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호

어산지가 한국과 중국에 준 크리스마스 선물

  • 허만섭|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10-12-21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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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산지가 한국과 중국에 준 크리스마스 선물

    중국최고지도자인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통치자는 말로 하나의 도시를, 나라를, 문명을 건설한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생기고’와 같이 하나님이 말로써 세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통령이나 기업의 총수가 측근들에게 ‘말’을 하면 그것이 법을, 제도를, 인력과 자본과 지구적 자원을 움직여 현실세계의 구체적인 무엇을 만들어낸다. 이 때 통치자의 말 한 마디는 그저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마는 형체 없는 것이 아니다. 수천, 수백만의 행동이나 거대한 사건과 같은 발화행위(speech act)가 된다.

    중간 관리자는 “저 20조원짜리 프로젝트가 왜 만들어졌나요”라는 질문에 단지 “그건 OO법률의 제정에 의한 예산집행 결과입니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그 법과 예산을 있게 한 통치그룹 내부의 사밀한 대화가 그 프로젝트 탄생의 근원적 원인임에도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은 권력엘리트끼리 공유하는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비교적 민주화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중은 권력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 권력을 차지할 소수집단을 선택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에 공개되는 정보들, 통계, 수치, 절차로는 세상이 돌아가는 진짜 이유를 알아내기 어렵다. 그걸 알기 위해선 통치그룹 내부에서 속마음을 터놓고 오가는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엘리트들은 자신들을 향한 보편적 접근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세상 정보의 대부분은 단지 이들이 공개를 허락하는 내용으로만 주로 채워진다. 진실이란 겨우 잊을 만하면 간헐적으로 새어나올 뿐이다.

    진실의 문을 연 사람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올해의 인물’ 인터넷 투표에서 어산지가 1위에 올랐다. 그는 미국 국무부와 전세계 274개국 주재 미 공관(대사관, 영사관)이 주고받은 비밀 외교문건 25만1287건을 폭로했다. 미국과 세계는 경악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기자는 그를 ‘진실의 문을 연 사람’으로 정의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문건들엔 전세계 각국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는 바로 그 진짜 이유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문건들은 미국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다. 동시에 전세계 정부의 권력엘리트들이 미국 외교관에게 터놓고 이야기해주는 그들 나라의 은밀한 이야기도 들어 있는 것이다.

    직업적 관점에서 어산지가 공개하는 문건의 질과 양은 아마 전세계 1만명의 기자가 10년 이상 취재해야 얻을 수 있는 특종뉴스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미국 정부의 난처한 입장은 ‘실용’의 관점에선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미국 외교관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미국의 유·무형의 국익을 훼손하는 일임이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리’의 관점에선 어떤 심각성이 있는지 모르겠다. 현재로선 어산지의 문건공개가 불법이라는 증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어산지를 “사악한 자”라고 공격한다면 거기에 동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들이 정보를 통제할 땐 세상이 안전해지고 대중에 폭로되면 세상이 위험해진다는 논리는 ‘농담’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사상의 자유시장’과 같은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상황은 밀의 말이 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산지가 폭로했지만 세상이 특별히 더 위험에 빠졌다는 징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외교관들만큼이나 분별력 있게 그 정보들을 즐기고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기자의 생각으로는 어산지는 한국, 북한, 중국 등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겼다고 본다.

    어산지가 운영하는 위키리크스는 12월6일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부는 중국 경제의 ‘파이(pie)’를 나눠 가진 이익 그룹들의 연합체”라는 주중 미대사관의 외교 전문을 공개했다. 이 문건은 중국 권력 내부 인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에 불어올 폭풍

    어산지가 한국과 중국에 준 크리스마스 선물

    위키리스크 설립자 어산지.

    이 중국 인사는 “후진타오 주석의 사위는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을 경영하고 원자바오 총리의 부인은 중국 보석 업계를 틀어쥐고 있다. 공안을 책임지는 저우융캉 정치국 상무위원은 석유를, 혁명 원로 천원의 가족은 은행을, 리펑 전 총리의 가족은 전력회사를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 최고 지도부인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9명)는 기업의 이사회와 비슷해 합의에 의해 서로의 경제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의사결정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 폭로는 세계의 어떠한 언론도 해내지 못하는 일이다. 중국 언론은 용기가 없어서, 한국이나 서구 언론은 정보접근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다.

    이 폭로는 중국인을 비롯한 세계인에게서 절대적 신뢰를 획득하고 있다. 왜냐하면 미국에 맞서 진실을 위해 싸우는 어산지가 보증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 폭로는 실로 충격적이어서 수십 년 만에 동아시아 사람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일이다.

    중국은 그간 언론자유를 억압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를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와 등치시켜왔다. 이것은 중국 공산당 내에선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필적하는 합리적인 국가지도자 선출방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 이렇게 선출된 국가지도자는 윤리적이며 권력을 개인이 아닌 국가와 인민을 위해 사용한다는 믿음에 의해 정당화되어왔다.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 바로 ‘평민 총리’ 원자바오다.

    어산지의 폭로는 원자바오의 낡은 점퍼 주머니 속의 보석들을 들춰냄으로써 그의 ‘청렴 신화’를 허물고 있다. 어산지는 중국식 철인정치에 대한 믿음체계가 하나의 허구에 지나지 않고, 중국의 국가지도자는 더 위선적인 탐욕가이며, 현재의 중국식 일당 체제는 민주주의의 대안일 수 없는 짝퉁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중국 공산당국은 인터넷 접근을 차단함으로써 어산지의 폭로로부터 중국인들을 격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의 특권과 부패만큼 빨리 퍼지는 소문은 없다.

    어산지가 한국과 중국에 준 크리스마스 선물
    1956년 중국에선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펼 수 있다’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지금의 중국인들은 이 말을 잃어버렸다. ‘중국 언론자유의 상징’ 류샤오보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어산지의 폭로와 같은 시기에 진행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어산지의 폭로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실은 사람을 그릇된 미망에서 깨어나게 해준다. 탐욕스러운 정권에 금이 가도록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중국과 나아가 한반도에 불어올 폭풍을 예고하는 미풍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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