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호

美 첫 여성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

“정치는 엄마 역할의 확장”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10-12-03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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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업주부로 5남매를 키우다 마흔을 훌쩍 넘겨 정계에 입문, 미국 선출직 중 최고위직인 하원의장에 오른 낸시 펠로시.
    • 공화당의 대반격으로 3년 만에 물러났으나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으로서 그가 미국 정치사에 새긴 흔적은 남다르다.
    • ‘진보적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선입관과는 딴판으로, 그에게 가장 든든한 지지기반은 가정이었고 남성은 적이 아니라 우군이었다.
    지난 11월2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의 과반 의석을 차지하면서 민주당 소속의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70)가 물러났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장악하면서 미국 정치사에서 첫 여성 하원의장이 된 지 4년 만이다.

    ‘표’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의 운명도 연예인의 운명처럼 부침이 심하다. 화려하게 주목받던 펠로시의 퇴장을 뒤로하고 새 하원의장이 된 공화당 원내대표 존 베이너(60)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으니 말이다. 미국 하원의장은 선출직으로선 최고위직이며, 정·부통령 유고시 미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서열 3위의 막강한 자리다.

    4년 전 ‘또 하나의 유리천장을 깼다’며 세계의 주목을 받은 펠로시가 이번에는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정계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어 새삼 권력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존 베이너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언론매체들은 ‘베이너가 오하이오 주 벽촌에서 12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웨이터 일을 하며 플라스틱 제품 회사 판매사원으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근로계층’의 대표적 인물인 데 비해 펠로시는 명품 의상과 보톡스 시술로 요약되는 캘리포니아 부유층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며 조롱에 가까운 비교를 했다. 그러면서 ‘부잣집 마나님이 미국의 근로계층·소수계가 주요 지지기반인 민주당 하원을 지휘하던 시절이 지나고, 벽촌·근로자 출신이 부자와 친(親)기업적 성향의 공화당 하원을 장악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펠로시는 선택받은 특권층의 삶을 살았다. 시장(市長)을 12년이나 지낸 하원의원 출신의 정치인 아버지와 엘리트 어머니, 그리고 부동산 재벌로 알려진 사업가 남편을 두고 이렇다 할 어려움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다. 남편 폴 펠로시는 샌프란시스코 등 캘리포니아 지역에 부동산을 갖고 있으며, 나파밸리(캘리포니아에 있는 고급 포도주 생산지역)에 500만~2500만달러 상당의 와이너리 및 리조트 호텔, 이탈리안 레스토랑 체인, 골프장 등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UFL(미식축구 리그)의 ‘캘리포니아 레드우즈’팀 구단주를 맡으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펠로시는 아버지나 남편의 도움으로 정치가가 된 것이 아니다. 물론 거물 정치인 집안에서 자란 유전자적 소양과 부모, 남편이 떠받쳐주는 상류층 네트워크가 성공을 가져다준 요인이긴 해도 그가 정치에 뛰어들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스스로의 노력과 열정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그의 진정성을 동료의원들도 잘 알기에 그에게 민주당의 수장 자리를 맡겼다고 할 수 있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그것도 평상시도 아닌 연방의회 상·하원의 주도권을 모두 잃어버린 비상상황에서 당을 구할 지도자로 펠로시 의원을 하원의장으로 뽑은 이유는 그가 자타가 인정하는 ‘조직의 귀재’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 특출한 솜씨가 있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 1987년 그가 처음 의회에 진출한 것도, 원내대표 경선에서 승리한 것도 자금력 덕분이었다. 2002년 11월 중간선거 때는 다른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100만달러가 넘는 거금을 선뜻 당에 내놓기도 했다. 1995년부터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를 맡은 게파트 의원은 “펠로시는 순전히 자기 힘으로, 그리고 자기 지도력 덕분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자가 주목한 것은 정치인으로서 펠로시의 성취보다는, 그가 결혼해 5남매를 두고 전업주부로 지내다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다는 점이다. 펠로시의 꿈에 정치인이 되겠다는 것은 없었다. 다만 살림을 하면서도 신문을 정독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면서 사회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이런 열정이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전업주부의 삶을 무의미하게 여기며 지내고 있을지 모를 여성들에게 그의 도전적인 삶은 ‘나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준다. 펠로시는 2007년 하원의장 취임선서에서 “개인적인 승리라기보다 모든 여성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고 느꼈다”고 말해 여성 멘토로서 많은 생각을 해왔음을 내비쳤다.

