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9월호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입력2012-08-22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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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액체 근대성’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대세의 흐름에 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서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ㆍ조직적 자질이 되었다. 물처럼 흘러야지 섬처럼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파리 5구의 뤽상부르 공원.

    대상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객관적 묘사가 불가능하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 그 형태와 질감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수 있다.

    그런데 10년 만에 파리에서 돌아왔는데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나와 서울의 풍경 사이 거리가 점차 좁혀지고 있다. 처음에는 혼잡스러워서 견딜 수 없었던 장소에 가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나는 당연해지는 풍경들을 다시 낯설게 보기 위해 눈앞의 서울과 일부러 거리를 둔다. 서울에 살면서 파리 사람의 눈을 유지하려고 해본다. 그래서 프랑스 학자들이 쓴 책들을 꺼내 읽고 도서관에 가서 ‘르몽드’ 신문을 찾아 읽고 인터넷으로 ‘프랑스 퀼튀르’ 라디오 방송을 연결해서 듣는다.

    중년의 사회학자가 서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떤 편견이 들어 있을까? 거기에 유럽 중심주의 시각은 없을까? 20세기에 한국인은 스스로를 주변부로 인식하고 중심부로 생각되는 미국과 유럽을 모방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엘리트층일수록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를 구사하며 선진국을 보기로 삼아 우리 사회를 이렇게 고쳐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제 일본, 한국, 동남아시아에 이어 중국 경제의 비약적 성장에 힘입어 서구 중심주의적 편견이 많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서구인의 시각으로 비서구 사회의 문화를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관습적 사고가 다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문명은 쇠퇴하는 물질문명이고 동아시아문명은 떠오르는 정신문명이라면서 21세기는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가 세계를 인도해야 한다는 아전인수 격 ‘옥시덴탈리즘’도 경계하고 있다. 서구인들이 비서구 사회를 편견을 갖고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비서구인들이 서구문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단순화하고 왜곡해 바라보는 것도 문제다. 서로는 서로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자신과 상대방을 편견 없이 바라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여야 한다.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변한다. 외국에서 6개월만 살다 돌아와도 물정을 모르는 촌사람이 되는 듯하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의 사회를 ‘액체 근대성’의 사회라고 정의하면서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머무르지 않고 계속 변하는 상황을 관찰했다. 그런 액체 근대성의 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대세의 흐름을 주시하면서 언제든지 거기에 알맞게 스스로를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외부의 변화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뜻하는 ‘유연성’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조직적 자질이 되었다. 물처럼 흘러야지 섬처럼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는 금방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외형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관습, 관행, ‘문화적 문법’이 있다. 겉모습은 변했지만 속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서울의 풍경 가운데는 새롭게 등장한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변형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이 연재물은 그런 풍경들을 아무 순서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려는 하나의 작은 시도다.

    풍경#36 서울의 변화 한 세기

    19세기 말, 20세기 초 개화기에 조선을 방문한 프랑스 사람들은 조선의 풍경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1888년 말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바라는 ‘조선기행’(1892)에서 다음과 같이 서울을 묘사했다.

    “언뜻 보아서는, 심지어 서울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도시들만큼 비참하고 처량하고 가난해 보이는 도시들은 없는 것 같다.”

    1890년대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의 여성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코리아와 그 이웃나라들’(1897)에서 자신이 관찰한 바를 이렇게 묘사했다.

    “길들은 좁고 더러우며 개천은 액체와 고체 쓰레기를 끌어안고 있는 비참한 곳에 한국인들은 산다. 그러한 곳에 짚으로 지붕을 엮고 진흙으로 벽을 쌓아올렸으며, 창문이라고는 없는 낮은 오두막들이 있을 뿐인데 집들 사이에 더러운 개들과 절반 또는 전부 벌거벗은 어린이들이 먼지와 흙을 뒤집어쓴 채 뛰어논다.”

