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민사와 형사 구별하기

  • 입력2010-12-22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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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무자가 돈을 안 갚아 소송을 해서 이겼다. 그런데도 채무자가 돈을 안 갚고 있다. 나라에서는 이런 채무자를 왜 감옥에 안 가두고 활개를 치고 돌아다니게 놔두는가?”

    돈을 떼일 지경에 놓인 채권자들은 이렇게 하소연한다. 원망스러운 채무자를 감옥에라도 넣고 싶은 채권자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우리 사법제도상 형사절차의 한계 때문에 그런 답답함을 속 시원히 풀기 어렵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돈거래 관계에서는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절감할 것이다. ‘알아서 갚겠지’ 하는 식으로 돈을 빌려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법적인 다툼이 발생한 경우 그 다툼을 법적 절차를 통해 풀기로 결정했다면 그 방법으로는 크게 민사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과 형사절차를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민사절차와 형사절차의 차이에 대해 잘 모르거나 혼동하고 있는 분이 적지 않다. 민사절차와 형사절차를 혼동하면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오해가 생겨날 수 있다.

    ①민사재판에서는 내가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는데, 검사는 왜 나를 형사처벌하려 하는가.

    ②내 돈을 꿔간 뒤 갚지 않는 자를 형사고소하면 감옥에 보낼 수 있지 않은가.



    ③상대방이 상해죄로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곧 법원이나 검찰에서 내 손해배상금도 받아줄 것이다.

    의미도, 기능도 다르다

    민사소송절차는 소송을 통해 누구에게 어떤 법적 권리나 의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아주 간단한 예로 갑돌이가 을순이로부터 100만원을 받을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절차다. 이에 비해 형사소송절차는 국가가 어떤 국민에게 형벌권을 발동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절차다. 그러니까 국가가 병돌이를 감옥에 보낼지 말지를 판단하는 절차라는 뜻이다.

    민사소송절차는 서로 대립하는 이해관계의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 사이에서 벌어지는 법정 다툼이라고 보면 된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 간의 다툼을 보고 어느 쪽의 주장과 증거가 타당한지를 판단하는데, 이때 판사는 다툼에 끼어들지 않고 주로 심판을 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반면 형사소송절차에서 대립하는 당사자는 검사와 피고인이다. 경찰이나 검사가 수사한 결과를 가지고 검사가 형사재판을 제기(이것을 기소(起訴)라고 한다)하면 피고인은 검사에 대응해 자신을 방어할 것이고, 판사는 검사와 피고인의 다툼을 보고 검사의 기소가 옳은지 여부를 판단한다. 여기서 판사는 심판자의 위치에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사관의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민사소송과 다르다.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은 이처럼 목적과 기능이 전혀 다른 절차다. 형사소송절차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형벌권을 행사할 것인지 여부에 주된 관심이 있는 데 비해 피해자의 권리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는 아니다. 반면에 민사소송절차는 국가가 개인 상호간의 관계에 개입해 어느 한쪽 편을 들어주기 위한 제도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형사소송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피고인에게는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아주 심한 경우 사형선고를 받아 사회와 영원히 격리될 수 있고, 징역형을 받으면 상당기간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신체적 구속을 당하게 되며, 벌금 이하의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전과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사소송에서 검사 측의 손을 들어주려면, 즉 유죄판결을 받아내려면 피고인이 범죄행위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판사가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까지 검사가 증명을 해야 한다. 이에 실패하면 판사는 무죄판결을 해야 한다. 하지만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에서 피고의 책임을 인정하려면 피고의 행위와 발생한 결과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할 수 있는 정도의 증명만 하면 충분하다.

    이와 같이 요구하는 증명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형사소송에선 무죄선고를 받았어도 민사소송에서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돼 손해배상명령을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민사를 형사로 푼다?

    기나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민사소송에서 승소판결문을 받았지만 기쁨은 잠시일 뿐인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그 승소판결문으로 채무자의 재산을 강제 집행할 수 있지만,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이 없는 빈털터리 채무자에겐 판결문이 종이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적 허점을 이용하는 것이 사업의 기본처럼 되어 있다보니 사업하는 사람 중엔 자기 명의의 부동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사업자를 상대로 한 재판은 헛고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채무자를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게 한다면 채무자는 구속되거나 유죄판결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합의를 시도하게 마련이므로 피해자의 처지에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가능하면 채무자를 형사절차로 끌어들이기 위해 채무자를 고소하는 경우가 흔하다.