    “이민자들이 강한 미국 만든다”

    펠로시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시장을 12년 동안 역임한 토머스 달레산드로 2세로 메릴랜드 주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한 뉴딜(New Deal)주의자이자 민주당원이었다. 펠로시의 친·외조부모는 모두 이탈리아 베니스와 제노아, 시칠리아에서 이민을 왔다. 그의 부모는 볼티모어의 ‘작은 이탈리아’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자랐다. 우리로 치면 미국의 ‘한인 타운’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펠로시 가족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으로 애국심이 강하고,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는 혈통에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확고한 민주당 지지자들이었다. 그는 “‘작은 이탈리아’에서 자라는 동안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져다주는 활력에 감명 받았다. 그들은 용기와 낙천성, 가족을 위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했다. 이민자들이 미국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것은 미국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됐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실”이라고 회상했다.

    펠로시는 위로 오빠만 여섯이다. 부모가 내리 아들만 낳은 뒤 막내이자 외동딸로 펠로시를 낳은 것이다. 남자들 틈에서 귀여움도 많이 받았겠지만 막내인데다 여자가 하나뿐이다보니 무시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펠로시는 자기주장이 강해 여간해선 오빠들한테 지지 않았다고 한다. 연설에도 능하고 핸섬한 용모를 지닌 아버지는 정치에서 여성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을 높게 평가한 진보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지만, 가족에 대해서만은 보수적이어서 펠로시가 10대 시절 긴 머리를 자르는 것마저 탐탁지 않아 했다고 한다.

    펠로시의 어머니는 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로스쿨을 다닐 정도로 ‘깨인 여성’이었으나, 세 자녀가 동시에 백일해에 걸리자 공부를 중단했다. 집안 살림을 하면서도 ‘벨 벡스(Velvex)’라는, 얼굴에 수증기를 쐬게 해 모공을 넓힌 뒤 화장품 흡수가 잘되게 하는 미용기구를 개발해 특허를 내기도 했다. 결혼생활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지만 일을 통한 자아실현에 대해 늘 아쉬움을 품었던 어머니는 어린 딸 펠로시에게 “재능과 능력을 갖춘 여자들은 일찍 결혼할 필요가 없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이는 훗날 펠로시가 여성과 일에 대해 일찌감치 자각하게 해준 동력이 됐을 것이다.

    어머니는 한때 펠로시가 수녀가 되기를 바랐다. 똑똑한 딸이 세상에서 받을 마음의 상처와 실망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은 모정의 발로였으리라고 펠로시는 회고한다. 펠로시는 어머니가 ‘수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제 인생은 저의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때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자식으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막상 자신이 엄마가 돼 “일이 바빠 너희들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게 돼 미안하다”고 했을 때 아이들로부터 “엄마, 우리는 친구들과 지내는 게 좋아요. 우리는 대학에 다니고, 엄마는 의회에 다니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며 서운해했다.

    정치 가문에서 연민을 배우다

    어릴 적 그가 정치를 통해 배운 것은 ‘연민’이었다고 한다. 펠로시의 집은 늘 ‘울타리가 없는 집, 언제나 열려 있는 집’이었다. 아버지가 시장이 된 후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원했고, 또 어떤 이들은 시립병원에 입원하기를 원했으며, 주택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단지 먹을 것을 달라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을 대하는 어머니 역시 공직자나 다름없었다. 보수를 받거나 선거에서 뽑혀 일정한 직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남편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청탁 거리를 갖고 방문하면 어머니는 그것을 노란 종이에 써서 서류철에 넣어두고, 훗날 그 사람이 잘되면 누군가 비슷한 요청을 하는 사람이 왔을 때 그 종이를 꺼내 잘된 사람에게 연락, 새로운 사람을 돕게 했다고 한다.

