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를 접하는 이의 주정(主情)에 좌우되듯 산의 인상 또한 그 품을 찾아들고 마루턱에 올라서는 사람의 정서에 달렸다. 골짝을 거쳐 산꼭대기에 올랐는지 아니면 능선 길을 걸었는지, 봄날에 찾았는지, 비 오는 여름날에 만났는지, 덧붙여 동행한 자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산의 모습, 산의 느낌이 달라진다.
계룡산은 성깔 있으면서도 멋스러운 구석이 많은 장년의 사내 같다. 스무 번도 넘게 이 산에 오르면서, 그리고 내 나이 쉰도 훨씬 넘은 때에 규정해본 산의 인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갓 스물의 어린 나이에 맨 처음 이 산을 만났을 때만 해도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의 풍수지리며 무속과 유사종교에 대한 선입관으로 기이(奇異)와 영묘(靈妙)의 감정이입이 없지 않았지만 그 사이 내 의식이 변하듯 산 또한 많은 변화를 거쳤다.
장년의 사내 같은 계룡
계룡은 크고 넉넉한 산이 아니다. 자태가 특별히 빼어난 것도 아니다. 키 높이만 따지자면 인근의 서대산보다 높지 않고 현란함으로 치면 지척의 대둔산에 미치지 못한다. 넉넉하고 부드럽기로는 100리 안팎의 속리산을 감당할 수 없다. 주위에 이런 벗들을 둔 덕일까. 계룡은 돌올하면서 넉넉하고 현란하면서 무디다. 오기와 겸손, 세련과 질박을 아울러 지녔기에 이는 계룡의 멋이 된다.
수년 전부터 계룡산의 번잡함은 도봉산, 관악산과 다를 바 없이 됐다. 벚꽃철 단풍철에는 더 말할 나위 없다. 남달리 한적한 산행을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신원사 쪽의 산길을 오르는 것이 예사지만 이쪽은 접근하기가 동학사나 갑사만큼 쉽지 않다는 난점이 있다.
공용주차장에서 가까운 산길 하나를 소개한다. 동학사 입구, 그러니까 오른편의 상가가 끝나고 조그만 다리가 나타나는 데서 걸음을 멈춘다. 등산로 안내판이 선 그곳에서 뭇 사람을 떠나보내고 오른쪽 샛길로 올라서는 것이다. 여관 건물을 지나면 천장 매표소가 나온다. 무당골을 지나 큰배재로 오르는 이 산길은 사계절 어느 때든 한적하고 아름답다. 다른 등산로에는 돌계단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심심찮게 흙길을 걷는 재미도 있다. 게다가 맑은 개울이 쉼 없이 숲길을 따른다. 보통 걸음이면 한 시간 만에 큰배재 능마루에 올라설 수 있다.
이곳에서 10여 분 평지 길을 걸으면 남매탑이 나온다. 바람 부는 가을날에는 바닥에 밤톨이 깔리는 산길이다. 남매탑에 닿았으면 반드시 삼불봉을 올라야 한다. 계룡산 전경은 물론 공주 유성까지 한눈에 잡히는 장쾌한 조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기운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는 이곳에서 남매탑으로 되내려와 동학사로 하산하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삼불봉~관음봉을 잇는 1.8km 자연성릉을 종주한 뒤 관음봉에서 동학사로 하산하면 더 좋다. 좁은 산길을 쉼 없이 오르내리며 깎아지른 단애를 통과하고 바위 벼랑에 걸린 아득한 철 사다리를 오르는 재미는 이 한 시간의 종주 코스에서 모두 맛볼 수 있다.
동학사에서 공주 가는 길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마티재를 넘고 금강 청벽을 거친 뒤 강 물줄기를 따라 산기슭 길을 달려야 했다. 그 중간 중간에는 계룡산을 파고들어 직접 갑사로 가는 풍치 좋은 산길도 있고 신원사는 물론 윤증(尹拯) 고택(古宅)을 만날 수 있는 논산 가는 갈림길도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 청벽에서 곧장 강을 타넘는 큰 다리가 생기면서 이 길은 차들의 행적마저 뜸한 옛길이 됐다. 터널이 뚫려 힘겹게 고갯마루를 타넘을 일도 없게 됐다. 고속도와 다를 바 없는 새 길 덕에 대전-공주 내왕이 옆집 나들이처럼 쉬워졌지만 경치 보며 길 가는 재미는 훨씬 덜해졌다.
동학사에서 공주까지
그러나 동학사에서 공주로 가는 길목에는 여전히 들를 만한 데가 여럿 있다. 우선 공주와 유성, 동학사로 나눠지는 박정자 삼거리에서 2km쯤 공주 쪽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상신, 하신 마을로 들어가는 샛길이 있다. 상신까지만 갔다 와도 좋다. 선주형(船舟型)의 특이한 풍수지리를 지닌 이 산속 마을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리고 마을 건너편에는 도자기 예술을 하는 작가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도예촌이 있어서 한가롭게 그들의 작업과정을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손에 흙을 묻히는 체험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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