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독선과 자만이 빚은 反시장적 사회주의

격돌논쟁

  • 민경국 <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

    입력2005-03-22 14: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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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깔 논쟁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에 관한 자유로운 논의와 자유로운 경쟁, 그리고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리는 것,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이라는 국정지표를 내걸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대기업의 ‘빅딜’을 비롯하여 노동, 금융, 4대 보험제도 그리고 교육개혁 등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개혁들이 너무도 복잡하다. 정말로 만화경같이 보인다. 개혁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개혁의 수량과 내용의 복잡성 때문에 질려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화경처럼 보이는 개혁리스트를 일부 추출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전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지식인들은 개혁정책에 이념적 명칭을 부여한다. 일단 명칭을 붙이면 개혁 리스트를 일일이 보지 않아도 정당(政黨)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이념적 정체성이나 정치적 세계관은 정당이 장차 어떤 정책을 취할 것인지를 시민들이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념적 정체성이 흐린 정당은 그 정당이 장차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이념적 명칭은 이런 묘미를 갖고 있다. 서구의 정당들이 이념적 개념을 정당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념정당이야말로 시민들이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가면서도 의지할 수 있는 정치적 고향(故鄕)이다.

    이념정당의 묘미는 또 있다. 명칭만 보고 유권자들이 투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권자들은 아주 편하다. 이념만 보고도 그 정당이 나에게 이익을 보장해 줄 정당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에도 이념적 정체성은 유용하다. 그 이유는 이렇다. 현실은 매우 복잡하다. 이 현실을 하나씩 캐내 인지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정신은 현실을 인지하는 능력에서 선천적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인간정신은 좌절한다. 정당의 이념적 정체성, 즉 세계관은 현실의 복잡성과 이에 따른 인간정신의 좌절감을 달래준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며 안경이다. 반면 이념적 정체성이 희박한 정당은 불안하다. 그런 정당은 정당이라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국민의 정부’, 말하자면 정부여당에 이념적 명찰을 달아주는 논쟁이 한창이다. 현정부에 사회주의(또는 사회민주주의) 명찰을 달아줄 수 있느냐 아니냐가 논쟁의 핵심이다. 이른바 색깔 논쟁이며 정체성 논쟁이다(여기서 쓴 ‘사회주의’는 하이에크가 말한 ‘사회주의’ 개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같은 뿌리이며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이 글에서 사용된 ‘사회주의’ 개념 역시 넓은 의미에서 ‘사회민주주의’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우리 사회에서 이념 논쟁이 벌어진 것은 집권당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에 불행한 일이다. 단순히 우리 사회에서 색깔 논쟁이 갖고 있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색깔 논쟁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에 관한 자유로운 논의와 자유로운 경쟁, 그리고 경쟁을 통해 승패를 가리는 것, 그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색깔 논쟁이 불행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이런 논쟁이 생긴 이유는 정부여당이 자신의 세계관을 솔직하게 밝히지 않았거나 일관된 세계관에 따라 정책을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시민들은 정부여당을 이념에 대해 확신이 없는 정당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정부는 색깔 논쟁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정치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을 밝혀주는 것은 아마도 학자의 몫인지 모른다.

    좌파 학자를 비롯한 지식인 중에는 국민의 정부의 개혁정책은 ‘효율성만 따지는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일면 옳다. 국민의 정부는 과거와 비교할 때 여러 부문에서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대외 경제부문이 그렇다. 외환, 자본 그리고 무역자유화 등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부문이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이다. 그 밖의 분야도 과거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금융시장의 규제가 많이 풀린 점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요소들을 보면 좌파 지식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정부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의 이념적 특색을 강하게 드러내는 요소가 많다. 이 요소들을 찾아내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이중 하나는 결과적 평등에 초점을 맞춘 개혁정책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념적 요소는 여기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근원적인 요소로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인성관(人性觀)을 들 수 있다. 바로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정부여당이 시민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그런 정책을 펼치는가의 문제다. 근원적인 요소는 하나 더 있다. 개혁을 뒷받침하는 지식관(知識觀)이 그것이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에 따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고,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하다. 따라서 계획 전문가가 얼마나 사회경제를 알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 가지의 해답이 국민의 정부 개혁정책이 내포하는 사회주의적 요소다.

