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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연구|김중권 민주당 대표

콤플렉스마저 DJ를 닮은 ‘역전의 승부사’

  • 문 철 fullmoon@donga.com

콤플렉스마저 DJ를 닮은 ‘역전의 승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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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표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서울 신당동 ‘달동네’에 자리한 약수교회는 1967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교회다. 3선 의원 때도, 청와대 비서실장 때도, 집권당 대표가 돼서도 그대로 다닌다. 판사 시절인 1978년에는 감리교신학대학원에 입학, 1981년 신학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가 보인 집념이 효과가 좀 있었는지 예산안은 12월26일 밤 국회를 통과했다. 김대표는 얼마 후 기자에게 “사실 당 안팎에서 내가 대표가 된 데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해온 것보다 예산안 처리가 내겐 더욱 큰 고비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예산안도 처리 못하는 한심한 집권당 대표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는 얘기였다.

‘강한 여당론’ 바람은 당 내부로도 불었다. 김대표는 연말 당 사무처를 순방한 뒤 커다란 실망감을 표시했다.

“이런 자세로 정권재창출이 가능하겠는가. 눈이 살아 있어야 한다. 반짝반짝 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일을 주고, 결과를 묻겠다. 본인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대표비서실부터 전부 바꿔야 한다.”

김대표의 발언은 이른바 ‘동태눈깔론’으로 포장돼 당내에 회자됐다. 일부 사무처 요원들은 “우리 눈이 동태눈깔이란 말이냐.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세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제대로 일할 대표가 왔나보다”라는 긍정적 시각도 없지 않았다.



김대표 체제가 어수선한 당내 분위기를 예상보다 빨리 다잡는 데는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김대표 자신도 이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김대통령과 통화했다. 그리고 공개석상에서 ‘대통령이 당무를 위임했음’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자신의 행보에 힘을 실었다. 김대통령이 민주당사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도 김대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예컨대 김대표의 발언은 이런 식이었다.

“예산안과 관련해서 청와대에 보고하니 대통령이 ‘그런 얘기는 나에게 하지 말고 대표 당신이 책임지고 해라’고 말씀했다. 이제 당은 대통령만 쳐다보지 말고,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당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나가는 것이 과거와는 다른 점이다.”

김대표의 힘의 원천(源泉)이 DJ라는데는 별다른 이론이 없다. 아니, 그에 대한 DJ의 신임은 단순한 신임 수준을 넘어 ‘총애’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다.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깊어진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억+α’의 인연. 즉 92년 대선 정국에서 노태우(盧泰愚) 당시 대통령이 김중권 당시 청와대정무수석에게 심부름을 시켜 김대중 당시 민주당대표에게 20억원을 전달하게 한 사건 이후 맺어진 신의다.

김대표는 이를 이렇게 술회했다.

“1992년 11월로 기억합니다. 본관에서 대통령이 찾는 전화가 와 올라갔습니다. 대통령이 ‘여당은 선거자금을 그런대로 꾸려가고 있는 것 같다. 정주영(鄭周永) 국민당후보는 재벌정당이니까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민주당은 정치자금법에 의한 후원금이나 또는 지정기탁금이 없어 어려운 것 같다.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관심표명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군요. 사무실에 내려와 있으니 본관에서 왔다면서 예쁘게 포장한 리본까지 달린 와이셔츠 통을 갖다 주더군요. 그것을 가지고 그날 밤 목동 처제 집에 머무르고 있던 김대통령에게 갔습니다.

몇 번 기회를 보다 말을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면서 ‘이 김대중이가 정표(情表)는 감사해 하더라고 말씀드려라. 받을 수 없다’고 펄쩍 뛰더군요. 어색한 순간이 흘렀습니다. 그것을 다시 들고 나올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 번 간청했습니다. 김대통령은 밖에 있던 비서관을 불렀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것을 풀었지요. 100만원짜리 수표 100개를 묶은 20다발이 통 안에 차곡차곡 들어 있었습니다. 20억원이었습니다. 그 이후 권노갑씨를 만났더니 ‘관심을 베풀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는 말을 하기에 그 돈이 당에 입금된 것을 간접적으로 알았습니다.”

김중권과 DJ는 닮은꼴

그리고 1996년 ‘4·11’총선에서 당시 신한국당 강삼재(姜三載) 사무총장이 ‘20억+α’의혹을 제기했지만, 김대표는 ‘선물상자의 비밀’에 대해 굳게 입을 다물었고 이것이 DJ의 신뢰를 얻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김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내가 DJ에게 20억원을 전달한 장본인이어서가 아니라 국회 법사위원장 시절 한번도 날치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안을 여야 합의 하에 무리없이 처리하는 모습을 인상깊게 본 것 같다”고 말한다. 김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일할 때 DJ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는 게 김대표의 기억이다.

어쨌거나 그는 15대 대선을 불과 40여일 앞둔 시점에서 국민회의에 입당, 처음으로 DJ와 한 배를 타기 시작했다. 당시 국민회의 대통령후보였던 DJ는 1997년 11월11일 “한번 만나고 싶다”며 그를 서울 서교호텔로 불러냈다. 이 자리에서 DJ는 “당에 들어와서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고 김대표는 이를 잡았다. 그리고 김대표는 대선기간 ‘대선자문회의’ 의장을 맡아 조세형(趙世衡) 전총재대행, 이종찬(李鍾贊) 전국정원장, 이해찬(李海瓚) 최고위원 이강래(李康來) 의원 등 당의 최고 선거참모들과 ‘DJ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다. 서울 마포의 ‘홀리데이 인서울’ 호텔에 차려진 그의 비밀사무실은 당시 국민회의의 대선전략에 관한 한 최고의 기구로 그 존재 자체가 대선 뒤에야 알려질 만큼 은밀한 공간이었다.

JK(김대표의 애칭)에 대한 DJ의 총애를 두 사람의 인간적 공통점에서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DJ를 잘 아는 동교동계 인사들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확실히 DJ와 JK는 ‘닮은 꼴’이다. 두 콤플렉스가 두 사람의 친밀감을 높여주고 있다. 하나는 ‘변방 콤플렉스’다. DJ는 전남 신안군 하의도라는 외딴 섬에서 태어났고 JK는 서울에서 차로 가장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경북 울진군에서 태어났다. DJ는 이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목포나 광주 같은 ‘지방도시’를 건너 뛰어 ‘서울정치’를 시도했고 김대표는 TK(대구-경북)의 중심인 대구와 자신을 일체화하려고 애썼다. 특히 JK의 고향인 울진이 한때 강원도에 속해 있었던 점이 그를 TK 중심 지향적인 인물로 만든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비명문교 콤플렉스’다. DJ는 목포상고-건국대학교 출신이며 JK는 울진의 후포고와 고려대 법대를 나왔다. 이런 연유 때문인지 DJ는 학벌은 잘 따지지 않는 대신 가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자수성가형 인물을 아낀다. JK는 고려대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가 고려대 출신을 끔찍이 아끼고 챙기는 사실은 정가에 널리 알려져 있다.”

‘김중권식 정치’가 100%의 DJ의 후광으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국민들 사이에 김대표의 이미지는 아직 대통령 한 분을 받들어 모시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이미지를 별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실제로 그에게는 ‘참모형 인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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