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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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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성소(聖所), 자전(自傳)의 형식

‘자전소설 1-4’<br>강출판사, 각권 1만2000원

여기 42편의 자전소설이 있다. 소설가 42명의 이른바 ‘자전소설’이 빚어내는 세계란 희귀한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라는 말은 하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세계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 개성만큼 제각각이고 각자가 표방하는 언어와 형식은 다 다르다. 소설이라는 우주를 잘 탐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범주론을 환기해야 하는데 ‘예술’로서의 소설, ‘사상’으로서의 소설, ‘오락(재미)’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기준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자전소설의 범주는 어떻게 될까. 김경욱의 ‘미림아트시네마’에서 한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작가후기…그렇다. 책을 읽을 때 나는, 작가 후기부터 훑어본다. (중략) 나에게 작가 후기, 혹은 작가의 말은 책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후기만 그럴듯하게 쓰는 작가는 없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자신의 인상에 책임져야 한단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에서만 후기를 쓴다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후기는 정직하다. (중략) 말하자면, 내게 보낸 이 글이 그에게는 작가 후기와 같은 것이리라.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는 지금 퍽 난처한 기분이리라. 진실 게임을 할 때처럼 난감한 기분, 시시콜콜 까발릴 수도, 그렇다고 너절하게 둘러댈 수도 없는, 그런 기분 말이다. (중략) 결국 작가 후기만큼의 정직함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고해성사를 하거나 사기를 치는 수밖에. -김경욱, ‘미림아트시네마’, ‘자전소설1 축구도 잘해요’에서

작가들에게 자전소설은 두 가지 형식으로 나타난다. 김경욱의 작품 첫 대목이 보여주듯 작가 후기로서의 정직함, 진실게임의 난감함, 고해성사의 진지함. 또는 슬쩍 딴전 피우듯 둘러대듯이 능청스럽게 사기(소설 본연의 임무)를 치는 일.

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

42편의 자전소설은 대부분 이 두 갈래의 갈림길 앞에서 전자의 길을 선택하고 있고, 몇몇 작품만이 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전자의 길에 들어선 작품들이 전하는 공통의 내용을 함축해서 전하면 ‘나는 어떻게 소설가가 되었는가’에 대한 고백이다. 그들이 소설이라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게 된 어떤 순간, 또는 어느 시점, 또는 어느 시기의 사람, 거리, 가족-집, 매체(영화, 음악), 역사적 사건 등등. 방현석(밥과 국), 김경욱(미림아트시네마), 정이현(삼풍백화점), 김숨(럭키슈퍼), 김중혁(나와 B) 등등.



김송이 / 그 여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 내가 그 여자의 이름을 안 것은 유치장으로 넘어간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특별면회를 다녀오다 그녀의 이름을 보았다. 그녀가 갇힌 방 앞에 걸린 명패에는, 김송이 22 여 집시,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남부지원의 같은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호송차를 함께 타고 왔다. 호송차 안에서 그녀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중략) 전태일 / 산은 변함이 없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겨울로 가고 있는 북한산을 멀리 바라본다. 십일월…십일월이다. 산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산 아래는 온통 아파트 천지로 변했다. 산 아래의 모든 것이 변했는데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중략) 송철순 / 누구에게나 순정한 시간이 있다. / 송철순이 일했던 세광물산은 내가 조직을 담당했던 5공단에 있었다. 나는 인노협의 조직 1부장이었다. 지금도 인천에서 나를 만났던 사람들은 나를 방부장이라고 부른다. 그 이름에 나는 부채감이 아직 남아 있다. -방현석, ‘밥과 국’, ‘자전소설4-20세기의 이력서’에서

그해 봄, 나는 음반 매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음반을 파는 게 나의 정식 업무였지만 매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중략) B를 처음 만난 날, 나는 혼자서 음반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저녁 일곱 시를 넘긴 시간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모두 퇴근을 한 후였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사이키델릭하기로 유명한 어떤 그룹의 신보를 듣고 있었다. (중략) 음반 매장에서 오랫동안 일하진 않았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손님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계산대 쪽을 자주 흘끔거린다거나, 음반 뒷면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다거나,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문다면, 꿍꿍이가 있는 것이다. 그가 그랬다. -김중혁, ‘나와 B’, ‘자전소설1-축구도 잘해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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