    펠로시는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친구의 어머니가 남은 음식을 다시 그릇에 모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식탁에서 이런 광경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볼티모어시 노트르담 여학교(the institute of notre dame)에서 공부했다. 이곳은 독실한 가톨릭 학교로 ‘봉사를 신앙생활의 일부’로 교육했다. 모두 수녀였던 선생님들은 ‘궁핍하고 아프고 상처 받기 쉬운 이들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가르쳤다. 학교 현관에는 ‘학교는 감옥이나 운동장이 아니다. 시간이고 기회다’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펠로시는 이처럼 매우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뒷날 그의 정신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치무대에서 유난히 반전이나 인권 문제에 관심을 쏟은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그 스스로 “일찍이 종교적 세례를 받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들이 인생의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어떻게 종교에 의지하는지 알게 된 것은 삶과 정치에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던 펠로시 가정에도 불행이 있었으니, 펠로시의 오빠 중 하나가 세 살 때 폐렴으로 죽고만 것이 그 하나다. 어머니는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기도의 힘으로 이겨나갔다. 어머니는 종교적인 믿음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것으로 확장했다. 이를테면 당시 소련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감옥에 갇혀 있던 헝가리의 요제프 민첸티 추기경 석방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다.

    펠로시는 하원의장 취임식장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가 하원의장이 되길 바라며 키우지 않았다. 내가 경건하게 살도록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부모의 최고 양육 기준은 ‘성스러움’이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로 세상과 소통

    펠로시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여자대학이던 워싱턴 트리니티 대학에 진학한다. 전공으로 정치학을 공부하려 했지만 트리니티 대학에서 정치학을 택하려면 역사를 전공으로 택해야 했다. ‘정치학이 없는 역사는 열매가 없는 것이고, 역사가 없는 정치학은 뿌리가 없는 것’이라는 게 그 학교 학풍이었다. 펠로시는 트리니티 대학 학풍이 자신의 정치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미국의 건국 헌법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리더십의 특징에 대해 배웠다. (…) 비전, 판단력, 추진력, 국민에 대한 존경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지적으로 설득력 있는 호소를 한다 해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민과의) 감정적인 연대감이 필수적이다. 대통령이 비전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으면 직관적으로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다. 리더십의 이런 면에 대해 배우는 동안 나는 여성들이 뭔가를 결정하고 누군가에게 충고할 때 강한 직감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펠로시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 중)

    그는 당초 대학을 졸업하면 로스쿨에 가려 했다. 어머니의 말처럼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가정에 정착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인생에선 늘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겨나는 법. 그는 동급생 폴 펠로시와 사랑에 빠져 나이 스물셋이던 1963년 9월7일 결혼하면서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자의식이 강한 젊은 여성 펠로시의 삶은 이내 남편과 아이들 위주로 움직였다. 자신을 위한 시간은 오직 아이들이 낮잠을 잘 때뿐이었다. 그는 아이들이 잠들면 세탁기 앞에 주저앉아 ‘뉴욕타임스’를 정독하는 것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이사를 갈 때마다 펠로시가 남편에게 유일하게 고집을 피운 일이 ‘뉴욕타임스 구독’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고 나면 로스쿨에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의 하루는 여느 전업주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침대와 방 정리를 시키고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한다.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신발과 교복, 치아를 검사한다. 아이들 머리를 땋을 것인지 하나로 묶을 것인지가 늘 고민이어서 어느 날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딸아이 머리 한 쪽은 땋은 채로, 다른 한쪽은 그냥 묶은 채로 보낸 날도 있다. 저녁을 먹은 뒤엔 도시락과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고 그 다음에는 불을 끄기 전까지 아이들 숙제를 도와준다.”

