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불황한국 먹여살리는 조선산업의 경쟁력

  •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5-04-12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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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造船) 한국’의 성가가 드높다.
    • 1999년부터 3년째 세계 조선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50년 가까이 세계정상을 지켜온 ‘조선 왕국’ 일본도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한국 조선업 돌풍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소 동편에 있는 야트막한 야산 위엔 아담한 영빈관이 한 채 서 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영빈관으로 오르는 도로 아래쪽에는 ‘잔디공원’이라 불리는 널찍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다. 녹빛이 눈부신데다 조선소와 울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여 현대 직원 가족들이 백일장이나 사생대회를 열곤 하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잔디공원과 야산 한쪽 면이 통째로 깎여나가고, 그 자리에선 선박 블록 조립작업이 한창이다. 3년째 선박 수주(受注)가 크게 늘면서 작업공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게 되자 생각다 못해 짜낸 아이디어였다. 더 이상 바다를 매립하는 데도 한계가 있고 북쪽 야산은 그린벨트로 묶여 있기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잔디공원과 인접한 제3도크는 길이가 640m나 되고 선박을 100만t까지 동시에 건조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완성된 배를 진수하기가 무섭게 다른 배를 끌어다 놓고 작업을 서둘러야 할 만큼 일감이 밀려 있어 산을 깎아내지 않고는 자재를 쌓아둘 곳이 없었다고 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80척, 51억 달러어치의 선박을 수주해 세계 시장의 13%를 점유했고, 59척, 420만GT(총톤수)의 선박을 건조해 인도, 세계 전체 건조량의 15%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굳혔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손해를 봐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151억 원에 그쳤지만 영업이익은 7569억 원이나 됐다. 지난해 말 현재 수주잔량은 140여 척, 1000만GT. 넉넉잡아 2년6개월치 일감을 쌓아두고 있다는 얘기다. 울산 조선소에는 1000명 이상을 수용하는 구내식당이 39개나 있다. 조선, 해양사업, 선박엔진 등에 종사하는 2만7000여 명의 직원들이 어느 현장에 있든 최단 거리의 식당에서 신속하게 식사를 마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다른 업체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대우조선은 올해 들어서만 4월말 현재 31척, 26억 달러어치의 선박을 수주해 올해 수주목표인 25억 달러를 이미 넘어섰다. 조만간 계약이 이뤄질 것이 확실시되는 옵션까지 포함하면 올해 총 수주액은 37억 달러에 이를 전망. 수주잔량도 75억 달러어치에 달해 2003년까지 건조일정이 꽉 차 있다. 대우는 특히 올 들어 전세계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발주량 34척중 3분의 1인 11척을 가져갔다.



    대우조선 박종기 홍보실장은 “선박 수리를 전담하던 작업장에서도 새 배를 만들어야 할 만큼 물량이 넘친다”며 “한 해 15만여 명의 내방객이 거제 조선소를 둘러보러 오는데, 이들을 안내할 인력이 모자라 직원 부인들에게 에스코트를 맡기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한다.

    2년 연속 세계 1위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대우조선은 지난 1분기에만 1079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올해 안에 대우 계열사 최초로 워크아웃을 졸업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지난해 36억 달러어치를 수주한 삼성중공업은 올해 수주목표를 지난해보다 오히려 22% 줄어든 28억 달러로 낮춰잡았다. 현재 설계중이거나 건조중인 선박이 120척이나 되기 때문에 앞으로는 수익성이 높은 선박 위주로 선별해서 수주하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

    97년 부도를 내 99년부터 현대중공업이 위탁경영하고 있는 삼호중공업도 올해 매출액이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1조1000억 원, 순이익은 7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이 회사는 부도 이후 6800여 명의 직원을 1800여 명으로까지 줄였으나 일감이 급증하자 1500여 명의 퇴직 근로자를 복귀시키는 등 직원수가 5700여 명으로 회복됐다.

    한국 조선업계는 지난해 세계 선박 주문량의 45%(2079만GT)를 휩쓸며 사상 최대의 수주실적을 올렸다. 지난해 말 현재 수주잔량은 3000만GT를 넘어 앞으로 3년 정도는 주문을 더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일거리가 쌓여 있다.

    이로써 한국은 99년 40.9%(1184만GT)의 시장점유율을 기록, 1950년대 이후 50년 가까이 세계 조선업계 1위를 지켜온 일본을 누른 데 이어 2년째 세계 정상을 고수하면서 일본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 현대 대우 삼성 등 이른바 ‘빅3’의 수주량만도 세계 시장의 30%에 육박, 일본의 시장점유율(29.2%)과 맞먹는다. 한국은 93년에 사상 처음 수주량에서 일본을 앞선 바 있지만, 이는 당시 엔화가치가 급등하면서 일본 선박의 자재비가 우리보다 25% 이상 상승, 일시적으로 경쟁력 우위에 섰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듬해 큰 폭으로 한국을 추월하며 정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의 재역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조선업계의 전망이다. 우리 업체들이 가격경쟁력은 물론, 기술력과 생산효율, 영업과 관리능력 등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앞서거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일본 조선업계도 이번에는 ‘한국 돌풍’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지난 1월 일본의 조선 전문지 ‘Compass’가 조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내용을 보면 “한국과의 기술격차는 없어졌다” “한국은 대량 건조를 통해 기술, 품질 등 비(非)가격경쟁력이 향상됐다”는 등의 의견들이 눈에 띈다. 또한 ‘해사프레스’지 최근호는 일본의 대형 조선사 선박사업본부장들을 인터뷰했는데, 이 자리에서 일본 업계 1위인 미쓰비시중공업 본부장은 “10년후 중국이 부각되고 과잉설비가 문제될 가능성이 있으나, 건조량에서는 당분간 한국의 독무대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NKK 본부장도 “한국은 기술력과 생산성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 우리로선 착실히 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초조한 심사를 드러냈다.

