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호

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입력2014-02-21 11: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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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길은 비로소 소설이 되었다

    도시와 나<br>성석제 정미경 외 지음, 바람

    소설에 관한, 아니 길에 관한 이런 명제가 있다. ‘여행이 끝나자 비로소 길이 시작되었다.’ 이 명제는 소설을 매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나를 자극해왔다. 길과 여행은 불가분의 관계다. 문맥으로는 전후관계를 형성하지만, 순서를 뒤바꾼다 해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길이 끝나자 비로소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길이 끝나면 여행도 끝이 난다. 그런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길 떠난 이야기가 소설로 진화하기도 하는데, 이때 결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비로소’의 세계다. 여행과 길을 한 편의 소설로 탈바꿈시키는 ‘비로소’라는 문장 부사는 문장 맨 앞에 놓여서 전(前) 역사를 괄호 속에 묶어버리는 ‘그리고’와 동류다. 길과 여행을 대상으로 일반인과 소설가의 차이, 또는 여행기와 소설의 차이는 바로 이 두 부사에 대한 의식과 실현에 있다. 최근 출간된 ‘도시와 나’는 여행이 어떻게 소설이 되는지, 소설가에게 여행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예다.

    나는 모두가 거부하는 주소를 들고 세비야 한복판에 서 있었다. (…) 강렬한 햇빛은 거리의 모든 것을 한 꺼풀씩 벗겨냈고, 내가 들고 있던 진녹색 수첩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속의 활자들도 조금씩 낡아가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택시들이 마치 오늘의 마지막 택시인 듯 내 앞을 스쳐갔고, 마침내 나는 하얗게 바랜 거리 위에 홀로 남았다. -윤고은, ‘콜럼버스의 뼈’

    현대소설은 기본적으로 여행의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한 인물이 현실의 이런저런 사정으로 길을 떠났다가 이런저런 경험 끝에 의식의 전환을 맞아 돌아오는 이야기. 이때 길은 물리적인 공간 이동과 심리적인 내면 흐름을 뜻한다. 물리적인 공간 이동, 곧 주인공이 길을 떠나면서 진행되는 유형을 여로형 소설이라 한다. 주인공이 왜 떠나는지에 대한 분명한 사건이 제시돼야 하고, 길 끝에서는 이전과는 다른, 변화된 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바로 ‘길이 끝나자 여행이 시작되는 시공간’, ‘비로소’가 작동하는 지점이 그것이다.

    여로형 소설



    여로형 소설의 걸작으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꼽는다. 버스든 기차든, 어떤 운송 수단을 이용하든 공간 이동과 함께 과거(회상)와 현재가 뒤섞이며 자연스럽게 서사가 흘러가기 때문에 작가나 독자 모두 안정적으로 공유하는 유형이다. 여로형 소설은 작가로 입문하는 과정에서 시도하는 형식이자 작가로 입지를 굳힌 후에도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벅찰 때마다 휴식처처럼 돌아가 확인하는 원점이다. 해외의 낯선 여행지를 무대로 한 ‘도시와 나’의 소설 중 여로형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은 콜럼버스의 고향 세비야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떠난 한 젊은 여성의 열흘을 그리는 윤고은의 ‘콜럼버스의 뼈’다.

    남자는 내가 내민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 사진 속 남자는 서른 살 무렵의 아버지였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났을 무렵의 아버지이자 곧 나와 이별할 때의 아버지 모습이었고, 내가 가진 유일한 그의 사진이었다. 나는 이 사람의 행방 때문에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을 했다. 그가 이 집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 내가 찾던 주소, 그러니까 내 아버지의 집은 노래 안에 있었다. 나는 그 이국의 언어를, 그러나 아버지에겐 이웃 같았을 노랫말들을 선 굵은 가락 위에서 꼭꼭 씹어 삼켰다. 아버지는 그 밤, 거기에 있었다. 노래 속에 살았다. (…) 노란 식탁보 앞의 조그마한 무대, 그 밤의 따블라오… -윤고은, 위의 작품

    여로형 소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소설이라는 종자는 사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르적인 속성을 가진다. 언제 어디서나 고전적인 여로형 소설이 씌어지는가 하면, 이와 병행해 21세기적인 새로운 형식의 노마드 서사가 창조되고 있기도 하다. 노마드 서사란 관광 수준의 낯선 풍광과 인물을 소설화한 기행 소설 또는 여행 소설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상(공간)을 이동하는 노마드적인 인물의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 일시적으로 어딘가로 떠난 것이 아니라 늘 어딘가로 떠나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비로소’와 ‘그리고’의 세계

    노마드 서사는 작가의 노마드적인 기질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예를 들면 르 클레지오, 배수아, 김연수, 정영문, 김영하, 성석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이나 프랑스에 고정되지 않고 세계를 무대로 한다. 이들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관광 여행자가 아닌 한 도시에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현장을 연구하고 소설을 창작한다. 소설의 공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소설의 영역 또한 자유롭다. 에세이와 명상록, 인류학과 심리학, 언어학과 사회학적인 요소를 두루 아우른다.