    그러나 펠로시는 육아 경험이 자신을 단련한 가장 강한 무기였다고 떠올린다.

    “아이 키우기는 힘든 일이다. 정치에서도 많은 위기 상황이 펼쳐지고 그런 시간들이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만, 나의 경험으로 볼 때 가장 어려운 일은 가족을 보살피는 일이다. 그것은 물론 기쁨이기도 하고 좋은 기억이 되기도 하지만, 엄청나게 압도당하는 일이다. 그리고 쉼 없이 지속되는 일이기도 하다. (…) (그러나)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런 훈련을 거치면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게 된다.”

    “가끔 젊은 여성들은 내게 인생에서 무엇이 옳은 길이고 최고의 경로인지 묻는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 것이 옳은 것인지, 경력을 쌓기 위해 결혼이나 육아를 미루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들이 옳은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옳은 길’이나 ‘최고의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단지 ‘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비록 몸은 아이와 남편, 가정에 묶였다 해도 펠로시는 ‘사회’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단지 생각만 하는 데에서 벗어나 1966년 중간선거 때는 유모차를 밀면서 자기 지역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를 위해 전단지를 뿌리는 자원봉사를 할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첫 ‘공직’이 주어진다. 시 도서관 운영위원이었다. 이웃사촌이던 샌프란시스코의 시장 부부로부터 받은 제의였다.

    첫 ‘공직’은 도서관 운영위원

    펠로시가 정치인생을 남을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번도 민주당 대표가 되겠다거나 하원의장이 되겠다거나 하는 꿈이나 목표를 가진 적이 없다.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기여한 노력과 열정을 높이 산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고 제안을 받으면서 정치 인생을 걸어왔다.

    취미로 하던 정치활동의 터닝포인트라고 한다면 197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이자 남편의 친구인 제리 브라운(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해 공화당의 강력한 후보인 이베이 CEO 멕 휘트먼을 제치고 72세 고령에 다시 주지사에 당선됐다)을 도운 일이다. 당시 브라운은 뒤늦게 대통령 출마를 준비 중이었는데 펠로시는 그의 선거 캠프에 참가해 그를 열심히 도왔다.

    덕분에 1976년 가을 캘리포니아 주 민주당 의장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캘리포니아 주의 민주당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주의 정당이다. 펠로시는 당시 당에서 인정받는 2명의 쟁쟁한 인물을 제치고 이듬해 캘리포니아 주 북부지역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2년의 임기를 2번 마치고 주 의장직 선거에 출마해 역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한 데 이어 민주당 연방위원회 의장에 올라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 본격적으로 워싱턴 무대에 뛰어들게 되는데 그 계기는 뜻밖에도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1987년 1월 캘리포니아 주 출신 여성 하원의원이자 절친한 친구인 살라 버튼이 “병이 너무 심각해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면서 펠로시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면서 출마를 권유한 것. 펠로시는 유언이나 다름없는 친구의 청에 따라 하원의원에 입후보해 당선됐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펠로시가 하원의원직에 나설 때 가장 큰 걱정은 막내딸이었다고 한다.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펠로시가 딸에게 “네가 원하지 않으면 안 하겠다”고 했더니 딸은 “엄마 인생을 사세요”라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국민 삶 직결된 법제화에 주력

    그는 겨우 6주일 만에 조직을 만들고 추천서를 정리하고 100만달러를 모았다.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자 경쟁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그중에는 평소 친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선거에 뛰어든다는 것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개인과 가족에게 큰 희생을 의미한다. 펠로시 역시 험한 선거판에서 비방에 시달릴 때마다 ‘과연 정치가 나를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를 자문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힘을 준 것은 ‘내게도 가치 있는 일이고 국가에도 필요한 일’이라는 확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원의원이 되는 첫 선거에서 4000표 차이로 승리했다. 아버지에 이어 부녀 하원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의회에 입문한 초기, 그는 에이즈 소위원회를 시작으로 주로 인권 문제에 집중했다. 그러다 보건분과위에서 일하면서 유방암과 에이즈 예방·치료를 위한 기금을 늘리고 국립보건원 예산을 2배로 늘렸다. 이밖에 윤리위, 정보위에서도 일했다.

