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과정에 있는 사람과 기업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성공여부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 내릴 수 있는 때는 판을 접을 때인데, 사람의 경우는 가능하지만 몇 백년의 맥을 잇는 기업의 경우에는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사람이나 기업에 대해 평가를 할 때 ‘성공이다, 실패다’는 흑백논리로 단정짓기보다 지금의 위치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아닌지 여지를 남겨놓고 평가를 하는 게 옳을 듯싶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도자기는 방향을 잘 잡아 성장해 왔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먼저 역사적으로 반백년 이상을 잘 견뎌왔고, 창립 당시 업계의 끄트머리에서 지금은 선두주자로 부상, 영국의 웨지우드, 로열 덜튼, 일본의 노리다께, 독일의 빌레로이 앤 보흐와 함께 세계 5대 메이커 중 하나로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어음을 발행하지 않고 모든 거래를 현금으로 결제하고 있다. 빚이 없고 현금거래를 하다보니 경영도 투명할 수밖에 없어 납세의 의무도 성실히 이행해 세 차례씩이나 모범납세자 상을 받기도 했다.
한국도자기는 창업주의 2대 3대가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모체인 한국도자기를 비롯, 수안보 파크호텔, 로제화장품과 여기에 판매회사들까지 합해 모두 8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 기업 대부분에서 오너 일가들이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그 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창업주 고 김종호 회장은 아들 4형제를 두었다. 동수, 은수, 번웅, 성수씨 등이다. 이중 동국대 행정학과 교수인 3남 번웅씨만 빼고 모두 경영일선에서 일하고 있다. 장남인 김동수(金東洙·65) 회장이 모체인 한국도자기 회장으로, 차남 은수씨가 부회장으로(로제화장품 회장 겸임), 넷째 성수씨가 사장으로 각각 포진하고 있다. 김동수 회장의 2남 1녀도 모두 한국도자기와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다. 장남인 영신씨는 한국도자기 부사장으로, 차남 영목씨는 한국도자기 상무이사로, 딸 영은씨는 세인트 제임스 판매회사의 이사로 각각 일하고 있으며, 김회장의 부인 이의숙 여사도 딸이 일하는 세인트 제임스 대표로 있으며 직접 제품판매에 나서고 있다. 이외에도 김성수 사장의 부인인 이현자 여사는 이화여대 생활미술과를 나와 디자인센터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철저히 가족중심으로 기업운영을 하고 있지만 한국도자기는 아직까지 가족간의 재산싸움이나 경영권 다툼이 없었다.
어음결제 없는 회사
“다행히 가족들이 일을 감당할 그릇들이 되었어요. 동생들도 그렇고 우리 아이들도 다들 맡은 일들을 잘 해내고 있어요.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 회사에 와서 일하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 마쳤을 때 세 가지 안을 제시하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어요. 먼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라, 그러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둘째 취직하기 싫으면 건물을 사 줄테니 세를 받아 편히 살아라. 마지막으로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해라. 그러나 셋 중 마지막 길이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이다. 이렇게 말하고 선택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 모두가 마지막 안을 선택했어요.”
김동수 회장은 “대물림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목이 안되는 자식들에게 욕심으로 기업을 물려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가족회의가 곧 경영전략회의
한국도자기가 순항을 할 수 있게 된 데는 선장인 김회장의 역할이 컸다. 주위로부터 김회장은 집안의 맏형으로서 웃어른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의논할 안건이 생기면 먼저 가족회의에 부치고 각자의 의견을 들어요. 그런데 이때 의견이 분분해서 결정이 쉽게 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한 바대로 결정을 내려요. 그러면 모두들 군소리 않고 내 결정에 따라요.”
인터뷰를 하던 날, 동석한 김성수 사장은 김회장에게 거리감 없이 편하게 대하면서도 윗사람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했다. 그건 억지가 아닌 자연스럽게 몸에 밴 태도였다. 김무성 홍보이사는 “이런 태도는 비단 김사장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라고 귀띔했다. 형제들의 김회장에 대한 깍듯한 예우는 CEO 자리를 그만두고 물러나겠다는 형을 붙드는 태도에서도 알 수가 있다.