    샤를 바라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다시 살아나 서울을 방문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서울 풍경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30, 40년 동안에 새롭게 조성된 강남은 말할 것도 없고 개화기에 서양인들이 방문했던 강북 지역의 변화도 100년 전의 모습과 비교하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서울의 하수도는 깨끗하게 정비되었고 도로는 잘 포장되어 먼지가 나지 않으며 초가집은 다 없어지고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섰다. 종로의 삼성생명 빌딩, 새로 지은 시청 건물, 자하 하디드가 설계해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새로 들어서는 거대한 의류상가, 이태원의 용산구청 청사, 한남동의 일신기업 건물 등은 세계 어느 도시의 현대식 건물과 비교해도 외형상 아무런 손색이 없다.

    풍경#37 단조로운 자동차 색상

    1980년대 초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내가 받은 인상은 ‘다양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를 굴러다니는 자동차의 종류와 색깔도 다양했다. 1990년대 중반 타이베이, 마닐라, 방콕 등 동남아시아 나라들의 수도를 여행했을 때도 거리에 다양한 외제 자동차들이 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 외국 자동차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서울 거리에도 벤츠, 아우디, BMW, 미니, 푸조, 볼보, 피아트, 도요타, 포드 등 고가의 외제 승용차들이 굴러다닌다.

    거리의 건물과 더불어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도시의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 서울과 파리의 거리 분위기가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자동차의 색상이다. 파리 거리에는 빨강, 초록, 파랑 등 밝은 색상의 자동차들이 자주 눈에 띈다. 그러나 서울에는 검은색과 회색 자동차가 주조를 이룬다. 가끔 밝은 색 자동차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자동차의 색상이 무겁다. 무거운 자동차 색깔은 한자리 하는 남자들의 양복 색깔이나 마찬가지로 한국의 획일적 권위주의의 상징일 수도 있다. 검은색 외제 승용차는 “나 이런 사람이니까 잘 모셔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일상의 모든 행위는 자기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무슨 색의 옷을 입을 것인지와 마찬가지로 무슨 색의 자동차를 탈 것인지도 자기 연출의 한 방법이다. 의상에서 다양한 개성이 드러나듯 자동차의 색상도 좀 더 밝고 다양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풍경#38 네일케어, 매니큐어

    며칠 전 강남 신세계백화점 10층 식당가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어디에선가 진한 아세톤 냄새가 풍겼다. 아이스크림 상점 앞에 있는 네일케어센터에서 젊은 여성들이 손을 내밀고 있는 고객들의 손을 마사지하고 손톱을 정리하고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있었다. 몇 달 전 홍대 앞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유리창을 통해 본 특별한 장면이 떠올랐다. 고객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발치에 젊은 여성들이 쭈그리고 앉아 발을 마사지하면서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해주고 있었다. 여성들의 손톱, 발톱 정리는 매우 은밀한 사적 공간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나의 통념을 깨는 장면이었다. 그런 일들이 상품화되어 돈을 주고받는 서비스업으로 번창한 것도 그렇지만 과거 밀실에서 이뤄지던 일들이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개방 공간의 일상적 풍경이 된 것도 흥미롭다.

    오늘날 세계가 하나 되면서 파리와 밀라노,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서울에 동시간대 패션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있다. 그건 섹시하고 도전적으로 보이는 여성상이다. 그런 에로틱 전사형 미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의 하나가 매니큐어다. 1990년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쓴 한 대학 교수가 자기에게 가장 에로틱한 여성의 부위는 길게 기르고 빨간색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제 자기 외모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는 여성들은 손톱을 손질하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일을 일상화하고 있다.

    보통의 파리 사람들 가운데 깨끗하게 유지된 손에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을 가진 여성은 그리 많지 않다. 유한계급 마담을 제외하고는 파리지엔 대부분은 직장과 집안일에 이중으로 시달리느라 손톱 정리에 쓸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울에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한 아름다운 손이 넘친다.

