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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괴짜들 17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영웅을 사랑하는 건 행복한 일, 더 많은 이에게 이소룡 알리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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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무문’ 속 진짜 액션의 충격
  • ●“잔은 비어 있어야 쓸모 있다”
  • ● 32년 인생 동안 100년을 산 분
  • ● 바비킴, 황인식, 이준구 사범과의 인연
  • ● 우리나라에 이소룡 기념관과 동상 짓겠다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당신은 이소룡(李小龍·리샤오룽) 팬인가. 그렇다면 안태근(56) EBS PD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슬며시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동류를 발견한 기쁨, ‘나보다 더한 사람이 있군’ 하는 안도감. 웃음의 속뜻은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안 PD 집 거실에는 이소룡 초상화가 놓여 있다. TV 바로 위, 소파에 앉으면 시선이 닿는 곳, ‘일반인’의 집이라면 가족사진이 걸려 있을 그곳에서 이소룡이 당신을 내려다본다. 거실장도 이소룡 차지다. 무술 동작을 형상화한 작은 조각상부터 사진과 책자까지, 3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영웅’을 기리는 물건이 빼곡하다. 옆방으로 들어가보자. 안 PD가 서재로 사용하는 이 공간은 숫제 이소룡 박물관이다. 세계 각국 언어로 출간된 이소룡 평전, 화보집, DVD와 이소룡에 관한 기사 스크랩북이 차곡차곡 정리돼 있다.

안 PD가 이소룡과 더불어 살기 시작한 건 1973년부터. 그해 여름, 한국에 영화 ‘정무문’이 수입됐다. 난생 처음 본 이글거리는 눈빛의 사내는 스크린 안에서 거침없이 뛰어오르고 발길질을 날리더니, 마침내 총알이 쏟아지는 허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영화가 끝났을 때 그는 완전히 얼이 빠져버렸다.

“원래 장철 영화를 좋아했어요. 홍콩 배우 강대위의 열렬한 팬이었죠. 그런데 정무문은 그런 영화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아니, 아예 영화 같지가 않았어요. 맞고 때리고 쓰러뜨리는 장면이 중단 없이 이어지잖아요. 그리고 마지막의 그 비장함이란…. 아, 내가 지금 ‘진짜’를 보고 있구나. 저 사람은 배우가 아니라 무술가구나. 그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다른 관객들도 그랬는지 극장 안엔 정적이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누군가 큰 숨을 내쉬었고, 현실로 돌아온 안 PD는 바로 태권도장으로 달려갔다. 그때 알았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결코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걸.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열여덟 살 소년은 그날부터 이소룡 영화를 보고, 이소룡 책을 읽고, 이소룡 삶의 흔적을 쫓는, 명실상부한 이소룡 마니아가 됐다.

이소룡 세대



‘우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이소룡 신봉자들이었으므로 서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공통된 코드를 갖고 있었다. 한 아이가 괴조음을 지르며 코를 문지르면 다른 아이는 곧바로 일본인 무사의 포즈를 취해주었다. 심지어 쌍절곤을 허리춤에 차고 등교를 하는 녀석도 있었다. 그 서투른 쌍절곤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니 이소룡이 되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1963년생 유하 감독이 펴낸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의 한 부분이다. 유 감독보다 여덟 살 많은 안 PD의 학창시절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돌아보면 197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 중 이소룡에 미치지 않았던 이가 얼마나 될까.

이소룡은 1973년 세상을 떠났다. 서른두 해 사는 동안 고작 다섯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단단한 복근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몸놀림, 그리고 특유의 포효 소리는 그의 사후에도 수많은 추종자를 낳았다.

“한국에 ‘정무문’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이소룡이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그래도 우리는 모두 이소룡 팬이 됐습니다. ‘정무문’ 상영 뒤 태권도장에 사람이 얼마나 몰렸는지, 관장이 강습료를 세 배나 올립디다. 18기 도장은 이미 정원이 차고 넘쳐서 아예 갈 엄두도 못 낼 정도였지요. 제 친구 중 한 놈은 이소룡한테 영혼을 다 빼앗겨서 허구한날 웃통 벗어젖히고 절권도 흉내만 내고 다녔어요.”

유하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주인공 현수(권상우)는 이소룡이 쓴 ‘절권도의 길’을 탐독하고, 쌍절곤을 돌리며 괴조음(怪鳥音)을 토해낸다. 안 PD와 친구들 모습이 바로 그랬다. 안 PD는 그 무렵의 열광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소룡 전도사’ 안태근 한국이소룡기념사업회장
“이소룡 영화가 나올 때마다 극장 앞에 가면 서울시내 모든 학교 교복을 다 볼 수 있었어요. 저는 ‘정무문’ 다음 영화부터는 늘 첫날 첫 회에 혼자 갔지요.”

영화에 진지하게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극장은 늘 콘서트장처럼 떠들썩했다. 특히 1973년 10월28일 스카라 극장에서 ‘당산대형’을 볼 때는, 이소룡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이 괴성을 질러대는 탓에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오빠부대’랑 견줘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개봉 첫날 첫 회가 그 정도였으니, 이소룡이 우리나라에서 순식간에 얼마나 인기를 모았는지 알 만하죠. 관객 중에 화교도 꽤 많았던 기억이 나요. 당시 화교들은 우리나라에서 대접을 잘 못 받았거든요. 이소룡 같은 불세출의 스타가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1974년 새해 첫날 본 ‘용쟁호투’는 차원이 다른 액션 때문에 기억이 난다. 온갖 종류의 무예를 익힌 무술의 달인들이 섬 하나에 모여 무규칙 이종 격투 대회를 벌인다는 설정부터 당시로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이소룡이 절권도의 힘으로 실력자들을 꺾을 때마다 극장 안에서는 얼마나 환호성이 터졌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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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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