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불이행죄가 없는 상황에서 민사 문제를 형사 문제화하려면 사기죄가 성립돼야 하지만, 사기죄로 고소되는 사건 중 형사처벌되는 사건의 비율은 20%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점을 악용해 사기죄를 교묘하게 피해가며 국가 형벌권을 조롱하는 악성 채무자가 늘고 있다. 이런 ‘선수급’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는 사이에 이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한 순진한 피해자들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채무자에게 주먹 한번 잘못 휘둘렀다가 오히려 폭행이나 상해죄로 형사처벌을 받는 아이러니가 속출한다.
이렇게 불합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가 왜 채무불이행죄를 신설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날 수 있다. 하지만 민사법률관계를 지배하는 대원칙이 계약자유의 원칙이므로 국가권력이 개인 상호간의 계약관계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믿는 학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따라서 현행 법체제에서는 채권자가 자신의 재산을 지킬 방법을 스스로 강구해두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돈 받아주는 형사절차
지금까지의 설명이 이해됐다면 앞에서 예로 든 오해가 왜 오류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민사재판에서는 A가 B에게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는데 왜 검사는 A를 형사처벌하려고 하는가.
민사재판에서 A가 돈을 갚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A가 B에게 사기를 쳤기 때문에 A가 B에게 줄 돈이 있는 것은 맞지만, B 역시 A에게 줄 돈이 있고 돈의 액수가 서로 같거나 오히려 B가 A에게 줘야 할 돈이 더 많다면 법원은 A를 상대로 돈을 내놓으라는 B의 청구를 기각하고 A에게 승소판결을 할 것이다. 그런데 A가 B에게 줄 돈이 있는지와는 별도로 A가 B에게 사기를 친 것이 맞다고 법원이 판단했다면 수사기관은 A를 사기죄로 기소할 것이다. A가 민사소송에서 이겼다고 결과를 낙관했다면 큰 오산이다.
②갑의 돈을 꿔간 뒤 갚지 않는 을을 형사고소하면 감옥에 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을의 행위가 사기죄가 된다면 감옥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사기죄가 되는 사례는 드물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동아 2010년 10월호 500쪽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③X가 Y에게 상해를 가한 혐의로 형사재판에서 상해죄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곧 법원이나 검찰에서 Y에 대한 손해배상금까지 받아줄 것이다.
X에 대한 수사절차나 형사재판절차에서 검사나 판사는 X에게 피해자인 Y와 합의했는지 여부를 계속 확인하고 합의할 기회를 줬을 것인데 그럼에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합의금액이 만족스럽지 못했을 수도 있고, X가 무일푼이라 합의할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합의 없이 형사재판을 마치고 그 판결이 확정됐다면 일단 X는 돈으로 합의하지 않고 ‘몸으로 때울’ 생각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형량을 높여서 처벌하는 것뿐이다. 피고인의 재산을 빼앗아 피해자에게 줄 수는 없다.

형사조정제도란 검찰청 소속의 형사조정위원회에서 고소사건 당사자들이 피의자와 화해에 이르도록 조정하는 절차를 말한다. 다만 그 시점은 경찰에서 고소사건을 수사해 검찰에 송치한 뒤여야 하고, 고소인과 피고소인 양자의 동의가 있어야 조정에 회부할 수 있다. 형사조정의 대상은 사기나 횡령 등 재산범죄, 명예훼손 등 사적 분쟁사건 등의 고소장이 접수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