    대부분의 제조업종이 불황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조선산업이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은 이미 80년대 후반부터 세계 조선시장에서 20%대의 점유율을 유지했는데, 많은 이들은 그 주요인을 저임금에 바탕한 가격경쟁력에서 찾는다.

    ‘규모의 경제’ 실현

    배를 건조하는 공정은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대형 구조물을 많이 만들어야 하므로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충분한 규모의 기능인력을 활용해야 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이다. 이 때문에 조선 선진국인 일본이나 유럽보다 임금수준이 낮은 한국이 가격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 80년대 중반까지 한국 조선업계의 임금수준은 일본의 20%에 불과했다. 87년부터 한국의 임금이 매년 20% 가까이 인상됐고 90∼95년에는 연평균 10%의 증가율을 보인 데 비해 일본은 2.6%의 증가율에 그쳤지만, 그간 원화는 평가절하됐고 엔화는 평가절상됐기 때문에 95년에도 한국 업계의 임금은 일본의 46.6%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이 가격경쟁력에서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저임금 덕분이라기보다는 대형 설비와 인력 확보에 따른 규모의 경제, 뛰어난 설계능력, 기술과 생산성 향상 등에 힘입어 꾸준히 비용을 절감, 원가를 낮춰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임금수준은 수주 증가로 인력수요가 늘면서 계속 높아지고 있지만, 업황이 사양길에 접어든 일본 업계의 임금은 하향세에 있다는 것. 국내 대형 조선사의 현장 근로자 평균 연봉은 4000만 원에 육박, 제조업종 가운데 가장 높은 축에 든다.

    또한 요즘에는 부가가치가 높은 선박의 건조가 늘고 배에 설치되는 기자재가 고급화된 데다, 조선사들이 비용절감을 위해 아웃소싱을 늘리고 있어 임금은 올랐어도 선박제조 원가중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저임 노동력으로 경쟁력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조선산업은 선대(船臺), 도크, 크레인 등 대형 설비를 갖춰야 하므로 막대한 설비자금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장기간의 선박 건조에 소요되는 운영자금도 뒷받침돼야 한다. 따라서 자금력이 풍부한 소수 대기업을 중심으로 시장구조가 형성되게 마련이다. 우리 정부는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노동집약적이고 관련산업 파급효과가 큰 조선공업을 중점 지원하기로 했는데, 이에 힘입어 73년 현대중공업이 울산에 단일 조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를 완공했다. 당시 세계의 선박 수요가 대형화 추세였기 때문에 대우와 삼성 등도 속속 현대화된 대형 설비를 갖추고 조선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조선업이 불황에 빠져들자 정부는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로 설비 증설에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70년대에 대량 생산된 노후 탱커(유조선, 화학제품 운반선 등)들이 80년대 말부터 새 선박으로 대거 대체되면서 조선 경기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93년 조선산업 합리화조치를 철폐했다. 조선사들은 다시 경쟁적으로 설비 확충에 나섰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이 9개 도크에서 연 60척, 대우와 삼성이 각각 연 40척의 대형 선박 건조능력을 갖춰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로 대형화됐다.

    조선사들은 이렇게 증설한 대형 설비를 풀 가동하기 위해 공격적인 수주전략을 폈고, 이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 생산성을 높이면서 선가를 떨어뜨렸다. 우리나라에서는 ‘빅3’를 포함한 9개 대형 조선업체가 업계 전체 건조물량의 95% 이상을 담당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 2500GT 이상의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7개 대형 업체가 소화하는 건조물량이 53%에 불과하다. 중·소형 업체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조선소 규모가 크다 보니 설비의 집적효과도 크다. 예를 들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의 선박건조 가능량(capacity)은 현대중공업보다 다소 많지만, 미쓰비시는 설비와 인력이 3개 조선소로 분산돼 있는 데 비해 현대는 처음부터 대형 조선소 한 곳에서 30년 가까이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설비와 인력이 고도로 집적화, 현대화돼 있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10여 년전부터 90년대 말경 조선산업이 침체기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 설비와 인력의 감축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일본 유수의 중공업회사들은 조선업 비중을 지속적으로 축소해 설비의 노후화, 인력의 노령화를 초래했다. 그 결과 일본은 요즘처럼 물량이 급증하자 이를 소화할 역량이 모자라 한국에 선두를 내주고 말았다. 또한 우리나라에선 9개 대학에 설치된 조선공학과에서 매년 약 1000명의 인력을 배출하고 있으나, 조선업이 사양산업으로 인식되는 일본에서는 조선공학과가 설치된 대학이 3개에서 2개로 줄었다.

