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공산업 없이 우주산업 없다.” 과거 30년은 날고 싶은 ‘거위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이 일관되게 항공산업 정책을 펼쳐온 기간이었다.
- 앞으로의 30년은 이 꿈을 실현하는 기간이다. 항공·우주산업을 성공적으로 육성하려면 정권에 따라 바뀌지 않는 일관된 항공정책이 있어야 한다.
-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항공산업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1 한국이 최초로 독자 개발한 KT-1 기본훈련기 2 한국 최초의 초음속기인 T-50
조선인 최초의 조종사 안창남은 ‘금강호’를 몰고 식민지인 조국에 나타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전쟁의 사연을 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 설계의 ‘해취호’와 그 뒤를 이은 ‘부활호’‘통해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자주국방의 표상으로 추진된 ‘제공호’와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해 항공기 수출 시대를 연 기본훈련기 KT-1과 고등훈련기 T-50의 생산 과정은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중견 항공 국가로 세계와 우주를 향해 비상하고자 한다. 외국 전투기에 의존해온 굴레를 벗고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개발해보자”는 의지와 비전은 밝은 면이다. 자주국방을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해 국산 항공기 개발의 초석을 놓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2000년대 한국형 전투기를 만들겠다’며 선진 항공기술 도입을 전제로 한 한국형 전투기사업(KFP)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 한국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KFX사업을 펼치고자 한다.
항공산업의 빛과 그림자
KFX사업은 항공 분야의 산업과 기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한국 항공업계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분명한 중간 목표다. KFX사업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한국은 KFX를 넘어 그 이상의 세계로 날아가야 한다. 항공력을 외국에 의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항공 선진국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과 막강한 인프라에 눌려 지레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패배주의와 비관주의가 큰 장벽이다. 소수의 백인 국가가 주도하는 항공 분야에 후발 주자인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는 항공정책과 국산 항공기보다 외국 항공기의 직구매를 선호하는 군의 정서도 항공산업 발전을 어렵게 한다. 미래에 필요한 핵심기술 축적을 곤란하게 하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략적인 사고능력의 결핍 등 대한민국 항공이 날아야 할 창공엔 두꺼운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항공산업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대립했다. 우리의 산업화는 기계산업으로 출발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자, 통신, 소재 분야로 발전했다. 이것이 선진 항공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자 다양한 국제협력을 이끌어내는 도약대다. 다른 나라들이 백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항공 선진화를 30년 만에 이룬 비법이다.
일반적으로 항공산업은 창 정비→라이선스 조립(면허생산) 및 부품 국산화→독자개발 및 국제공동개발 순으로 발전한다. 교과서적인 이러한 발전 경로를 걷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한 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항공기 제작 경험을 쌓았다.
건국기, 부활호, 해취호…
전쟁 시인 1952년 우리나라에서 설계해 만든 최초의 항공기 부활(復活)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부활호는 85마력짜리 왕복엔진을 장착한 길이 6.6m, 폭 12.7m, 높이 2.07m의 경비행기급으로 총 3대가 제작됐다. 1954년 비행시험을 했다는 기록을 남긴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04년 경북 경산의 한 고교 지하창고에서 기체가 발견됐다. 이름대로 역사 속에 부활한 부활호는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영구 보존된 문화재가 되었다.
해취호(海鷲號·물수리라는 뜻) 제작은 부활호보다 앞선 1951년 이루어졌다. 해취호는 미군이 쓰다가 추락해서 버린 AT-6 텍산 연습기를 주어다 부낭(浮囊·바다나 호수에 떠 있게 해주는 공기주머니)을 달아 해상에서 사용하도록 개조한 수상비행기다.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개조한 것이니, 들어간 것은 ‘현란한 손재주’다.
한국인이 최초로 제작한 항공기이기는 하지만 미군 항공기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에 국산 항공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미국의 T-6 연습기를 개조한 NK-1 통해호도 제작했다. 그러나 통해호는 취역 석 달 만에 바다에 추락했다. 해군 항공반은 새로운 수상항공기 제작에 도전해 1954년 6월 서해호를 세상에 내놨다. 미 공군의 L-5 연락기 엔진을 토대를 제작한 서해호는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25전쟁 전 우리가 최초로 보유한 군용기는 L-4 연락기였다. 1940년대 제작돼 1948년 9월 13일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으로부터 10대를 인수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L-4는 여수·순천사건이나 지리산 공비 관련 작전에 투입됐다. L-19 연락기가 도입되면서 1954년 퇴역했다. L-4와 함께 운용했던 L-5 역시 무장이 없고 골조도 간단한 연락기였다. 이어 한국은 한결 나은 T-6 텍산 훈련기를 캐나다에서 10대가량 사왔다. 이러한 군용기는 정부를 세울 때 들어온 것이라 ‘건국기’로 통칭됐다.
6·25전쟁기 한국 공군은 미 공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F-51D 머스탱을 도입해 지상공격용으로 투입했다. 우리는 이 전투기를 흔히 ‘무스탕’으로 불렀다. 북한군의 중요 보급루트 중 하나인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시킨 것이 바로 머스탱이었다. 그러나 머스탱은 제트엔진을 달지 않았다. 당시 제트엔진은 첨단 전투기에만 탑재됐다. 제트엔진을 단 F-86 세이버는 미 공군만 운용해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1 한국에서 최초로 설계한 수상비행기 해취호 2 수상비행기 통해호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은 F-86 세이버를 도입해 제트전투기 보유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1990년대까지 한국 공군에서는 소수의 F-86F가 사용됐으나 현재는 모두 퇴역해 F-51과 함께 전쟁기념관 등에 전시돼 있다. 이 시기 우리는 부활호와 해취호 통해호 서해호 등을 제작하며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웠으니 항공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겠다.
