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항공산업계는 국산 전투기로 F-2를 개발 생산했으나 커다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된 F-2 전투기들의 모습이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일본 항공기산업에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주었다. 확전으로 전투기와 폭격기 소요가 급증해, 1936년 한 해 동안 민간기업은 557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다. 이듬해에는 두 배인 1144대를 생산했다. 아시아 점령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군용기 소요는 더 증가했다. 1938년 육군은 2262대를 요구했고, 1939년에는 3064대를 요구했다.
공포의 제로센 허상 드러나
중일전쟁이 시작됐을 때 일본군은 월 항공기 100대 생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양산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만큼 일본 기업들의 기술과 자본은 성숙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항공기 성능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최신 항공기에 장착되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정밀부품을 대량 생산할 수 없었다. 일본의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민간 항공기 제작사가 다양한 항공기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했다. 미쓰비시는 무려 1만500여 대의 제로전투기를 납품했고, 나카지마(현 후지중공업)는 2만6000여 대의 항공기를 납품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에서는 60여만 명의 노동자가 연간 2만5000여 대의 항공기, 4만여 개의 엔진을 생산했다. 1944년경에는 12개의 항공기 제작사와 7개의 엔진 제작사가 있었다.
일본 해군이 채용한 레이센, 즉 제로센은 뛰어난 기동성과 상승속도, 긴 항속거리 등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진주만 기습으로 초전에 승기를 잡은 일본 해군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제로센에 탑승해 미군을 공략했다. 실전 경험은커녕 비행경력도 짧았던 미군 조종사들은 성능이 낙후된 전투기로 제로센을 막아섰다가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미군은 ‘제로센 쇼크’에 빠졌다.
미군이 추락한 제로센 기체를 획득한 후 상황은 바뀌었다. 분석 결과 제로센은 소문만큼 우수한 전투기가 아니었다. 엔진 출력이 부족한데 강력한 기동성을 확보하려다 보니 장갑을 제거해 기체가 약해져버렸다. 미국은 제로센이 공중분해될 것이 두려워 급강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기관포 몇 발만 맞아도 산산조각 날 만큼 연약하다는 것도 간파했다. 미군은 ‘태치위브(Thach Weave·미 해군 조종사인 태치가 개발한 공중전 전법)’ 전법을 활용해 제로센을 차례로 격파해나갔다.
미군 전투기들은 강력한 장갑과 우수한 전술로 우위를 점해나갔다. 일본은 그에 대응해야 했으나 능력이 달렸다. 제로센의 가면은 벗겨졌다. 일본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제로센을 설계·제조했다고 자랑했으나, 제로센은 영국에서 개발된 글로스터 F.5/34 전투기의 복제품이었다. 일본의 기술력은 모방설계와 생산까지는 가능했으나 엔진 출력을 강화하거나 장갑의 추가장착 같은 큰 개조는 전혀 하지 못했다. 실전에서 요구되는 사항을 제로센에 반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항공기의 대량생산에도 실패했다. 개전 초기 일본은 국력 차이를 고려해 항공기 생산목표를 미국의 3분의 1 정도로 책정했다. 1944년 일본은 일시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생산량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