    조선업계는 거듭된 환율상승 덕도 톡톡히 봤다. 조선업은 환율에 극히 민감하다. 조선사가 소재와 부품을 구매할 때는 65% 정도를 원화로, 나머지 25%를 달러화로 결제하지만, 매출로 잡히는 배값은 선주로부터 달러화로 받기 때문이다. 원화를 쓰고 달러화를 벌어들이니 환율이 오르면, 다시 말해 원화가치가 떨어지면 지출은 줄고 수입은 늘게 된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환율이 1달러 당 50원만 올라도 한 해 경상이익이 무려 1200억여 원이나 증가한다. 외환위기 이후 원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지자 조선업체들은 떼돈을 챙겼다.

    선주는 배를 주문한 후 수주시점부터 인도시점까지 4∼5단계에 걸쳐 배값을 분할 지불한다. 단계별 분할조건은 계약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사가 수주단계에서 선수금을 많이 받기로 계약하면 금융비용을 고려해 배값이 싸지고, 인도단계에 가까울수록 돈을 많이 받으면 배값이 비싸진다. 배를 주문받은 때부터 인도할 때까지 걸리는 기간은 2년6개월 정도이므로 금리를 연 8%로 잡으면 어느 단계에서 돈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선가가 20%까지 차이가 난다.

    이렇다 보니 조선업은 금융장사 성격이 강하다. 자금이 달리거나 설비 증설이 시급한 조선사는 선수금을 많이 받는 대신 배값을 깎아준다. 배는 2년6개월 뒤에 넘기지만 많게는 배값의 40% 정도를 계약후 1년 안에 받아내 회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조선사는 선수금의 유혹 때문에 덤핑 수주를 감수하기도 한다. 이 경우 나중에 환율이 올라 달러가치가 올라가면 손해를 보게 된다. ‘싼 달러’를 많이 받아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업에선 환율예측이 경기예측 못지 않게 중요하다.

    다행히 국내 조선사들은 대개 인도시점에 가까울수록 돈을 많이 받는 조건(꼬리 쪽이 무거운 계약이라고 해서 ‘heavy tail’이라 한다)으로 계약을 했다. 2∼3년전까지만 해도 설비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선수금을 적게 받고라도 물량 확보에 급급했기 때문. 이미 설비 확충을 끝냈기 때문에 자금수요가 크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 환율이 오르자 조선사들은 가만히 앉아서 ‘비싼 달러’를 챙겼다. 대우조선 관계자는 “워크아웃 초기에는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못됐다. 일단 수주실적을 올려놓고 보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헤비 테일’ 계약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그 계약서들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재 공급망 탄탄

    선박은 쇠로 만든 뼈대(프레임)에 철판을 잘라 붙여 껍데기(船殼)를 만들고 그 안에 엔진을 집어넣은 뒤 그 추진력으로 프로펠러를 돌려 움직이는 장치다. 웬만한 배 한 대를 만드는 데는 수만 장의 철판이 필요하다. 그래서 선박 자재비 가운데 강재(鋼材) 값이 30%를 차지한다. 때문에 철강업계가 위축돼 강재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거나 값이 뛰면 배값을 미리 정해놓고 배를 만드는 조선사들은 자재비 상승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한국 조선업계는 이 대목에서도 커다란 메리트를 갖고 있다. 포항제철이라는 세계 유수의 철강회사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품질좋은 선박용 강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포항에서 생산된 강재를 ‘엎어지면 코 닿을’ 울산과 거제로 가져오므로 물류비용도 절감된다.

    선박 자재비의 20%를 차지하는 엔진 부문에서도 여건이 좋다. 세계 1, 2위의 생산능력을 가진 엔진 메이커가 조선사들을 받쳐주고 있어 적기 공급이 가능한 것. 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본부는 연 620만 마력의 엔진을 생산할 수 있는 선박 메인엔진 세계시장 점유율(35%) 1위 업체. 이 회사가 지난해 여름 제작한 세계 최대의 9만3120마력 선박용 엔진은 무게가 2095t에 이르고 높이가 15m, 길이가 26m로 4층짜리 건물과 맞먹는 크기다. 이 엔진에 장착되는 프로펠러도 무게 100t, 직경 9m로 세계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지난해 한국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엔진사업부문을 통합하고 대우중공업의 지분 참여로 설립된 (주)HSD엔진은 연 생산능력 410만 마력의 세계 2위 업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반 상선의 기자재 국산화율은 90%에 가깝다고 한다. 강재 엔진 프로펠러 샤프트 배관 전선 도료 등 대부분의 주요 기자재가 국산화됐으며, 다만 24시간 구동되는 펌프, 레이더 장치같은 내구성 장비는 선주들이 신뢰도가 높은 특정 외국회사 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에 수입해 쓰고 있다는 것. 이런 내구성 장비는 국내 기계·소재산업의 기반이 약해 국산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중공업 조선사업본부 한대윤 전무는 “한국에서 조선업만큼 기술자립도가 높은 업종은 없다. 설계, 시험, 생산 등 전 과정이 자체적으로 이뤄지므로 실질적인 국산화율은 100%로 봐야 한다. 일부 수입 기자재는 못 만들어서가 아니라 가격경쟁력 때문에 일부러 국산화하지 않는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현대중공업 정재헌 문화부장은 “기자재 국산화가 조기에 완료되지 않았다면 환율상승으로 기자재값이 2.5배나 폭등했던 외환위기 때 한국 조선산업은 막을 내렸을 것”이라며 “이는 그간 조선사들이 기자재 협력업체들에 대한 기술지도와 품질관리에 공을 들여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현대는 한때 수입 기자재보다 30%나 비싼 값에 국내 협력업체 제품을 사다 쓰면서 기술개발을 독려했다고 한다.