    풍경#39 거리의 입맞춤

    1950년 로베르 드와노(Robert Doisnaud)가 찍은 ‘파리 시청 앞에서의 입맞춤’ 이라는 제목의 사진은 파리의 보도에서 젊은 남녀가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사람 모두 지그시 눈을 감고 있고 남자의 오른손이 여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여자의 고개는 남자의 어깨를 향해 왼쪽 뒤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멀리 파리 시청이 다소 희미하게 보이고 키스 중인 젊은 연인들 주변 인도에는 보행자들이 걸어가고 있고 차도에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당시 파리의 분위기는 사실 그 정도로 자유롭지는 않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사진은 연출된 장면을 찍은 것이었다. 그러나 1968년 5월운동은 성해방을 가져왔고 1980년대 유학 시절 나는 파리의 거리에서 남녀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보고 다녔다. 당시 그런 장면들은 나에게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2000년대 10년을 파리에서 보낼 때는 버스 정거장, 길거리 한 구석, 공원 벤치, 지하철 안에서 입을 맞추는 연인들의 모습이 그저 일상의 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날 서울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껴안고 입 맞추는 젊은 연인들을 보게 된다. 파리에서는 1968년이라는 요란한 사회운동 후에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성해방의 물결이 일어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조용하게 성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외의 그 수많은 모텔과 호텔은 그런 혁명을 위한 최소한의 설비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젊은이들은 그런 은밀한 장소가 아닌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 수단과 길거리에서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춘다. 젊은 세대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서 자유롭게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는 어른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 뒤를 따라가고 있다. 서울은 이제 파리와 마찬가지로 공공장소에서 자유로운 사적 애정 표현이 가능한 익명의 공간이 되었다.

    풍경#40 소공동 벽 광고

    1970년대 말 을지로에서 광교 쪽으로 나가는 사거리의 오른쪽 길에 서 있던 건물의 길고 넓은 벽에는 김홍도의 추수하는 풍경 그림이 크게 확대되어 붙어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뿌듯하고 편해지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리라. 평화롭고 해학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그 그림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현대적이지만 세련되지 못한 디자인 그림이 들어섰다. 옛 그림이 사라지고 그 근방에 새로운 건물이 여럿 들어서 전체적인 거리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나마 길 건너편의 오래된 한국전력 건물이 버티고 있어서 그 장소의 정체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옛 전차와 어느 가족.

    서울에서는 모든 것이 빨리 바뀐다. 그래도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들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강북 중심부에서 강남으로 가려면 시청 앞 광장을 지나 소공동 거리를 지나 3호 터널을 통과하게 된다.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내 눈에 익숙한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시청 앞을 지나 소공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플라자호텔이 있고 왼쪽에는 조선호텔이 옛날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반갑게 하는 것은 조선호텔을 지나 한국은행에 도달하기 전에 길 오른쪽 건물의 넓은 벽에 붙어 있는, 현대식 전광판이 아닌 재래식 광고판이다. 1980년대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시아나항공 광고판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옛날의 광고문구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 문구 밑에는 항공사 여승무원이 아름답게 미소 짓는 모습이 있다. 아마도 모델이 된 승무원은 그동안 몇 번에 걸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미소를 띠고 있는 여승무원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풍경#41 모나미 볼펜

    대형서점에 부속된 문방구 코너에 가보면 편리한 도구가 많이 나와 있다. 스티커 포스트잇, 형광펜, 서류 분류함, 스테이플러, 그리고 색깔과 굵기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필기도구가 즐비하게 전시돼 있다. 거의 모든 것이 다 새로운 것들이지만 그곳에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모나미 볼펜을 발견했다. 1960년대에 내가 쓰던 모나미 볼펜과 똑같이 볼펜의 몸통은 흰색이고 볼펜의 아래쪽과 볼펜심을 움직이는 스위치 부분은 검은색이다. 볼펜의 몸통 위에는 ‘Monami 153 0.7’이라는 검은색 글자와 숫자가 박혀 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몽당연필을 모나미 볼펜의 몸통에 끼워 쓰기도 했다. 모나미는 프랑스어로 내 친구란 뜻인데 불어로 표기하자면 ‘mon’과 ‘ami’를 띄어 써야 한다. 아마도 모나미는 내가 가장 처음 접한 프랑스어 어휘일 것이다. 문방구에는 내가 초등학교 때 쓰던 문화연필도 그대로 있다. 그런데 연필 몸통에 칠한 색상과 디자인은 달라져 있다.

