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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석의 언론과 현대사 산책 <마지막회>

북으로 간 언론인들의 비참한 말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박헌영, 임화, 이승엽…

  • 정진석│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presskr@empal.com│

북으로 간 언론인들의 비참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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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항목은 일본에서 1954년에 발행된 일본어 번역본에는 있는데, 1956년에 북한이 발행한 공식 기록에는 빠져 있다. 일본어 번역판은 재판 당시에 북한의 로동신문과 민주조선에 실렸던 내용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재판 당시에는 있었던 독립 항목을 제외하면서 그 내용은 살리되 추가 또는 변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55년 12월의 박헌영 재판에는 세 번째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다만 제목을 ‘공화국 전복 음모행위’로 약간 바꾸었다. ‘박헌영 도당’이 무장폭동을 일으켜 김일성 정권을 무너뜨리려 시도했으며 박헌영이 이 모든 것을 책임졌다는 게 골자다. 당시는 김일성을 향한 어떤 세력의 어떤 도전도 허용되지 않던, 김일성이 절대적 권위를 지닌 신성한 존재였던 때였다.

재판기록은 김일성 정권이 남로당 일파를 얼마나 잔인한 방법으로 인격적인 모멸감을 주고 선전물로 이용하면서 재판을 진행한 끝에 처형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도 볼 수 있다. 재판기록에서 본인이 진술한 언론관련 경력과 ‘범죄’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재판 심문 순, 이름 뒤의 직책은 체포되기 전 북한에서 활동하던 직책)

조일명(趙一明·1903. 12.1) 전 문화선전성 부상.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후포매리에서 토지 약 1만5000평을 소유한 지주의 장남인데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공산당 사건으로 1929년 12월경에 체포되어 3년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1933년 10월 만기출옥했으나 2개월 후 12월에 다시 체포되어 1934년 4월 석방되었다. 1944년 2월부터는 대화숙(大和塾) 인쇄소 주무원(主務員)으로 근무했고, 같은 기간 3개월간 대화숙 야간학교 일본어 교사를 지냈으며, 7월에는 대화숙 기관지 ‘사상보국’에 “황국 신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말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대화숙은 일제 말기인 1941년에 조직된 사상교양 단체다. 사상범들을 수용시켜 감시하고 지속적으로 교양하면서, 내선일체와 천황에 대한 충성 등 일제의 논리를 홍보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5년 광복 직후 9월에 창간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했고, 이듬해 5월 해방일보가 폐간된 후에는 남로당 부부장, 해방일보의 후신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 주필을 역임했다. 해방공간의 좌파 언론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1947년 12월에 월북하여(박헌영 재판 증언 때는 11월 초에 월북했다고 말함) 1949년 12월 조선노동당 중앙본부 서기로 승진하였으며,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 중이던 1950년 8월 당시 서울시인민위원회 계획위원장이었다. 1951년 1월부터 ‘민주조선’ 부주필을 맡았다가, 1951년 11월에는 문화선전성 부상으로 활동하다가 재임 중인 1953년 초에 체포되었다. ‘해방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부터 미국 간첩활동을 하였다고 재판에서 자백했다.



조일명은 박헌영과는 동서간이라는 인연도 있었다. 1955년 12월 박헌영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저의 처남인 동시에 박헌영의 처남인 윤대현을 6·25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후에 의용군 본부 내에 ‘특수부’라는 살인단체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박헌영의 첫 아내는 주세죽(朱世竹)인데 북한에서 재혼했던 이 젊은 아내가 조일명의 처제였던 것 같다.

박승원 임화의 공산당 활동

박승원(朴勝源·1913. 2.28) 노동당 중앙위원회 연락부 부부장. 경북 영주군에 2만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 가정에서 성장했다. 보성전문 상과 재학 중 1932년 학생운동 사건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공산당 사건으로 몇 차례 체포된 경력이 있다. 1937년에 전향하여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다가 일제 말에 퇴사했다(1941년 매일신보 사원명부에도 박승원(龍元勝夫)의 이름이 들어 있다). 광복 후 ‘서울신문’ 창간 때에 정치부장을 지내고 1946년 1월부터는 남로당 선전부장 대리를 맡았다. 같은 해 6월에 월북하여 박헌영의 지시로 해주제일인쇄소의 편집국장으로 근무하다가 1948년 말부터 부주필, 주필을 맡았다. 1949년 7월에 로동당 연락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3월부터는 유격대로 참가하였으며 5월에 북으로 올라갔다. 6월에는 전라북도당 조직 임무를 맡고 다시 남한에 잠입해 있는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서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했을 때에는 그곳에 있었다. 북한군 점령하에서 경기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1년 5월 중앙당 연락부 부부장 재임 중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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