    민사 문제가 형사 문제화할 수 있는 대표적인 통로는 채무불이행죄다. 이는 민사상 채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하는 제도인데,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임금 채무를 불이행할 경우나 임금 체불로 형사처벌하는 경우말고 일반적인 채권·채무관계에 적용할 수 있는 채무불이행죄가 없다. 만약 채무불이행죄가 있다면 약속을 어긴 채무자가 채권자 앞에서 당당하게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배 째라’ 하는 식의 볼썽사나운 행태를 보이진 못할 것이다.

    채무불이행죄가 없는 상황에서 민사 문제를 형사 문제화하려면 사기죄가 성립돼야 하지만, 사기죄로 고소되는 사건 중 형사처벌되는 사건의 비율은 20%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악용해 사기죄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국가 형벌권을 조롱하는 악성 채무자가 늘고 있다. 이런 ‘선수급’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는 사이에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순진한 피해자들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채무자에게 주먹 한번 잘못 휘둘렀다가 오히려 폭행이나 상해죄로 형사처벌을 받는 아이러니가 속출한다.

    이렇게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가 왜 채무불이행죄를 신설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민사법률관계를 지배하는 대원칙이 계약자유의 원칙이므로 국가권력이 개인 상호간의 계약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는 학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현행 법체제에서는 채권자가 자신의 재산을 지킬 방법을 스스로 강구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돈 받아주는 형사절차

    지금까지의 설명이 이해됐다면 앞에서 예로 든 오해가 왜 오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민사재판에서는 A가 B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는데 왜 검사는 A를 형사처벌하려고 하는가.

    민사재판에서 A가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A가 B에게 사기를 쳤기 때문에 A가 B에게 줄 돈이 있는 것은 맞지만, B 역시 A에게 줄 돈이 있고 돈의 액수가 서로 같거나 오히려 B가 A에게 줘야 할 돈이 더 많다면 법원은 A를 상대로 돈을 내놓으라는 B의 청구를 기각하고 A에게 승소판결을 할 것이다. 그런데 A가 B에게 줄 돈이 있는지와는 별도로 A가 B에게 사기를 친 것이 맞다고 법원이 판단했다면 수사기관은 A를 사기죄로 기소할 것이다. A가 민사소송에서 이겼다고 결과를 낙관했다면 큰 오산이다.

    ②갑의 돈을 꿔간 뒤 갚지 않는 을을 형사고소하면 감옥에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을의 행위가 사기죄가 된다면 감옥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사기죄가 되는 사례는 드물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10년 10월호 500쪽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③X가 Y에게 상해를 가한 혐의로 형사재판에서 상해죄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곧 법원이나 검찰에서 Y에 대한 손해배상금까지 받아줄 것이다.

    X에 대한 수사절차나 형사재판절차에서 검사나 판사는 X에게 피해자인 Y와 합의했는지 여부를 계속 확인하고 합의할 기회를 줬을 것인데 그럼에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합의금액이 만족스럽지 못했을 수도 있고, X가 무일푼이라 합의할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합의 없이 형사재판을 마치고 그 판결이 확정됐다면 일단 X는 돈으로 합의하지 않고 ‘몸으로 때울’ 생각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형량을 높여서 처벌하는 것뿐이다. 피고인의 재산을 빼앗아 피해자에게 줄 수는 없다.

    민사와 형사 구별하기
    수사절차나 형사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이 손해배상을 했는지 여부를 형량에 반영하는 방법으로 검찰이나 법원이 피해자의 손해를 회복시켜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하다. 채무불이행죄가 없는 허점을 메우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그중 최근 도입된 제도인 형사조정제도에 대해 알아보자.

    형사조정제도란 검찰청 소속의 형사조정위원회에서 고소사건 당사자들이 피의자와 화해에 이르도록 조정하는 절차를 말한다. 다만 그 시점은 경찰에서 고소사건을 수사해 검찰에 송치한 뒤여야 하고, 고소인과 피고소인 양자의 동의가 있어야 조정에 회부할 수 있다. 형사조정의 대상은 사기나 횡령 등 재산범죄, 명예훼손 등 사적 분쟁사건 등의 고소장이 접수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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