    좌파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개혁은 복지 분야다. 이 분야는 국민의 정부가 “전국민의 연금시대를 열겠다”거나 “국민건강을 선진국 수준으로 한 단계 더 높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단행한 개혁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사회주의의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는 의료, 연금, 교육 분야에서 국가 독점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복지 분야의 국가화는 사회주의 아젠다에서 약방의 감초와도 같다.

    사회주의 이론 중 하나인 ‘제3의 길’을 주창하고, 영국 노동당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앤서니 기든스도 복지 분야의 국가화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자유와 시장의 원리를 금지하거나 극도로 제한한다. 자유 대신에 안정과 평등을 중시한다. 자유의 원리는 평등을 해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가격 형성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노후생활과 건강 그리고 교육을 시민 개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길 수 없다고 말한다. 정부가 나서서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다.

    국민의 정부는 종전의 연금보험과 의료보험제도의 국가관리시스템을 자유와 시장의 원리에 따라 민영화하는 대신 오히려 국가관리시스템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이 시민들에게 사회주의적 개혁으로 비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자유와 시장이 유일한 대안

    그러나 이 국가관리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는 제도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국가관리의 복지체제는 과거의 동유럽에서도 그렇고 서구의 많은 나라, 그리고 남미에서도 이미 실험이 끝났다. 국가관리시스템에서는 내가 내 몫을 주장하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 그러니까 적자 누적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정말 아쉬운 점은 복지개혁에서 국민의 정부는 자유주의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평등논리에만 집착한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평등논리나 국가의 온정주의적 논리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칠레나 싱가포르처럼 민영화와 자유화의 길로 가야 한다. 국가관리시스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이 안 된다. 자유와 시장의 원리가 유일한 대안이다.

    모든 시민이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도 밥을 굶는 사람이 많다면 그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일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한 것은 국민의 정부가 이룩한 업적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는 종래의 제도를 너무 확대한 나머지 근로의욕의 상실과 가짜 극빈자의 등장, 납세자의 부담 가중, 그리고 자원낭비 등 비생산적 부작용을 초래했다. 평등을 강조하며 사회주의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기업정책도 사회주의의 특색이 강하게 드러나는 분야일 것이다. 인위적인 대기업 빅딜, 일률적인 부채비율, 대기업집단 지정제도, 집중투표제와 획일적인 사외이사제도의 강제도입 등이 그것이다. 총액출자 제한제도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국가가 공공이익을 위해서 시장에 개입하고 독점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는 경쟁을 촉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주장은 일면 자유주의처럼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는 경쟁의 자유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균등, 대기업 경제력의 규제, 대기업의 정치적 영향력 억제, 소득분배의 형평성 등과 같은 비경제적 목적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결과적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든스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 정부가 개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주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미국의 하버드학파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노선은 1970년대 이후 서유럽 사회주의 정당이 펼친 정책의 핵심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에 따라 국민의 정부가 펼친 정책이 정부 주도의 대기업 빅딜, 출자총액 제한제도, 부채비율의 획일적 적용, 대기업지정제도의 철폐에 대한 반대 등이다. 이러한 정책은 적어도 암묵적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경쟁의 촉진과 퇴출제도를 활성화하는 데 개혁의 초점을 맞추어 시장경제를 확립하는 대신에 대기업의 경제력을 막고 재벌 총수의 전횡을 억제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는 큰 것을 싫어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참여민주주의에서 도출된 사외이사제도와 집중투표제의 획일적이고도 의무적인 도입도 좌파의 정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액주주 대표가 들어와 사회정의와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며 기업경영을 정치화할까 우려되는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하더라도, 일률적으로 그리고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 제도가 좋은지 나쁜지를 사전에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너 경영과 재벌조직이 비효율적이고, 전문화한 독립경영만이 효율적이라고 아무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시장만이 할 수 있다.

