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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주사파를 말하다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주사파 지하조직 자민통 리더 구해우

  • 구해우│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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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민통 리더 시절 임수경 방북 동의해준 일 후회해
  • ● 조혁, 안희정의 반미청년회가 KAL기 폭발 테러 음모론 퍼뜨려
  • ● 反美親中으로 흐르는 친북좌파 경계해야
  •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은 주사파 지하조직인 자주민주통일그룹(자민통) 리더 출신이다.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한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 SK텔레콤 남북경협 담당 상무를 역임했다. 현재는 통일부 자문위원, 중앙대 북한개발협력학과 겸임교수로 일한다. 그가 주사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밝히는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1994년 10월 3일 한양대 학생들이 교수들이 쓴 주사파 학생 비판 대자보를 보고 있다

7월21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다녀왔다. 12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묘역을 오랜만에 찾았다. 아버지 묘비 옆에는 6·25 전쟁 때 전북 완주에서 전사한 분, 충남 서산에서 전사한 분이 영면에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대신해 징용에 끌려갔다. 광복 이후에는 전남 화순군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아버지는 경찰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쟁터에 나가 부상당한 이 땅의 수많은 민초 중 한 분이다. 남우세스럽지만 필자는 어려서 공부를 잘했다. 가족의 기대가 대단했다. 가족들은 집안을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1984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법조계에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바람과 달리 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1987년 이후에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비공개 수배를 받으면서 도망자 생활이 시작됐다. 1990년엔 주사파 지하조직 자민통 수괴로 지목돼 지명수배를 받았다. 1년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김영삼 정부가 가석방 형식으로 풀어줬다. 출소한 후 아버지는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사회변혁 운동에 대한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 때문에 속병을 앓으시던 아버지는 2000년 보훈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분이 아니셨다. 6·25전쟁 유공자인 아버지가 아들이 ‘주사파’‘빨갱이’라는 이유로 도망을 다니고 교도소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을지 생각하면 너무 죄송스러울 뿐이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

“종북주사파보다 친북좌파가 더 위험하다”

민족민주혁명당을 결성, 활동한 죄로 복역 중 교도소의 배려로 2003년 6월 24일 특별휴가를 받은 이석기 현 통합진보당 의원(오른쪽)과 먼저 출소해 석방투쟁을 벌이던 동료 하영옥씨가 대전교도소 앞에서 서로를 껴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아버지가 묻힌 대전국립현충원에서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지, 애국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아버지는 학교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다. 나라, 민족, 애국의 의미를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이해하고 계신 분은 아니었다. 분단과 전쟁이라는 질곡을 거쳐오는 과정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원초적 감성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부상하신 것이었다. 서산, 완산에서 전사하신 분도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난 지 30년 뒤 대학을 다닌 우리 세대의 일부는 신식민지, 분단, 독재라는 질곡을 혁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수용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 자주적 민주통일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질풍노도의 세월을 살았다. 이름 없는 민초로서 나라를 지킨다는 원초적 감성으로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하거나 부상한 이들이 진정한 애국자일까? 아니면 마르크스레닌주의·주체사상을 공부하고 변혁운동을 하던 우리가 진정한 애국자일까?



1980년대 대학가는 우울했다. 신군부가 광주시민을 학살한 사진이 전시됐다. 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끔찍했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서클 수준, 명망가 위주로 이뤄지던 1970년대식 민주화운동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광주의 비극을 경험한 학생운동은 사상, 조직, 대중운동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발전했다.

1980년대 서울 및 지방의 주요 대학에선 전체 학생의 과반수 이상이 ‘해방 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등 좌파 역사관에 기초한 책을 탐독했다. 필자의 추산으로는 주요 대학 학생의 10% 안팎이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주체사상을 공부했으며 일부 학생은 그것을 신념화했다. 1980년대 이전에는 극소수의 변혁운동가들만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수용했다. 운동가 대부분은 절차적 민주주의, 인권적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반면 1980년대 이후에는 수만 명의 대학생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에 기초해 ‘사회주의적 변혁운동’을 추구했다. 19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은 노동계로도 퍼져나갔다. 소련식 사회주의에 경도된 이들을 PD(민중민주), 주체사상을 신념으로 삼은 이들을 NL(민족해방)이라고 했다.

요컨대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조직이 직·간접적으로 주도한 대중적 조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구국의 소리’ 통해 지침 받아

1980년대 이전의 민주화운동이 소수의 재야인사 중심으로 이뤄진 간헐적 투쟁이었다면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활동가와 대중이 함께 움직인 상시적 투쟁이다. 지금은 486으로 불리는 386 세대는 학생운동을 했든, 그렇지 않든 1980년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거나 소극적으로 참여한 이들 중엔 부채 의식 탓인지 나이가 들어 좌파 의견에 경도된 사람이 많다. 고(故) 김근태 의원에 대한 부채감을 피력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비슷한 사례인 것 같다.

민주통합당은 옛 주사파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사고 한쪽에 잔재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사상은 절대로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북한이 남한 지하조직에 ‘KAL(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미국 중앙정보부(CIA)와 안기부의 음모’라고 가르쳤다. 주사파는 북한의 주장이 고스란히 담긴 문건을 만들어 대학에 배포했다. 주사파의 메커니즘을 구동했던 사람으로서 천안함 폭침사건 이후의 갑론을박을 보면 당시가 떠오른다.

한국 주사파의 뿌리는 통일혁명당이다. 김종태 등이 북한 노동당과 연계해 결성한 통혁당은 1968년 중앙정보부에 의해 적발됐다. 주모자들은 1968년 사형됐다. 통혁당의 흐름은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어진다. 한민전은 북한 노동당 지침에 따라 활동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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