼+성격+재능)임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외적 아름다움만 있으면 인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마녀의 충고는 인간세계의 속물성을 풍자한 것이면서 동시에 안데르센의 뿌리 깊은 외모 콤플렉스의 굴절된 묘사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어공주는 인어세계에서도 인간세계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는 ‘푸른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인어들에게는 인어의 안락한 자기만족을 방해하고 바닷속 세계 말고도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고통스럽게 환기하는 존재였으며, 인간들에게는 인간이 품을 수 없는 신비하고도 불가해한 세계, 결코 그들이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세계(바닷속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는 존재였던 것이다.

    언니들이 말했습니다. “네가 오늘 저녁 죽지 않게 하려고 마녀에게 우리 머리카락을 모두 주었어. 마녀가 이 칼을 주었단다. 어서 받아. 날카로우니까 조심해. 해뜨기 전에 칼로 왕자의 심장을 찔러야 한단다. 그래서 왕자의 뜨거운 피가 네 발에 떨어지면 발이 다시 꼬리로 변해 예전처럼 인어가 될 수 있어. … 인어공주는 칼을 멀리 파도 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 인어공주는 흐릿해진 눈으로 왕자를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공주의 몸이 스스로 풀리며 물거품이 솟아났습니다.

    -위의 책, 49쪽.

    나는 신데렐라의 드라마틱한 성공이 아니라 계모와 언니들의 구박과 아버지의 외면을 ‘견디는’ 그녀의 태도를 상상해본다. 죽은 엄마의 무덤가에 하루에 세 번 기도하러 가서 목 놓아 울던 계집아이의 귀기 어린 통곡을 생각한다. 신데렐라는 신분상승의 로망이 아니다. 인어공주는 더더욱 그렇다. 건널 수 없는 경계(인간과 인어 사이)를 건너려던 인어공주의 몸부림처럼 신데렐라는 엄마의 죽음과 자신의 삶 사이의 경계를 서성거린다.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된 동화들은 본래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다. 동화는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 계몽해야 할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몸집이 좀 작은 어른’일 뿐인 아이들에게 세상의 험악함을, 인간의 비애를, 인생의 잔혹함을 미리 학습시키는 고통의 예방접종이 아니었을까.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