올해부터 지하철을 공짜로 타게 됐다는 김회장은 이제는 동생들에게 CEO 자리를 물려주고 쉬려고 해도, 둘째 동생은 “화장품 쪽에 할 일이 많아 할 수 없다”며 맡으려하지 않고, 넷째 김성수 사장은 “형이 더 하셔야지 무슨 소리냐”며 거절을 한다고 했다. 인터뷰 도중 김회장이 “내년에 둘째에게 한번 더 물어보고 못하겠다고 하면 김성수 사장에게 (한국도자기를) 맡기겠다”고 하자, 김사장은 “무슨 그런 소릴 하세요. 더 하셔야지” 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릇 도매상으로 시작해 2000여 명의 직원을 둔 국내 최고의 도자기 기업으로 성장한 한국도자기는 올해 창립 58주년을 맞았다. 강산이 여섯 번 가까이 바뀌는 세월 동안 한국도자기는 투박한 질그릇 회사에서 왕가의 명품인 본차이나 생산업체로 변신을 했다. 이처럼 화려한 변신으로 세계 속의 도자기회사로 자리잡으면서 한국도자기는 본차이나의 본고장인 영국의 ‘로열 덜튼’에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미국의 백악관 식기를 제조하는 레녹스, 독일의 빌레로이 앤 보흐, 이탈리아의 시슬라기 등 세계 유명 도자기업체에도 제품을 수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청와대를 비롯, 호텔 신라, 조선호텔, 인터컨티넨탈 호텔 등 대부분의 특급호텔에 납품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세계 50여 개국에 자사브랜드와 OEM방식으로 수출하고 있다. ‘세인트 제임스’라는 브랜드로 미국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에 수출하고 있는데 전체 수출물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김회장은 앞으로 “자사브랜드 수출물량을 확대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Made in Italy’ 하면 이름도 없는 회사가 옷을 만들어도 국가 신뢰도가 있기 때문에 라벨만 보고도 비싼 값에 팔리는데 우리나라 제품은 품질이 좋아도 제값을 받지 못해요. 그럴 때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한국도자기의 자랑 ‘본차이나’
이런 국가 신인도 때문에 자사브랜드로 나가는 세인트 제임스는 OEM방식으로 나가는 수출품보다 낮은 단가에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 한국도자기가 생산하고 있는 제품은 생활도자기 전품목으로 커피세트에서 주발, 찬기, 접시까지 그 종류만도 수백 가지다. 이러한 다양한 제품 중에서 한국도자기가 최고로 꼽는 제품은 본차이나. ‘본차이나’는 영국 왕가에서 사용하던 도자기로서 젖소의 정강이뼈를 태워 가루를 낸 다음 그 속에서 삼인산칼슘을 추출, 재료에 50%를 함유시켜 만든 것. 제품의 특성은 일반 제품보다 가볍고 강하며 보온성이 뛰어나고 빛깔도 맑고 부드럽다.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난다. 이런 장점 때문에 본차이나는 일반 제품보다 2∼3배 비싸다.
본차이나와 더불어 한국도자기가 자랑하는 제품은 ‘슈퍼스트롱’, 이 역시 젖소의 본애쉬를 추출(5%)해 만든 제품으로 일반 도자기에 비해 강도가 2∼3배 강하고, 수분 흡수율이 0.001% 이하이며 가격도 본차이나보다 20∼30% 저렴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 한국도자기는 전사지 공장을 포함, 청주에 7개 생산공장과 인도네시아에 3개의 공장을 보유, 월 350만개의 제품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청주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내수와 수출을, 인도네시아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전량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도자기는 750억원의 매출을 올려 77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올해는 미국 테러사태로 인한 미국경기의 침체와 국내의 불경기로 5% 정도 매출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김회장은 이런 매출 부진을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지난 IMF 때보다 경기상황이 더 나빠졌음에도 그때보다 오히려 매출이 10%나 늘어난 상태이고, 세계적으로 제품력을 인정받았고 좋은 제품을 생산해낼 시설까지 갖추고 있으니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폐허 속에서의 재건, 그속에서 기업을 성장시켜온 그로서는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지금의 불평이 한낱 엄살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김동수 회장이 한국도자기에 몸을 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59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던 그에게 부친 고 김종호 회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내용은 “공장이 빚도 많고 도자기 품질도 좋지 않으니 내려와 회사를 제대로 발전시켜 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고향 청주로 내려온 동수씨 앞에 펼쳐진 회사의 모습은 한마디로 참담했다.
회사는 빚덩어리였다. 이렇게 된 것은 1943년 창업 때부터 함께 일해오던 동업자가 그만두고 나가자 아버지가 그 지분을 인수하면서 사채를 끌어다 썼기 때문이다. 30여 명 되는 공장직원들의 월급도 3개월째 밀려 있었다. 허름한 판자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고, 생산시설이라고 가마 하나가 전부였다. 그야말로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여직원 한 명 있는 사무실에 그는 총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출근을 했다. 그러나 명색이 사장 아들인데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직원들은 일을 시켜도 듣는 척도 안했다. 3개월째 월급을 안 줬으니 말발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이때 동수씨는 직원들에게 약속을 했다.
“그동안 밀린 월급은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조금씩 갚아주고 나와 함께 일한 지금부터의 월급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날짜에 챙겨주겠다.”
그러나 아무도 코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장도 못 믿을 판에 책상물림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장 아들의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동수씨는 듣든 안 듣든 직원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고 먼저 환경이 깨끗해야 좋은 제품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두 팔을 걷어붙이고 화장실 청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들과 함께 몸을 부대끼며 밑바닥일부터 했다. 흙을 짓이기고 새끼를 꼬고 몸을 아끼지 않고 솔선수범하니까 직원들의 눈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수씨는 그릇을 만드는 대로 트럭에 싣고 직접 서울 거래처들을 다니며 물건을 납품했다. 새벽녘 그릇을 한 트럭 싣고 서울로 올라가 소매점들을 찾아가면 “이것도 그릇이라고 만들어왔느냐”며 그냥 가지고 가라고 밀어내기가 일쑤였다. 어렵게 물건을 맡기고 돌아와 뒤에 수금을 하러 가면 물건값을 깎으려고 받은 물량을 터무니없이 줄여서 말하는 등 오리발을 내밀었다. 물건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판매하고 수금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동수씨의 노력에도 회사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고 매일 빚독촉에 시달려야 했다.
“그당시 빚이 얼마나 많았던지 전체 매출의 40%를 이자로 내고 있었어요. 매일 은행 마감시간인 오후 5시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쳤어요. 어머니는 사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고 나는 전화통을 붙들고 하루만 연기해 달라고 통사정을 했어요. 그런 심정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얼마나 시달렸던지 밤이면 헛소리를 하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자질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 잠자리에 누울 때면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께도 이렇게 빚더미에 시달리게 하려면 차라리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어요. 얼마나 힘들었던지 입사 당시 56㎏이던 몸무게가 몇 달 지나지 않아 48㎏ 밖에 나가지 않았어요.”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