    중소업체에 벤처기업 확인서를 발급하고 정책자금을 우선 지원하거나 세금을 감면하는 벤처기업 육성정책도 사회주의의 전형적인 정책이다. 유망한 기업이 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그로 인해 국민경제에 손실이 발생할 우려 때문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어떤 기업이 유망한 기업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시장이 할 일을 정부가 맡을 경우 사이비 벤처기업의 출현, 부실 벤처기업의 양산, 확인서를 주고받는 과정에 각종 비리 등의 부작용만 나타날 뿐이다. 이런 정책은 국민의 세금이 벤처기업 사장, 노동자 그리고 벤처기업 제품을 사는 소비자에게만 단기적으로 유리할 뿐, 장기적으로는 국민경제에 결코 보탬이 되지 않는다.

    ‘광고나 독자를 얻는 데 모든 언론이 같은 기회를 가져야 하며 소수 언론이 독점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한 언론개혁도 하버드학파의 사회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기회의 평등 실현은 고사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위험이 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학파가 바로 하버드학파 아니던가? 김대중 정부는 그런 학파의 이론을 언론시장에 적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강자의 힘을 막는 데 집착한 나머지 시장원리를 제대로 파악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자유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정확하게 찾아주는 일을 한다. 경제 주체의 행동이 옳고 그름을 판정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사회주의는 알지 못한다. 수백만, 수천만 인구가 시시각각으로 판단한 결과를, 극소수의 생각에 따라 바꾸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우리는 좀더 경외감을 갖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은가?

    사회주의적 이념정당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국민의 정부가 도입한 또 하나의 중요한 제도가 노사정위원회다. 이 제도가 신조합주의로 알려진 사회주의 정부의 핵심 메뉴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제도는 1970년대 경제위기에 대응해 유럽의 사회주의 정당 대부분이 도입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주의 정치이념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케인스주의의 거시정책을 측면에서 도와주기 위한 제도였다.

    이것은 특히 두 가지 점에서 자유주의와는 맞지 않는 제도다. 첫째, 그것은 개별 기업이나 개별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집단을 중시한다. 둘째, 그것은 시장을 간섭하기 위한 도구다. 그곳에서 ‘반노동자적’으로 분류되는 정책은 아마 논의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제도와 관련하여 우려하는 점은 이렇다. 원래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제도지만 결과적으로 개별 기업이나 개별 노동자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는 한편으로 어느 정도 노동시장의 유연화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친노동자 정책,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펼친 것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정부여당이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입에 발린 얘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정부를 신자유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직도 한국은 OECD 국가 중에 정리해고가 비교적 어려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힘들다는 것은 단기적으로 노동자에게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노동자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정부는 고용보험을 도입했다. 이로써 국가는 물론 기업의 씀씀이가 늘어났다. 무려 수천억원이 드는 노조전임자 임금지급도 보장돼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것들이 정말로 장기적으로 노동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이다.

    퇴출제도로 도입한 워크아웃과 법정관리도 결국은 실업을 막기 위한 부실기업 연명제도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퇴출제도다. 그러나 그 제도로 인해 단기적으로 실업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고용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김대중 정부는 실업을 막고 부실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거액의 공적 자금을 투입했다. 이것도 사회주의의 유산이다. 공적 자금이 구조조정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하더라도 이런 자금이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는지 믿을 수 없다. 특히 주인 없는 금융회사들이 공짜로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가 사회주의 이념정당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예는 또 있다. 공무원노조의 허용, 주5일 근무제 등을 추진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법정 근무일수를 법으로 정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한번쯤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일이다. 정부의 개혁정책은 사회주의 인성관 (人性觀)을 전제로 하고 있다. 왜 그런지 DJ정부의 개혁논리를 한번 따져보자.

