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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12>|강릉 선교장 (船橋莊)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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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은 전체적으로 선가(仙家)의 풍류가 배어 있는 집이다. 한국의 지적 전통을 구성하고 있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서 유가(儒家)는 현실적이고, 불가(佛家)는 금욕적이라면, 선가는 낭만적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선가에는 유가의 현실참여적인 면도 있으면서 불가의 초탈적인 면모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선가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부지런히 현실세계에서 노력하다가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 마치면 산으로 들어간다.

원래 대관령의 동쪽인 관동(關東)은 선가의 유풍이 있는 곳이다. 대관령의 높은 산맥이 속세의 풍진(風塵)을 차단해 주면서 동해의 광망(光芒)을 마주하는 별천지가 바로 관동이요 강릉 일대가 아닌가! 가깝게는 설악산이요 조금 더 가면 금강산이다.

그 때문일까. 이곳에는 신라 사선(四仙; 永郞, 述郞, 安祥, 南石行)의 유적지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영랑호(永郞湖)는 사선 가운데 우두머리인 영랑선인의 이름을 딴 것이고, 강릉의 옛 월인사(月印寺) 터는 원래 영랑을 비롯한 사선이 선도를 닦던 곳에다 절을 세운 곳이다.

시루봉에서 시작한 부드러운 용맥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중간에 선교장 터를 만들고 다시 더 흘러 경포 호수를 마주보고 우뚝 멈춘 자리에 옛 월인사 터가 있다. 산진수회(山盡水回; 산이 다하고 물이 감아도는)의 터라서 신선이 공부할 만한 자리다. 경포호수가 메워지기 전에는 이 월인사 터에서 호수를 바라보면 안으로는 호수가 초승달처럼 이 터를 감싸고 있었고, 경포 밖으로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한 동해가 열려 있었다. 만약 경포호수를 메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놔뒀더라면 한중일 삼국 중에서 가장 빼어난 전망을 제공하는 호수가 아니었을까.

강릉에 선가 유적지가 또 하나 있다. 강릉시내에서 정동진 방향으로 7km 정도 가다 보면 안인(安仁)이 나오는데 해령산(海靈山)이 있다. 해령산 용맥이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파도를 맞고 멈춘 자리, 그 파도 치는 해령산 절벽 아래 촛대바위에는 ‘명선문(溟仙門)’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자리는 그 옛날 신선들이 동해를 마주보면서 바둑을 두고 놀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구전해온 해상선(海上仙)의 귀중한 유적지임이 분명하다.



강릉이 배출한 조선시대의 두 인물로는 김시습과 허균이 꼽힌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상의 그물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자유롭게 그리고 파격적으로 살다간 인물이 바로 김시습과 허균이다.

그들 역시 선도와 인연이 깊다. 조선의 선맥(仙脈)을 정리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김시습은 정통으로 도맥을 전수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허균 역시 평소 선가 인물들과 접촉이 많았으며, 당시 전라도 함열에 살던 남궁두(南宮斗)라는 선인의 일대기를 기록한 ‘남궁두전(南宮斗傳)’을 세상에 남겼다. 유교만이 정통이고 불교와 선교는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조선시대에 선가에 대해 깊이 천착한 보기 드문 사례다. 강릉 출신의 두 사람이 이처럼 선가와 인연이 깊은 것은 어렸을 때부터 신선들의 행적을 보고 들으면서 자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선교장의 솟을대문 현판글씨인 ‘선교유거(仙嶠幽居)’.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관동과 강릉일대에 오랜 세월 축적돼 있는 선가적 풍류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포호수가 메워지기 전에는 이 집을 다닐 때 배를 타야 했으므로 이곳 이름을 배다리(船橋)라고 불렀고, 전주이씨 완풍종가인 이 집 이름도 선교장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선교유거의 ‘선교’는 발음이 같은 선교(船橋; 배다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발음은 같으면서도 그 의미는 배다리에서 신선으로 바꾸었다. 재치가 엿보이는 작명이기도 하다.

이 멋진 현판글씨는 누구의 작품인가? 조선 말기 서예가인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의 글씨다. 대원군이 천재라고 부를 정도로 그 자질이 빼어났던 소남은 선교장 전체 분위기를 ‘선교유거’ 한마디에 압축시킨 것 같다.

선교장에 배어 있는 선가적 요소를 추적하다 보니 앞산의 이름도 범상하지 않다. 선교장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투구 모양의 조산 이름을 물어보니 ‘상산(商山)’이라고 한다. 상산은 ‘상산사호(商山四晧)’로 유명한 산 이름 아닌가.