    기성복 값에 맞춤복을

    기성복 가격에 테일러 메이드 양복을 사 입을 수 있다면 귀가 솔깃할 것이다. 우리 업계의 선박설계 능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 조선사들은 선주의 요구를 세심하게 반영하는 유연한 설계능력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것은 ‘헝그리 정신’에서 비롯됐다.

    일본은 40년 넘게 세계 조선시장을 장악하다 보니 우월적 지위에 자만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대량의 선박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팔기 위해 선종별로 선박을 표준화한 다음 정형화된 설계도면에 따라 일관라인에서 자동차를 생산해내듯 배를 만들었다. 고객인 선주들로서는 이런저런 옵션을 설계에 반영하고 싶었겠지만, 아쉬울 게 없는 일본 조선사들은 ‘FM대로’만 고집했다. 그 결과 일본은 일반 상선의 설계능력과 설계인력의 질이 제자리걸음을 하며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고, 요즘은 아직 경쟁력이 있는 몇몇 선종을 전문화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찾으려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초기엔 설계능력이 모자라 일본의 표준선형 설계를 따랐지만, 점차 경험이 쌓이면서 선주들의 다양한 요구를 설계에 탄력적으로 반영했다. 일본으로 갈 물량을 하나라도 더 가져오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대우조선 선박해양기술연구소 한용섭 소장은 “가령 VLCC(대형 유조선)가 표준설계로는 15노트의 속력을 내도록 돼 있는데 선주가 ‘○○해역에서는 15.5노트가 나오도록 해달라’든가 ‘배의 의장을 이러저러하게 바꿔달라’고 요구하면 선가를 많이 올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가능케 하는 설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짜내야 했다”고 말한다.

    이런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설계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80년대 후반부터 업체들은 설계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했고, 이들은 선주들이 원하는 사양을 충족시키고 불편함을 해결해주면서 다양한 현장경험을 축적해 탄탄한 설계역량을 갖게 됐다.

    현재 현대중공업은 1200여 명, 대우조선은 900여 명, 삼성중공업은 700여 명의 설계인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이 지금껏 만들어낸 수천 종의 설계도면은 회사마다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돼 있어 새 선박을 설계할 때는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설계 변형을 시도한 뒤 최적의 성능이 산출되면 최종 설계에 들어간다.

    삼성중공업 이형용 설계운영부장은 “일본이 이처럼 유연한 설계를 하지 못하는 것은 기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수주단계에서부터 영업팀과 설계팀이 긴밀하게 협의한다. 설계를 모르는 영업, 영업을 모르는 설계로는 ‘기본’과 ‘변형’을 고루 취하는 설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업인력과 설계인력, 기술인력이 한 팀에서 설계단계까지 함께 가므로 서로의 특성과 고충을 이해하면서 선주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설계인력을 포함, 국내 조선소 현장인력의 평균연령이 일본보다 10년 가까이 낮다는 것도 강점이다. 80년대 후반, 그리고 조선산업 합리화조치가 해제되던 93년 이후에 인력을 대폭 확충했기 때문에 그 무렵 고교와 대학을 졸업한 35∼40세 안팎의 근로자들이 지금 현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젊지만 8∼15년의 경험을 쌓아 기술적으로 한창 성숙기에 다다라 있다. 하지만 ‘젊은 피’를 제때 수혈하지 못한 일본 근로자들은 대개 45∼50세로, 경험은 많지만 능률은 우리 인력보다 낮다는 평가다.

    엄청난 크기의 선박을 조선소의 제한된 부지 안에서 많이, 그리고 빨리 만들어내려면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생산효율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국내 조선사들은 독보적인 역량을 보여준다.

    배를 만드는 첫 공정은 강재 절단(steel cutting)이다. 철판을 도면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잘라 소조립 공장에서 하나하나 이어 붙이고, 이를 대조립 공장으로 보내 더 큰 철구조물로 만드는데, 여기에서 높이가 16m까지 되는 블록으로 만들어진다. 배 한 척은 대개 300개 안팎의 형태로 잘라 블록(1개당 40t 정도) 단위로 만든다. 완성된 블록들은 바다와 인접한 도크에서 용접해 탑재, 선박 모양을 갖춰가는데, 배가 완성되면 도크 문을 열어 진수시킨다.