    흔히 아프리카를 잊힌 대륙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세아니아, 그곳은 보이지 않는 대륙이다.

    그곳이 보이지 않는 대륙인 것은, 맨 처음 그 지역을 탐험했던 여행자들이 그곳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늘날까지도 그곳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 일종의 통행로이자 어떤 면에서는 부재하는 곳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르 클레지오, ‘라가-보이지 않는 대륙에 다가가기’, 문학동네

    르 클레지오의 소설은 여행의 범주를 뛰어넘어, 전 지구적이고 인류적이다. ‘비로소’와 ‘그리고’의 세계가 미치지 않는 시원의 공간이고 미지의 영역이다. 소설적인 틀을 형성하는 최소한의 장치, 곧 ‘비로소’와 ‘그리고’가 최소한으로 작동하는 장면은 성석제의 ‘사냥꾼의 지도’에서 만날 수 있다.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았어.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어. 그리고 야트막하게 지류에 거쳐 있던 시멘트 다리가 나타났지. 자전거를 탄 내가 골고다의 길로 접어들기 전에 본, 세상사에 초연하게 낚시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여전히 낚시를 하고 있었어. 달라진 건 나는 그동안 무지의 대가를 무서운 모험으로 치러냈다는 것. (…) 관광과 여행, 모험은 뭐가 다를까. 대상의 거죽을 스쳐 지나가는 것과 거죽 속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자신의 거죽을 열고 세포 속의 물질을 대상과 뒤섞는 것의 차이? 결국 여행을 하고 모험을 겪고 나면 그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는 거지. -성석제, ‘사냥꾼의 지도-프로방스의 자전거 여행’

    성석제는 여행을 창작 모티프로 삼은 크로노토프 소설들을 발표한 적이 있다. 크로노토프란 시간(크로노스)과 장소(토포스)의 합성어로, 시간과 공간의 결합 방식 또는 시간과 공간이 사용되는 비율에 의해 발생하는 세계관의 차이를 가리킨다. 낯선 공간, 즉 여행지를 모티프로 한 크로노토프 소설은 이전의 여행 소설 또는 기행 소설과 구별되는데, 이때 관건은 작가가 ‘환상’이나 ‘생태’ 등과 같이 ‘여행’을 하나의 형식 또는 장르로 선택 사용했는지 여부다.

    인간의 마음이 향하는 길

    ‘도시와 나-소설로 만나는 낯선 여행’은 ‘여행 형식’을 취한 테마 소설집이다. 작가라는 족속은 실재든 가상이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는 족속이므로 매 순간 자신이 창조한 인물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마다 취하는 여행에 대한 현실 인식과 의미가 개성적으로 다양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필자의 ‘어떤 여름’의 경우, 열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프랑스의 여러 지방 호텔을 순례하는 여로형의 변형으로, 이 두 남녀가 각각의 관점에서 번갈아 이동 공간을 이끌어가는 형태다. 백영옥의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은 짝사랑하는 남자의 공간에 은밀한 스토커처럼 스며들어 서블릿(세입자가 일시적으로 집을 비우는 동안 단기 렌트하는 것) 형태로 체류한 이야기다. 주로 방에 대한 묘사로 진행되는 이 소설은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서사의 흐름에서 보면 굳이 그곳이 브루클린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서울 홍대 앞이나 파리의 어느 허름한 아파트여도 무방하다.

    집은 가로가 좁고 세로가 긴 레일로드 형태였다. (…) 주인이 오래된 자신의 집을 월세 전용으로 바꾸며 여러 개의 방으로 개조하는 과정에서 기이하게 구조가 일그러진 것 같았다.

    공간은 크게 두 곳으로 분리돼 있었다. 한쪽 방에는 책상과 모니터, 사진을 뽑을 수 있는 대형 프린터가 놓여 있었고, 이케아에서 산 싸구려 조립식 책장 안에는 사진집과 책이 꽂혀 있었다. (…) 방을 서성이다 잠겨 있던 문 하나를 더 열었다. 거실과 침실, 부엌이 함께 있는 방에는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침대와 칼로 깊게 긁힌 자국이 선명한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가 앉았을 의자에 앉아 그가 마주했을 책장을 바라보았다. (…)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나는 그의 집에 와 있었다. -백영옥, ‘애인의 애인에게 들은 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출발점으로 소설의 원형은 길 위의 인간을 대상으로 씌어져왔다. 익명의 도시든 가상의 공간이든, 소설은 인간의 마음이 향하는 길이면 그곳이 어디든, 매번 새로 태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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