중국 진시황 때 국난을 피하여 섬서성 상산에 들어가 숨은 네 사람(東園公, 綺里秀, 夏黃公, 里先生)이 있다. 이 네 사람의 은사를 ‘상산의 네 신선’이라는 뜻에서 상산사호라고 칭한다. 이들 네 명이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희다는 뜻의 호(皓)자를 쓴 것이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 네 명이 산 속 정자에 앉아서 바둑 두는 동양화를 본 적이 있다면, 그 노인들이 대개 상산사호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선교장 조산의 이름이 상산인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강릉 지역의 뿌리깊은 선가적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선교장 주변은 신라의 사선 유적지와 중국의 사선이 은거했던 유적지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오은거사가 지은 열화당과 활래정

선교장의 역사는 크게 세단계로 나뉜다.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고, 그 손자인 오은(鰲隱) 이후 때에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연못인 활래정(活來亭)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의 증손자인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 때에 23칸의 한일자 행랑채가 증축되었다.

선교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낭만적이라고 찬탄하는 열화당과 활래정은 오은(鰲隱) 때 만들어졌으므로, 선교장의 낭만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은 오은거사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기본 골격은 오은거사가 짜놓았고 거기에 살을 붙이면서 선교장을 확장한 인물은 경농일 것이다.

오은거사는 멋과 풍류를 알았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열화당이라는 작명만 해도 그렇다. 유교 선비들의 사랑채 편액 이름은 대개 유교적인 윤리나 가치관이 담긴 내용으로 정한다. 충(忠)이나 효(孝) 아니면 수신(修身)에 관한 제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열화당’은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단지 ‘즐겁게 이야기하는 집’을 표방하고 있을 뿐이다. 엄숙함과 긴장감 대신에 지극히 인간적인 정감이 전해오는 이름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입신양명과 출세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데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당호(堂號)다. 향외적(向外的) 가치가 아니라 향내적(向內的)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오은거사의 도가적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을 접어두고 향내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고준한 경지다. 수양한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도교학자 앙리 마스페로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의 행복과 구원에 관심을 기울인 개인주의적 종교는 도교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열화당이라는 이름에서 그러한 개인주의적인 취향을 발견한다. 개인주의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은 십중팔구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공감하기 마련이다. 체제와 이념과 조직은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던가! 전후 사정을 고려해볼 때 열화당의 주인이었던 오은거사는 도연명을 흠모했음에 틀림없다.

오은거사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평생에 눈썹 찌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平生不作皺眉事 世間應無切齒人)”는 대목에서도 그러한 기미를 읽을 수 있다.

연못을 파고 거기에다 연꽃을 심으면서 활래정이라는 그림 같은 정자를 만들어놓고 거진출진(居塵出塵; 풍진 세상에 살면서도 진세를 벗어나 있음)을 도모했던 오은거사. 오은(鰲隱)이라는 호도 동해에 떠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바다 밑에서 받치고 있는 신령한 동물인 자라(鰲)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활래정 연못 안의 조그마한 동산은 아마도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상징하는 섬일 것이고, 그 봉래산 밑에는 자라가 떠받치고 있을 터다. 동해에 사는 거인 낚시꾼의 낚싯바늘을 피하기 위해서 봉래산의 자라는 눈에 띄지 않게 숨어야 하리라!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는 집 뒤의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겨울을 음미하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에는 연꽃 속의 활래정에서 여름을 즐기리라.

선교장에서 직접 살아 보았던 이기서 교수는 열화당 출판사가 발행한 ‘강릉 선교장’에서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넘쳐 출렁이고 그 물 위로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안채 뒤 대밭에 죽순이 움트고 매화가 그 짙은 자태를 드러낸다. 못에는 연잎이 솟으며 활래정 뒷산에 오죽순(烏竹筍)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이곳 골짜기는 한겨울의 동면에서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앞 냇가 아지랑이가 움트는 버들가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술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고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은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연꽃 봉오리가 솟고 꽃봉오리가 터지면 누마루에 올라 술자리를 벌인다. 그땐 으레 시서화를 곁들이게 된다. 비오는 날, 연잎에 듣는 빗소리 역시 문객의 시정을 일게 한다. 이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으로 또 역대 주인들의 후덕함으로 선교장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관동의 제일명가(第一名家)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 묵객들이 다녀가면서 시서화를 남겼다. 조선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 ‘선교유거’ 현판글씨의 주인공이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구한말 소론(小論)의 팔천재(八天才)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설 ‘단’의 실제 모델인 우학도인 권태훈 집안과 인연이 깊었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9∼1936), 근대의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소남 이희수로부터 처음 글씨를 배웠으며 전국의 유명사찰 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긴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백련(百蓮) 지운영(池雲永, 1852∼1935), 중국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낸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 등이 그들이다.

독립운동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백범(白凡) 김구(金九)도 자주 출입하였다. 그래서 김구 선생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도 활래정의 단골 손님이었다. 특히 몽양은 선교장과 인연이 깊어서 1908년 선교장 옆 터에 세운 동진학교(東進學校)에서 1년간 영어 교사를 하기도 했다. 동진학교는 이 집안에서 세운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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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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