    과거에는 도크에서 대부분의 조립공정이 이뤄졌기 때문에 배가 도크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공간이 한정된 도크에 배가 오래 머무르면 생산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최단 시간내에 도크 작업을 마치고 배를 진수시킨 후 다음 선박의 블록을 도크 안으로 가져와 작업해야 정체현상을 막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도크의 회전율을 높이는 게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도크 탑재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크 근처의 옥외 조립장(yard)에서 완제품 블록을 다시 2∼3개씩 결합한다. 도크에서는 크레인으로 마치 레고 조립하듯 이것을 갖다 얹은 뒤 용접한다. 이렇게 야드 작업 비중을 늘린 결과 도크 작업시간이 절반 정도로 줄어 회전율이 높아졌다.

    도크의 공간활용을 극대화해 한 개의 도크에서 유조선, 컨테이너선, 살물선 등 선종이 전혀 다른 배들을 동시에 건조하는 것도 이채롭다. 예컨대 대우조선의 제1도크는 길이가 530m, 폭이 131m인데, 여기에 길이 333m, 폭 58m 크기의 VLCC 두 대를 넣으면 도크의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다. 그런 다음 나머지 3분의 1 공간에다 길이 200m가 못되는 살물선이나 유조선을 집어넣어 공간이 낭비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 도크에서는 많게는 7척의 선박을 동시에 건조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한 도크에서 다양한 종류의 선박을 동시 건조하는 것을 ‘프로덕트 믹스(Product-mix)’라고 하는데, 한국 조선소들은 프로덕트 믹스의 표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조선소들이 대개 도크별로 선종을 전문화해 생산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프로덕트 믹스는 그저 도크를 빈 공간없이 채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배의 종류와 크기는 달라도 진수는 같은 날에 하기 때문에 도크 작업 전단계에서부터 일감과 인력, 작업시간, 공정 등을 정교하게 할당하고 배치해야 한다. 뛰어난 생산관리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요즘 조선소에서는 ‘배를 만든다’고 하지 않고 ‘배를 모은다’고 한다. 여러 곳에 분산돼 있는 인력과 부품, 기술, 생산공정, 영업과 관리능력을 체계적으로 한 데 모아 낮은 비용으로 높은 성과를 이끌어냄으로써 생산혁신을 기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닷새에 한 척씩 건조

    대우조선은 프로덕트 믹스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일본 도요타 자동차의 독특한 생산공정인 ‘JIT(Just-In-Time)’를 벤치마킹했다. ‘간판(看板)방식’이라고도 하는 JIT는 각 부품별로 한 종류의 간판을 만들고 여기에 후(後)공정이 전(前)공정에 주문하는 물품의 번호와 수량 등을 기입하면 전공정은 이에 따라 후공정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만큼 생산하는 방식. 이것을 모든 공정에 적용함으로써 전 생산공정이 물 흐르듯 이어지도록 한 것이다. 후공정이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면 전공정은 줄어든 만큼만 보충한다.

    대우조선 생산혁신팀 김수호 부장은 “이 방식을 도입하기 전에는 전공정이 후공정의 생산성이나 위험성, 품질 등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부서 실적을 채우는 데만 급급해 생산효율이 낮았다”고 말한다.

    “가령 철판가공 공정에서 마무리 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다음 부서로 넘기면 규격이 맞지 않아 블록을 연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앞 공정이 해야 할 철판가공을 블록연결 공정에서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이런 식으로 불량 자재가 계속 넘어오면 일은 일대로 안되고 작업장에는 자재만 가득 쌓이게 된다. 또한 뒷 공정에서 필요한 양과 무관하게 앞 공정이 자재를 만들어 쌓아놓으면 작업공간이 줄어들 뿐 아니라 정작 뒷 공정에서 자재가 필요할 때는 중장비를 동원해 자재더미 아래에 깔려 있는 해당 자재를 꺼내 써야 했다. 불필요하게 야적해둔 자재들은 녹이 슬고 훼손돼 안전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자동차 부품의 몇십 배 크기인 선박 부품들이 이런 식으로 방치된다면 그 폐해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 대우조선은 96년부터 도요타에 직원들을 파견해 조선소에 적용할 JIT 공정을 연구하게 했다. 그 결과 대우는 부서 단위의 생산성과 공정 전체의 생산성을 조화시켜 자재는 후공정에서 소화할 만큼만 전공정에서 내보내게 했다. 그 전에는 3∼4일 작업에 소요되는 자재를 현장에 무분별하게 쌓아뒀지만 요즘은 4시간에서 길어야 하루에 사용할 만큼만 갖다 놓음으로써 공정의 완성도를 높이고 작업공간도 넓혔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각 조선사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프로덕트 믹스를 구현했다. 이것이 생산성 향상과 직결된 것은 물론이다. 같은 크기의 VLCC를 건조하는 데 한국 조선소에서는 40만 공수(工數, manhour·1인당 1시간의 노동력)가 소요되지만, 중국 조선소에서는 150만 공수가 필요하다.