    풍경#42 효의 가치

    프랑스의 모든 학교와 관공서 건물 입구에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새겨져 있다. 193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학교 교실 뒷면에는 충(忠)과 효(孝)라는 글자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1990년대 어느 대학 총장은 효(孝)라는 가치를 세계로 수출하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012년 7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데 “효(孝)를 바탕으로 윤리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이라는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가 보였다. 며칠 후 택시를 타고 가는데 거리의 작은 공원 입구에 ‘효(孝)공원’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윗돌이 보였다.

    자유, 평등, 박애가 혈연과 지연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가치라면 효는 혈연으로 맺어진 자기 부모에 대한 가족주의적 의무다. 효를 근본가치로 내세우는 사회에서 윗사람은 단지 군림하고 지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랫사람을 보살피고 자애를 베푼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상하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따뜻한 정은 있을지 모르지만 효를 내세운 관계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부자유스러운 관계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 불교를 버리고 유교를 국가의 통치철학으로 삼은 이후 효라는 가치는 거의 7세기 동안 한국인의 가족생활을 지배하고 사회생활을 규제했다. 오늘날 가족관계에서만 보자면 효라는 가치의 규제력은 상당히 느슨해진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돈 벌어오는 기계로 전락했고, 그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다.

    그럼에도 효라는 가치를 대신할 자유와 평등이라는 가치는 충분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파리에서는 스무 살이 넘으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평등한 성인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아직도 나이 차이가 인간관계를 상하관계로 만든다. 물론 익명의 사람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지만 지속적인 관계가 만들어지면 나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상하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약해졌지만 형님의 권위는 여전하다. 중국이 G2로 부상하면서 유교의 장점을 재평가하려는 지적 운동이 활발하다. 그러나 유교의 근본이라는 효의 가치 안에 들어 있는 수직적 인간관계를 청산하는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유교적 가치의 복원은 권위주의적 가치로의 회귀로 끝날 수 있다.

    풍경#43 에너지 절약 구호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일수록 구호와 광고가 많다. 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화려하게 번쩍이는 광고들, 지하철 연결통로와 객차 안, 거리의 전광판에서 TV 화면을 거쳐 컴퓨터 화면에 이르기까지 도처에 광고 이미지와 광고문구가 난무한다.

    최근에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어’라는 제목의 지적 자서전을 펴낸 미국 보스턴대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1970년대 자동차를 타고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등 동유럽 사회를 돌아보고 난 다음 서유럽 국가들을 순방했다. 그는 두 사회를 비교하면서 동유럽 공산권 사회에는 공적 장소에서 정치적 구호가 많이 보였는데 서유럽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오니 도처에 상품광고가 널려 있다고 말했다.

    파리의 거리에도 상품광고는 도처에 있지만 정부 시책을 선전하는 구호는 찾아볼 수 없다. 예외적인 것은 가끔씩 오래된 건물의 벽에 붙어 있는 녹슨 양철판들이다. 여기에는 영국에 망명해 있던 드골 장군이 1941년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 진 것은 아니다”라며 프랑스인들에게 항독(抗獨)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기를 권유한 연설문이 적혀 있다.

    1987년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시대에는 우리 사회에도 반공과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표어가 많았다. “북괴 도발 못 막으면 자유 없는 노예된다”“증산, 수출, 건설” 등의 표어가 그 보기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서울이라는 공간의 구석구석에 상품광고가 침투해 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어느 성형외과에 도착하기 몇 초 전에 그 성형외과를 광고하는 소리가 나오고 버거킹 앞에서는 그 식당 광고가 나온다. 고층건물 옥상의 광고탑, 사거리 건물 벽의 전광판, 택시 뒷좌석 앞의 화면 광고에 이르기까지 눈길이 닿는 곳 모두가 광고의 공간이 되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서초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이런 안내문구를 보았다. “정부 시책으로 도서관 실내 온도를 섭씨 26도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유가 인상과 여름철 에어컨 과도사용으로 전력낭비가 심하다고 판단한 정부가 공공기관을 통해 에너지 절약의 모범을 보이기로 한 모양이다. 사실 원전 건설을 반대하기 전에 에너지 절약운동부터 벌여야 한다. 도서관을 나와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거리의 전기시설 보호 상자 표지에 이런 구호가 쓰여 있다. “전기는 국산이지만 연료는 수입입니다.” 버스 정거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운전기사 오른쪽 위에는 이런 표어가 적혀 있었다. “난폭운전 연비 저하, 배려운전 연비 향상”

