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세 때의 페기 구겐하임.
10대 시절에는 사회주의 철학을 가졌던 가정교사 루실 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페기에게 경제학과 정치학을 가르친 루실 콘은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컬럼비아대학에서 고전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재원이었다. 당시 성행했던 사회주의 운동의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페기 역시 부잣집 딸이긴 했지만 유대인이라는 소수자와 국외자로서 차별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에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루실 콘의 애정에 공감했다.
‘그녀(루실 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급진적이 되었고 내가 성장해온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로부터 헤어날 수 있었다. 그녀가 뿌린 씨앗은 내 인생을 그녀조차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가지를 뻗도록 했다.’
조건을 무시한 사랑
페기는 집안의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탈출하는 의식의 자유와 더불어 몸의 자유도 꿈꿨다. 20세기 여성들의 평범한 삶에서는 한없이 비켜간 일탈이었다. 그녀는 돈이나 지위 같은 세속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상대방과 영혼이 통한다 싶으면 이내 사랑에 빠졌다. 첫 남편 로렌스는 재능은 있으나 명성을 얻지 못한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였다. 생활력이 전혀 없는 한량(閑良)이었다. 감수성이 너무 예민한 남자와의 결혼생활은 파란만장했다. 7년 결혼생활에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이혼한다. 페기는 로렌스를 통해 예술가 인맥을 얻었다. 훗날 페기가 화랑 일을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과의 인연도 로렌스로부터 비롯됐다.
두 번째 남자는 비록 결혼은 안 했지만 5년간 동거한 존 홈스라는 예술가였다. 첫 남편 로렌스는 여자를 무시하고 챙기지 않아 페기를 고통스럽게 했던 반면, 존은 여자를 존중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는 늘 “여자들은 안됐어”라고 말하며 페기를 동정했다. 페기가 존에게서 얻은 것은 예술비평에 대한 통찰력이었다. 존은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꿰뚫고 있는 탁월한 비평가였다. 무슨 분야든 정통했다.
하지만 존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서서히 무너져갔다. 존과 페기의 관계는 존이 간단한 허리 수술 중에 마취상태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면서 끝이 난다. 존의 죽음을 접한 페기의 솔직한 회고에는 한순간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상함이 잘 드러나 있다.
‘존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갑자기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은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와의 사랑이 식어가면서 어느 순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열어준 성적 자유로움은 이후 그녀의 삶에 활기와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녀는 자신이 ‘한 남자의 부인’이었으며 오직 그 역할에만 집중했던 20대와 30대 시절을 지워버렸다. 그런 삶은 야망 없는 여인의 것이라고 단호하게 결론 내렸다. 세상은 물론 페기의 자유로운 생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돈 많은 창녀’라는 세간의 비난이 드셀 무렵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 성생활을 음주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섹스를 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여흥일 뿐입니다. 나는 일이 우선이고 내 아이들도 있습니다. 양쪽 모두가 내 인생의 중심입니다. 어떤 여자든 섹스 그리고 남자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여자에게 활기 사랑 여성성을 유지해줍니다. 가끔 육체적 생활과 효과를 즐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