    국내 조선사들이 만드는 30만t급 VLCC 1척에는 작게는 손바닥만한 것에서부터 크게는 4.5m×2.2m짜리 선각 원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철판 10만여 장과 평균 2.3m 길이의 파이프 1만3000개(총연장 30km), 총연장 90km의 전선이 들어간다. 이런 배가 강재 절단에 들어간지 8.3개월 만에 건조를 마치고 선주에게 인도된다.

    지난해 현대중공업은 40주(1년 52주 중 휴일과 휴가를 뺀 순수 근로시간) 동안 59척의 선박을 건조했으니 4.7일에 1척꼴로 배를 만든 셈인데, 국내외 도처에서 만들어져 보내온 수만 종의 부품을 닷새 만에 정확하게 가공하고 조립해 한 척의 배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웬만한 생산성으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저가선에서 고가선으로

    국내 조선사들이 주로 생산해온 대표적인 선종으로는 살물선 유조선 컨테이너선 LNG선 여객선 등이 있다. 살물선은 화물을 포장하지 않은 상태로 실어 나르기 때문에 이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의 선박으로 배값이 싸다. 원유나 컨테이너, LNG 같은 특수 화물을 실어 나르려면 특수한 선체구조와 장비를 갖춰야 하므로 선가가 비싸진다. 사람을 안락하게 실어 날라야 하는 여객선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LWT 기준으로 선가를 뽑아보면 살물선이 t당 1400달러, 유조선이 1900달러, 컨테이너선이 2400달러, LPG선이 6200달러, 여객선(페리)이 1만 달러쯤 된다.

    국내 조선사들은 기술력이 부족했던 초기에는 살물선이나 중·소형 유조선 및 컨테이너처럼 부가가치가 낮아 일본이나 유럽 조선사들이 건조하기 꺼려하는 선종을 주로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대형 유조선과 컨테이너선, LPG선, 페리급 여객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을 잇따라 건조하고 있으며, 심해 유전개발선 등의 특수선 분야에서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운항중인 컨테이너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노르웨이 해운사가 발주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건조한 6400TEU급(20피트짜리 컨테이너 6400개를 실을 수 있는 규모). 하지만 삼성중공업이 홍콩으로부터 주문받은 7400TEU급 컨테이너선을 건조중이고, 현대중공업도 독일에서 수주한 7200TEU급 컨테이너선을 건조하고 있어 이 부문 기록은 곧 깨질 전망이다.

    조선사를 모기업으로 둔 일본 해운사들이 한국에 컨테이너선을 주문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99년에는 일본 가와사키중공업이 지배주주로 있는 가와사키기센이 현대중공업에 5척의 대형 컨테이너선을 발주했고, 지난해에는 미쓰비시 계열이자 일본 최대 해운업체인 닛폰유센이 삼성중공업에 대형 컨테이너선 5척을 주문한 것.

    삼성중공업은 중국 해운사와 9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수주계약도 추진중이다. 이만한 규모의 컨테이너선에는 9만6000 마력 이상의 엔진을 탑재해야 하는데, 이런 대형 엔진으로 1개의 프로펠러를 구동시켜 배를 움직이면서 진동과 소음을 최소화하는 게 핵심기술이다. 또한 엔진이 아무리 커도 프로펠러는 무게 100t, 직경 10m 이내라야 한다. 현재로선 이보다 더 큰 프로펠러를 주조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항공모함은 엔진이 30만 마력이나 되지만 프로펠러가 3개나 되는 데다, 디젤엔진을 쓰는 일반 선박과는 달리 원자력 터빈을 엔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다. 컨테이너선도 엔진과 프로펠러를 2개씩 탑재해 쌍축형으로 만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이렇게 하면 선가가 비싸져 선주의 부담이 커지므로 고려대상이 못된다.

    삼성중공업 이형용 설계운영부장은 “배는 ‘연습’으로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실제 선박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개념설계를 이미 끝냈다”며 “이처럼 한계에 도전,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 기술”이라고 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 3월 국내 최초로 3만t급 여객선을 건조해 선주인 그리스 미노안사(社)에 인도했다. 길이 212m, 폭 25m, 높이 30m의 이 여객선은 1000여 명의 승객과 400여 대의 자동차를 싣고 운항할 수 있는 카페리. 가격은 1억 달러였는데, 규모가 그 10배인 30만t급 대형 유조선 가격이 7500만 달러 안팎인 것을 보면 여객선의 부가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여객선은 아직 초보수준이다. 여객선은 단거리 항로를 운항하는 페리(Ferry, 승객과 자동차를 함께 실을 수 있는 배는 ‘Car Ferry’), 짧은 기일이나마 밤새워 운항할 수 있는 나이트페리(Night Ferry), 세계일주처럼 몇 달씩 긴 항로를 운항하는 크루저(Cruiser)로 나뉜다.

