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북과 월북의 구분
월북 언론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6·25전쟁 이전에 자진 월북한 사람과 전쟁 이후에 북한군을 따라간 경우다. 전자 가운데는 8·15 광복 전부터 북한에 살던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월북이 아니라 원래 거주지가 북한이었던 사람인데, 한설야가 이에 해당한다. 전쟁 전에 월북한 언론인 가운데는 해방공간에 발행된 좌익신문에서 활동한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좌익신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보 (1945. 9.8~1946. 9.6)
해방일보 (1945. 9.19~1946. 5.18)
일간 예술통신 (1946. 11.5~1947. 3.2) 문화일보 (1947. 3.11~9.24)
대중신보 (1947. 3.21~6.18) 노력인민 (1947. 6.19~8.17)
‘조선인민보’에서 활동하던 인물로는 김정도(金正道·사장), 홍증식(洪?植·사장), 김오성(金午星·편집국장), 임화(林和·주필)가 있었고, 남로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권오직(權五稷·사장), 조두원(趙斗元·주필), 정태식(鄭泰植·편집국장), 해방일보의 후신인 ‘노력인민’의 홍남표(洪南杓·사장), 이상호(李相昊·편집국장), 윤형식(尹亨植·편집국장), 정진섭(鄭鎭燮·편집국 차장), ‘건국’을 발행하던 김광수(金光洙)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때 북에서 고위직에 올라 활동하였으나 박헌영(朴憲永) 계열의 남로당이 몰락하면서 대부분 억울하게 처형되거나 숙청당하는 비운에 처했다. 홍남표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1948.8)과 동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1950년 6·25전쟁 직전에 사망했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북한의 언론인과 문인들의 운명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한쪽은 체제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김일성 우상화에 몸을 바쳐 출세하는 사람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숙청의 광풍에 휩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거나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이었다.
공개적인 숙청의 대상은 박헌영 중심의 남로당 계열 언론인들이었다. 1953년 8월3일부터 6일까지 4일 동안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남로당 출신인 12명(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에 대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권 전복음모와 반국가적 간첩 테로 및 선전선동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을 열었다.
12명 재판에 언론인 4명
재판받은 12명 가운데 언론인 또는 문인으로는 임화(시인, 조선인민보 주필), 이원조(李源朝·6·25전쟁 중 해방일보 주필), 조일명(趙一明, 조두원이라는 이름도 씀. 해방일보 편집국장, 노력인민 주필), 설정식(薛貞植·시인, 번역문학가)이 있었다. 이들의 ‘범죄’는 크게 세 가지였다.
① 미 제국주의를 위하여 감행한 간첩행위.
② 남반부 민주역량 파괴 약화음모와 테러 학살행위.
③ 공화국 정권의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의 음모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