    민주당은 1996년과 1998년 중간선거에서 계속 패했다. 펠로시는 그 고비 고비마다 위기의 민주당을 구할 리더로 떠올랐다. 2000년 선거 때 첫 여성 원내부대표가 됐으며 2004년엔 대표가 된다.

    그동안 미국 여성들의 정치 참여도 빠르게 성장했다. 펠로시가 하원의원이 됐을 때 전체 하원의원 435명 중 여성은 20명에 불과했지만, 그가 의장이 됐을 때는 민주당 54명과 공화당 20명 등 74명으로 늘었다.

    “나는 더 많은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길 바란다. 투표를 하는 것이든, 후보자를 위한 선거 운동이든, 직접 출마하든 상관없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관료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세계적으로 22%다. 미국도 17%밖에 안 된다. 국방, 경제, 교육, 의료보험, 에너지, 환경보호 등 오늘날 모든 쟁점은 여성과 관계되는 문제들이다.”

    펠로시는 국민의 삶과 직결된 문제들을 법률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원의장이 됐을 때 처음 제정한 법 중 하나가 의회 의사당에서 흡연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펠로시라고 소수자인 여성으로서 겪는 외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의원이 됐을 때 의회 경비원조차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몇 번이나 출입을 거절당했다. 그나마 나는 예전보다 나았다. 한 여성 의원은 처음 위원회에 임명되어 들어가던 날 위원장으로부터 ‘더 이상 여자(broad)는 필요 없는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1973년 패트 쉬레더가 군사위원회에 임명됐을 때 의장은 아예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아이 기르기=세상 구하기’

    하지만 펠로시는 남자들을 적이 아닌 우군으로 대했다. 여성을 대하는 진보적 변화는 여성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깨인’ 남자들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는 것이 펠로시의 철학이다. 하원의장이 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자들의 태도를 고치기 위해 의회에 온 것이 아니다. 국가의 정책을 바꾸러 왔다. 몇몇 남성 의원이 여성 의원들을 존경해 태도를 바꾼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이 내 목표는 아니다. 나는 동료 의원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상의하겠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다. 남성 의원들에게 ‘출산’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성인) 내가 잘 안다. 나는 남녀를 떠나 동료 의원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이 여성 하원의장을 선출함으로써 미국의 유산이자 희망인, 평등이라는 이상이 더욱 가까워지게 됐다.”

    펠로시는 자신이 정치에 몸담게 된 것 자체가 ‘어머니 역할의 확장’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내이고 엄마이며 할머니다. 내가 다섯 아이의 엄마이고 지금은 할머니가 된 것 이외에 아무 일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내 인생을 행복한 성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족을 보살피는 일은 힘든 일이지만, 엄마와 주부로서 얻은 지혜가 얼마나 귀중한 경험인지를 여성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펠로시는 “집안에서 살림만 한다고 스스로를 낮출 게 아니라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 엄마, 이모, 고모, 숙모로서, 조언자로서, 다음 세대에게 시간과 사랑을 투자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여성들의 힘과 자신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전업주부일 때, 사회가 주부들을 ‘가정의 엔지니어(domestic engineer)’라고 불러준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리라는 농담이 있었다. 여성들이 ‘직업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그냥 가정주부예요’라고 답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너무 슬펐다. 그냥 가정주부? 내가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엄마가 되는 것과 집안일에 대한 경험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기르는 것은 한 명당 한 번씩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낸시 펠로시 자서전 ‘자신의 숨겨진 힘을 깨달아라’ 외 신문기사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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