    크루저는 승객을 태우고 장기간 운항하므로 안락한 승선감을 제공해야 하는 것은 물론, 배는 커도 진동과 소음은 적어야 한다. 인테리어나 편의설비도 호화롭다. 배 위에 호텔 한 채를 얹어놓은 것과 같기 때문에 8만∼10만t 규모에 배값이 4억 달러에 이른다. 카페리 3∼4척을 합쳐놓은 규모다

    . 크루저는 배도 배지만 ‘호텔’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선상 설비(이 부분이 선가의 절반을 차지한다)를 여객선 문화가 발달한 유럽인들의 감각에 맞게 만들어야 하므로 유럽 조선사들이 유일하게 경쟁력 우위를 점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인테리어 등 관련산업 기반이 미약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도 아직 크루저를 생산하지 못했다. 현재 미쓰비시가 일본 최초의 크루저를 건조하고 있는데, 미쓰비시는 배만 만들고 호텔 부분은 아예 오쿠라 호텔에 일임했다고 한다. 삼성중공업 선박영업1팀장 박중흠 상무의 설명.

    “세계 선박 건조량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채 안되지만 선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2%에 이를 만큼 여객선의 부가가치가 높다. 또한 일반 상선은 연간 신규수요 증가율이 3%인데 여객선은 8%나 된다. 우리가 당장은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여객선 개발에 매진해야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최근 EU(유럽연합)가 한국 조선업계를 불공정무역 혐의로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유럽 조선사들은 일반 상선시장을 이미 오래 전에 한국과 일본에 내주고 여객선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은 한국과 업역(業域)이 다르지만,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라선 한국 업계가 언젠가는 여객선 시장까지 위협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미리 견제에 나섰다는 것이다.

    조선업계의 호황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대부분의 업체들이 2∼3년치 일감을 쌓아두고 있어 당장은 걱정거리가 없는 듯하지만, 그 후에도 조선업은 한국을 먹여살리는 젖줄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갈린다.

    R&D 투자 소홀

    산업연구원 홍성인 연구위원은 “97년 말 현재 세계의 선박 가운데 선령(船齡)이 15년 이상 된 배가 47%, 20년 이상 된 노후선박도 30%에 이른다. 선박의 수명이 대체로 20∼25년임을 감안하면 이들 노후선박들은 2005년 이전에 대체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2005년 이전까지는 조선산업의 호황이 어느 정도 유지되겠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건조물량 부족으로 세계 조선업계가 불황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조선공업협회 기획관리부 유재원 과장도 “2000년이 피크였다. 예년의 2년치 수주량을 1년에 채운 지난해 같은 상황이 반복되긴 어렵다. 조선업 전체가 침체의 늪에 빠져들진 않겠지만 수주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선박은 선종별로 경기 사이클이 다른데, 우리 조선사들의 경우 다양한 선종을 건조한 경험이 있어 특정 선종의 경기가 나빠져도 인력과 설비를 다른 선종으로 유연하게 전환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계속 강화되고 있는 해양환경오염규제가 신조선 특수(特需)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다. 89년 알래스카 근해에서 유조선 액슨 발데즈호가 좌초되면서 26만t의 기름이 유출된 사고 이래 미국과 유럽은 바다를 오염시킨 선주에게 사실상 무한책임을 물을 정도로 규제를 강화해왔다.

    IMO(국제해사기구)는 유조선을 비롯한 탱커가 좌초돼도 기름이 유출되지 않도록 2중 선체를 의무화하고, 현재 운항중인 단일 선체 선박은 선령에 따라 단계적으로 운항을 금지하는 새 규정을 2003년부터 발효시킬 예정이다. 이에 따라 노후선박의 조기 교체 수요가 증가하리라는 것.

    그러나 한국 조선업이 경기 변화에도 흔들림없는 경쟁력을 갖추려면 R&D(연구·개발) 투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업체들이 3년은 먹고 살 수 있는 넉넉한 일감을 쌓아놓고 있다 보니 미래를 대비하는 데 소홀하다는 것.

    조선사별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율은 회사마다 기준이 서로 달라 정확한 수치를 비교하기 어렵지만, 1% 안팎에 불과하다는 게 조선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이는 조선업보다 형편이 어려운 다른 제조업종보다도 오히려 낮은 수준이다.

    한 조선 전문가는 “우리 업체들은 신기술을 자체 개발하기보다는 ‘기술은 돈만 있으면 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골치 아프게 R&D에 신경쓰느니 돈을 쌓아두고 있다가 누군가가 프로토타입을 넘어 신기술 실용화에 성공하면 턴키 베이스로 통째 사오는 게 낫다고 여긴다”고 꼬집었다.

    이런 형편 때문에 ISO(국제표준화기구)나 IMO 규격관련 기술에 우리 업체가 공헌한 비중은 세계 조선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무색케 할 만큼 미미하다고 한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국내 다섯 개 대형 조선사와 해양안전시스템연구소가 산업자원부와 과학기술부 프로젝트를 받아 연구하기 위해 컨소시엄을 구성한 조선기술연구조합은 수천만∼수억 원짜리 정부 지원금을 타내는 데 급급할 뿐, 참여 조선업체로부터는 현물이나 현금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홍성인 연구위원은 “미래형 선박은 물론, 너나없이 만들어내는 LNG선의 경우에도 단열창 등의 핵심기술은 아직 국산화하지 못한 마당에 지금과 같은 호황기야말로 R&D 투자의 적기로 여겨야 한다”고 충고했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이 세계 조선시장에서 미국을 제치고 1위로 부상한 것은 선박의 소재를 목재에서 철강으로 전환하는 등 기술혁신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후 1950년대부터 1위에 오른 일본은 50년 가까이 세계의 조선기술을 선도하면서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철판에 리베트를 박아 선체를 이어 붙이던 조선소에 용접공법을 정착시켰고, 토목공사처럼 한 곳에 자재를 쌓아놓고 배를 만들던 시절에 블록조립 공정을 도입, 조선의 ‘흐름생산’을 가능케 했다. 선박의 대형화 기반을 마련한 것도 일본이었다. 그런 조선 선진국이 지척에 있다는 것은 한국 조선업계로선 커다란 행운이었다.