    예를 들면 의사들이 치료가 아닌 약 판매를 통해 부도덕하게 돈벌이를 했기 때문에 약물 오·남용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재벌 총수의 전횡이 부정부패와 방만한 사업을 낳았고, 그 결과로 부실은행이 생겼으며 한국경제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행동을 했더라면 약물 오·남용이나 경제위기도 없었고 사교육비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강제적인 대기업 빅딜, 획일적인 부채비율의 집행, 그리고 사외이사제도와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바로 재벌 총수의 ‘부도덕한’ 행동을 막기 위한 조처였고, 의약분업도 의사의 부도덕한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취해진 개혁이라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부도덕한 사람을 갈아치우거나 부도덕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끔 막는 개혁은 아주 좋은 것이고, 그것은 처음 의도대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고, 개혁에 반대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따라서 개혁은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개혁이 실패할 경우에는, “그 원인은 개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그러니까 개혁을 비판하지 말고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러한 논리를 자세히 관찰하면, 개혁사상이 도덕적 능력에서 완전한 인간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 인성관이다. 이런 인성관을 전제로 하여 개혁을 입안하고 추진한 것이다.

    예를 들면 국가관리시스템의 복지제도는 고도의 도덕적 인간 사이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물론 도덕적으로 존중할 만한 인물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전제하여 개혁을 추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자기 몫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이고, 자기의 이익이라는 인센티브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기업도, 의사도, 소비자도, 관료도, 자유주의자도, 평등주의자도…. 우리는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급급하다. 시민운동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도덕적으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도를 비판할지언정 사람을 도덕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자유사상의 기초다.

    우리는 이런 불완전한 인간을 전제로 사회를 바라봐야 한다. 자기 능력만으로 사업하는 것보다 이윤이 더 생기기 때문에 정경유착을 하는 것이고, 치료보다는 약물을 파는 것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쪽으로 더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제몫 챙기기에 바쁘더라도 ‘예상치 않게’ 우리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제도, 이것이야말로 자유와 경쟁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인물이 저 유명한 애덤 스미스와 하이에크가 아니었던가?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부의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의료보험계획, 국민연금보험계획, 국가교육계획 등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절한 의료보험 수가와 의료보험료, 적절한 약가(藥價)가 얼마인지, 어떤 빅딜이 적절하고 어떤 기업지배구조가 적절한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적절한 언론구조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시장은 정부보다 우수하다

    그들은 의약분업으로, 의료보험 통합으로, 빅딜로 그리고 신문고시로 단칼에 경제적·사회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공적 자금만 투입하면 금융기관의 부실이 해결되고,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고 200%의 부채비율을 지키면 경제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정부의 전문가들은 전지전능하다고 여긴다. 이것이 김대중 정부 개혁정책의 지식관(知識觀)이다. 한마디로 지식에 대해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난센스다. 우리는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현대적인 정신이론에 따른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을 설명할 수도 없고, 우리 자신의 정신작용을 일일이 통제할 수 있는 지식도 없다. 더구나 수많은 정신의 상호작용으로 생겨나는 사회적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전문가도 수많은 정신의 상호작용에서 생겨나는 적절한 기업의 구조, 적절한 가격, 적절한 부채비율, 적절한 수업료, 적절한 의료수가, 적절한 보험료를 계산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를 계산하여 집행한다면 그것은 오류투성이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실패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문가들은 모두 지식에 대해 겸손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자유와 시장의 원리에 의존해야 한다.

    시민을 적절히 인위적으로 통제하여 원하는 교육목표와 복지사회 목표 등을 달성하려는 개혁이 지식의 한계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자유와 경쟁의 원리에 따른 민영화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제라도 정부가 하던 일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 만일 전지전능한 인간이 존재한다면 자유도 자유시장도 불필요할 것이다.

    자유시장은 정말로 묘미가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회정의를 달성하는 가장 좋은 수단은 사회주의가 아니고 자유시장이다. 정부가 하는 것보다는 시장이 훨씬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부의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시장은 거대한 정보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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