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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라이벌 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남성의 로망, 가장 탐나는 슈퍼카

  • 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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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초는 알파 로메오와 결별 당시 향후 4년간 자신의 경주차에 페라리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때문에 티포 815에도 페라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첫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엔초는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스포츠카 생산이 불가능해지자 꿈을 잠시 미뤄둔 채 항공기 엔진 부속과 공구를 만들어 군에 납품하며 큰돈을 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자동차 생산이 재개되자 엔초는 페라리 이름을 단 첫 번째 자동차인 ‘페라리125 Sport’를 탄생시킨다. 1.5L 12기통인 이 차는 1947년 5월 피아첸차(Piacenza) 서킷에 데뷔한 지 2주 만에 로마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차지해 세상을 놀라게 한다. 1년 후엔 2.0L 엔진의 도로용 스포츠카 페라리166S를 내놓는다.

이후 엔초 페라리는 4.1L 엔진에 220마력의 힘을 가진 페라리 340아메리카를 비롯해 250유로파, 375아메리카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유럽의 수많은 자동차경주에 참가한다. 페라리는 당시 모든 차량 개발의 최우선 조건을 최고시속 달성에 두고 오로지 경주에서 우승하는 데 몰입했다. 결국 엔초는 1951년 영국 그랑프리에서 당시 세계 최고였던 알파 로메오 레이싱 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첫 차를 출시한 지 불과 4년 만이다.

평소 알파 로메오에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엔초는 알파 로메오를 처음으로 이긴 이 대회 우승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를 죽였다…”고. 자신을 최고의 레이서로 키워줬지만, 결국에는 배신한 알파 로메오를 향한 복수의 한마디였다. 이 말은 엔초의 승부사 기질과 당시에 느꼈던 배신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게 한다. 이후 페라리의 차들은 전 세계 자동차경주에서 5000회 이상 우승하며 지금까지 전설로 남아 있다.

1952년 엔초는 스포츠카의 거장 피닌 파리나를 영입해 페라리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페라리는 달리는 예술품이자 전설의 슈퍼카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간다.

엔초의 독설이 탄생시킨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페루치오의 초고 성능 슈퍼카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이뤄낸 결과가 바로 람보르기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람보르기니의 역사는 1963년에 시작됐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근원을 1916년 페루치오의 탄생에서 찾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태어난 성좌(星座)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준다고 믿는데, 페루치오는 총명하고 충동적이며 의지가 굳은 황소자리를 타고났다. 그의 일생을 보면 황소자리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난다.

엔초 페라리의 숙적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레나초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용차량을 정비하는 병사로 근무한다. 전쟁이 끝난 후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을 떠났다가 길가에 버려진 군용트럭을 보고 사업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려진 군용트럭을 끌어 모아 트랙터로 개조하는 사업을 벌여 큰돈을 번 페루치오는 자신의 피아트를 개조해 레이싱 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자동차광이면서 동시에 여러 명차를 보유한 수집광이었다. 그런 그도 처음부터 자동차회사를 설립할 생각은 없었다.

람보르기니 vs 페라리

카운타크 콰트로발볼레.

페루치오가 슈퍼카를 만들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인 페라리와의 악연에서 시작된다. 1960년대 초 페루치오는 당시 인기 스포츠카였던 페라리 250GT를 소유했는데, 클러치의 결함을 발견하고 개선책을 찾기 위해 엔초 페라리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엔초는 “트랙터나 만들던 사람이 어떻게 슈퍼카를 알겠는가? 트랙터나 운전하며 살라”고 면박을 주며 문전박대했다.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던 페루치오는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페라리를 능가하는 슈퍼카를 직접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즉시 자동차회사 설립에 착수한 페루치오는 19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람보르기니’를 창업한다. 페루치오는 “무조건 페라리보다 빨라야한다”는 첫 번째 원칙을 세우고 지금의 본사가 있는 볼로냐 인근에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공장을 짓기 시작했다. 공장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둔 페루치오는 공장을 짓는 건설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직원들을 독려하는 동시에 최고의 기술자들을 끌어 모았다. 당시 페라리에 근무했던 파올로 스탄자니(Paolo Stanzani), 잔파울로 달라라(Gianpaolo Dallara) 등도 최고 대우로 영입했다.

페루치오는 이때 페라리의 최신 엔진을 개발한 지오토 비자리니(Giotto Bizzarini)를 함께 영입했다. V12 엔진을 개발해 페라리를 앞지르기 위해서였다. 람보르니기의 첫 작품은 1964년 5월에 탄생했다. 바로 350GT이다. 최대출력 270마력에 최고시속 230km를 내는 이 차는 첫 작품치고는 대단하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경쟁 모델이면서 페라리의 역대 최고 모델로 꼽히는 페라리 250GTO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50GTO는 V12 엔진에 최대출력 302마력, 최고시속 273km의 성능을 지녀 350GT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았다. 첫 작품에 만족하지 못한 페루치오는 후속모델인 400GT를 곧바로 내놔 시장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며 ‘슈퍼카 생산은 무모한 시도’라는 업계의 비웃음을 날려버렸다.

이후 페루치오의 신임 아래 스탄자니와 달라라는 좀 더 새롭고 진보된 차를 개발하고자 2인승 레이스카인 코드네임 400TP 개발에 착수한다. 지나치게 혁신적인 아이디어였기에 두 엔지니어는 페루치오의 즉각적인 승인이 떨어지자 깜짝 놀랐다. 페루치오는 이 모델이 기껏해야 50대 정도 팔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브랜드 홍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바로 승인했던 것이다. 1965년 10월 이 차는 이탈리아 토리노 오토쇼에서 처음 일반에 공개되며 큰 관심을 모은다. 하지만 페루치오가 오토 쇼에서 얻은 성과는 따로 있었다. 람보르기니를 세계 최고의 차 반열에 올려놓을 천재 디자이너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를 만난 것이다. 400TP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에 호감을 느낀 베르토네가 페루치오의 팀에 합류하면서 람보르기니는 비로소 슈퍼카 양산의 기초를 다진다. 베르토네는 이후 람보르기니만의 독자적인 디자인 철학을 완성해 람보르기니 역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평가받는다.

최초 ‘슈퍼카’ 미우라

1966년은 람보르기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해다. 당대 최고의 명차이자 지금까지 최고의 슈퍼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미우라가 거장 마르첼로 간디니(Marcello Gandini)와 베르토네의 손에서 탄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V12 4.0L 엔진을 탑재한 미우라는 최대출력 350마력에 최고시속 295km라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성능을 내는 진정한 스포츠카였다. 성능과 품질, 아름다움에서 페라리는 물론 당시의 모든 스포츠카를 뛰어넘은 미우라는 자동차 역사상 최초로 ‘슈퍼카’칭호를 부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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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현| 동아닷컴 기자 c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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