    ‘세계 1위’ 한국 조선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GT, CGT, 파나막스, 아프라막스, VLCC, ULCC…. 일반인에게는 낯설지만 조선업계에서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선박은 그 종류가 다양한 만큼 무게와 크기를 나타내는 용어도 이처럼 다양하다.

    선박의 무게는 주로 톤(t)수로 표기하는데, GT, CGT, DWT, LWT 등이 그것이다.

    총톤수를 뜻하는 GT(Gross Tonnage)는 용적(capacity)을 나타내는 지표로, 선각(船殼)으로 둘러싸인 선체 총용적에서 상갑판 위에 있는 추진, 항해, 안전, 위생관련 공간을 뺀 용적을 의미한다. 1GT는 2.83㎥. 총톤수는 등록세, 검사수수료, 입거료(入渠料) 등의 기준이 된다.

    총톤수에서 짐을 싣는 화물창의 용적만을 나타내는 것이 순톤수(NT·Net Tonnage)다.

    DWT(Deadweight)는 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무게를 나타내는 재화중량. 여기에는 화물, 승객·선원과 그들의 소지품, 연료, 식량, 음료수 등이 모두 포함된다. 순전히 배 자체만의 무게는 LWT(Light Weigt), 즉 경하(經荷)중량이라고 한다. 이는 조선소에서 건조된 배가 선주에게 인도될 때의 배 무게로, 엔진 시동을 걸 수 있는 최소량의 연료와 윤활유, 냉각수, 법정비품 등이 포함된다. 따라서 빈 배 무게인 LWT와 가득 실은 짐 무게 DWT를 합치면 배 전체의 무게가 된다.

    CGT(Compensated Gross Tonnage·보정총톤수)는 배마다 톤수를 나타내는 기준이 다른 데 따른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하나로 통합한 톤수. 선종과 선형이 다양해지면서 기존의 GT로는 배의 부가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자 배를 만드는 데 소요된 작업시간 등 배의 부가가치 정도에 따라 선종과 선형별로 환산계수를 정한 다음 이 계수를 GT에 곱해 산출한 톤수가 CGT다.

    예컨대 1만GT의 컨테이너선과 1만GT의 여객선은 총톤수는 같지만, 후자를 건조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높은 기술이 요구되므로 CGT 환산계수는 전자가 1.2, 후자가 3.0이다. 따라서 1만GT 컨테이너선은 1만2000CGT, 1만GT 여객선은 3만CGT가 된다.

    또한 선주가 살물선(撒物船, Bulk Carrier·곡물 석탄 광석 등 가루나 알갱이 상태의 화물을 포장하지 않은 상태로 선창에 실어나르며, 화물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입, 분사한다)과 유조선을 발주할 때는 그 선박이 어느 항로에 투입될 것인가에 따라 배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크기를 나타내는 호칭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살물선

    ·핸디 사이즈(Handy size)-글자 그대로 세계 어느 나라 항구에도 손쉽게 입항 가능한 소형 살물선으로 대개 2만∼4만t급이다. 비교적 작은 항구를 드나들기 때문에 선박 자체에 하역장치를 갖추고 있다.

    ·파나막스(Panamax)-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선형. 배의 폭이 32.3m를 넘으면 안되며 6만∼7만t 규모가 대부분이다. 배의 밑바닥을 파나마 운하 밑바닥처럼 평평하게 만든다.

    ·케이프 사이즈(Cape size)-남아프리카공화국 동해안의 석탄 수출항 리처드베이에 입항 가능한 최대 선형. 과거에는 길이 314m, 폭 47.25m의 선박으로 제한됐는데 요즘은 항구가 확장돼 이런 제한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이런 크기의 10만∼15만t 선박을 ‘케이프 사이즈’라고 부른다.

    ▲유조선

    ·아프라막스(Aframax)-‘Average Freight Rate Assessment Maximum’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 운임, 선가 등을 고려했을 때 최대의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인 사이즈란 뜻으로 통상 8만∼11만t급 선박을 일컫는다.

    ·수에즈막스(Suezmax)-만재한 상태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최대 선형으로 13만∼15만t급 선박이다. 배의 길이가 335.28m, 폭이 64m 이하라야 한다. 배의 밑바닥을 수에즈 운하 밑바닥처럼 뾰족하게 만든다.

    ·VLCC-‘Very Large Crude oil Carrier’의 약자. 20만∼30만t 규모의 대형 유조선을 가리킨다.

    ·ULCC-‘Ultra Large Crude oil Carrier’의 약자. 30만t급 이상의 초대형 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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