    풍경#44 아파트 장터

    파리 이곳저곳의 대로 중앙에 있는 빈 공간에는 수요일과 토요일에 정기적으로 장이 열린다. 16구의 프레지당 윌슨 거리, 14구의 에드가 키네 거리가 대표적이다. 장이 열리는 날 아침에 그곳에 가보면 파리 바깥의 일 드 프랑스 지방과 노르망디 지방에서 트럭으로 물건을 싣고 온 상인들이 길 양쪽으로 죽 늘어서 긴 상가를 만든다. 21세기 파리에 남아 있는 19세기의 풍경이다.

    서울에도 정기적인 장이 선다. 긴 대로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 공터에 선다. 시골장을 연상시키는 아파트 단지의 정기 시장에는 천막을 친 가게가 늘어선다. 그런데 서울 아파트 단지에 선 시장에선 파리의 거리 시장 같은 활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일단 서울 아파트 단지의 정기 시장 고객이 아파트 단지의 주민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파리의 거리 시장에는 그 동네 사람만이 아니라 멀리서 자동차를 타고 오는 사람도 있다. 시장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파리 서쪽 16구에 사는 사람도 값싸고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구하러 파리 동쪽 12구의 바스티유에서 열리는 시장으로 장을 보러 가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는 시장에는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두 시장의 활기의 정도가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서울의 아파트 단지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들이 단조로운 데 있다. 파리의 거리 시장에서는 과일, 꽃, 육류, 치즈, 우유, 포도주, 꽃, 옷, 신발, 향료, 올리브유, 생선, 골동품, 책, 그림, 옷, 액세서리, 수예품 등 생활에 필요한 갖가지 상품이 거래되는 반면 서울의 아파트 단지 내 시장에서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농축산물이 거의 전부다. 나머지 상품들을 사려면 마트나 백화점으로 가야 한다. 파리의 시장에서는 일상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삶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반면 축 늘어진 서울의 정기 시장에서는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풍경#45 동십자각의 총탄 자국

    한 도시의 정체성은 언제나 변하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는 장소들이 있기에 유지된다. 고궁은 빠르게 변하는 서울을 전통 있는 서울로 인식하게 만드는 중요한 장소 가운데 하나다. 세종대로 뒤쪽 북악산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은 오랜 공사 기간을 거쳐 일제에 의해 훼손된 본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다. 그 근처를 지나가다 보면 1970년대 대학생 시절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앞에 있던 프랑스문화원에 영화를 보러 다니던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경복궁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망루 같은 건물 하나를 그냥 무심코 쳐다보며 지나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십자각이라고 하는 그 건물은 경복궁 담장 동남쪽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던 망루였는데 주변에 길이 나면서 경복궁과 분리되어 차량의 물결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얼마 전에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옛 생각을 하면서 그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돌계단 사이로 풀잎이 자라있고 망루를 이루는 돌에는 총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6·25전쟁 때 거리 교전의 흔적인 듯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시가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상처 난 돌은 그 흔적을 역력히 간직하고 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
    정수복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EHESS(사회학박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 소장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한국문화사회학회 이사(현)

    저서: ‘파리를 생각한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시민의식과 시민참여’ 등


    파리 센 강가에서 멀지 않은 생제르맹 데 프레 거리에는 국방부 건물이 있다. 언덕 위에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서울의 국방부 건물과 달리 다른 건물들과 수평으로 키를 맞추어 대로변에 서 있는 건물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건물 출입구 이마에 붙어 있는 건물의 이름이다. 거기에는 ‘국방부(Ministere de Defense Nationale)’가 아니라 ‘전쟁부(Ministere de Guerre)’라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부서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그 건물 외벽에도 총탄 자국이 많이 남아 있다. 1870년 파리코뮌 때 정부군과 시민군이 벌인 전투의 흔적일 수도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시민군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의 흔적일 수도 있다. 서울이나 파리나 어느 한구석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는 지나간 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무언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분주하게 쫓기는 도시 생활의 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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