이어 항공산업 진입기로 들어섰다. 1955년 L-19 정찰기의 창 정비로 시작된 이 시기는 1970년대 초 C-130 수송기 등의 정비로 이어졌다. 창 정비는 격납고에서 항공기의 각종 시스템을 사전 점검하고, 때로는 완전분해해 주요 부위의 상태를 검사하는 것이다. 비파괴검사 등으로 발견한 결함을 수리 보강해 성능을 개선하는 전 과정을 말한다.
창 정비에는 고가의 장비와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차 정비에 익숙해지면 항공기의 구조와 비행 원리에 정통한 전문가를 다수 확보할 수 있다. 손재주가 뛰어난 우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둔 미군의 공격기와 수송기, 헬기까지 창 정비하게 되었다. 이어 성능개량도 하는 종합정비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항공기는 기둥 없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 여러 장비를 넣고 연결해 봉(縫)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치공구와 다른 별도의 치공구를 사용한다.
따라서 항공기의 창 정비를 거듭하면 작업공정을 어떻게 구성하고 각각의 공정에 필요한 치공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인다. 이러한 노하우는 항공기 제작의 전(前) 단계인 면허생산과 기술도입 생산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시기 창 정비를 주도한 것은 대한항공이었다. 민항기 정비를 통해 능력을 쌓아온 대한항공은 전투기와 수송기 같은 군용기 정비에 도전했다. 대한항공의 군용기 정비술은 상당히 발전해서, 미 7함대의 항공기와 동남아에 전개해놓은 미 공군의 F-4 팬텀기, F-5E와 F-5F 기, UH-1 헬기, C-123과 C-130 수송기, 500MD 헬리콥터까지 창 정비했다. 물론 한국 공군의 전투기도 창 정비했다. 창 정비의 마지막 단계가 기체 표면 작업이다. 1970년대 말 대한항공은 기체 표면작업 기술을 확보해 완벽에 가까운 창 정비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창 정비로 내디딘 첫걸음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은 자주적 항공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경종(警鐘)이었다. 침투했다가 도주하는 북한 특수부대원을 추적하는 비정규전이 펼쳐짐에 따라 정부는 헬기 도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AH-1 코브라 공격헬기와 UH-1 기동헬기가 너무 비싸 싼 헬기를 찾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국 휴즈 사가 민수용으로 만든 소형 헬기를 군수용으로 개조한 500MD를 선택해 1976년 4월 조립생산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대한항공을 면허생산 업체로 선정했다. 500MD는 민수용 헬기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탑재한 것이었다. 계약 1년 만에 1호기를 출고한 대한항공은 꾸준히 생산해 1988년까지 308대의 500MD를 육군에 납품했다.
대한항공은 단순한 조립에 머물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부품 국산화를 추진해 금액의 42%에 달하는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의 500MD는 무장이 간단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대전차미사일인 ‘토우’ 4발을 탑재할 수 있는 ‘500MD 디펜더’도 158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500MD 디펜더를 제작하려면 새로운 투자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대한항공은 직접 투자도 했다. 500MD 면허생산은 자주국방과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에 부응한 모양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항공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항공공업의 육성·지원을 위한 항공공업진흥법이 제정되었다. 보조금 지급과 같은 유치 단계의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항공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대한항공은 1980년 당시로서는 고성능 초음속기라 할 수 있는 미국 노스롭 사의 F-5F기를 면허생산하기로 했다.
대한항공이 면허생산한 제1호 F-5F기는 1982년 9월 9일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정부는 이 전투기를 ‘제공호’로 명명했다. 제공호 조립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추진됐는데, 국방과학연구소가 추진한 미사일 개발과 더불어 한국이 독자적인 무기체계를 갖추는 신기원으로 평가됐다. 제공호 제작에 필요한 기술은 노스롭이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공정은 대항항공 기술진이 수행했다. 전투기의 핵심 구성품인 엔진 부분을 20% 국산화함으로써 항공산업의 새 시대를 열었다.
2004년 복원된 한국산 항공기 부활호
항공기를 독자 개발하려면 기체 설계에 필요한 항공역학적 지식과 해석 능력, 설계 능력이 필요하다. 실제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부품 생산기술과 조립기술, 시험비행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당시는 이 능력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할 경제력이 없었다. 면허생산이나 공동생산이 항공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공호 생산은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로 한반도의 안보 불안이 가중되던 시기에 이뤄진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면허생산은 외국에서 개발을 완료한 항공기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거나 일부 부품만 국내에서 생산해 조립하는 것이라 독자적인 전투기 개발과는 거리가 있다. 제공호의 면허생산은 1986년 종료됐기에 어렵게 마련한 생산시설과 노하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대두되었다.
그 무렵 항공업계에 ‘우리가 직접 항공기를 개발해보자’는 자주국방 세력이 등장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내부에서 ‘미국 전투기로부터 독립하자. 언젠가는 우리 전투기로 영공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강력히 대두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군용 전술통제기와 육군이 쓸 30인승 경수송기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5공화국 정부는 한국의 독자적 무기체계 개발을 견제하는 미국을 의식한 듯, 검토단계에서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묵살했다. 미 방위산업체의 집요한 로비에 흔들린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노스롭 사가 F-5를 이을 전투기로 내놓은 F-20 도입을 검토했다. 그런데 1986년에 경기 성남공항에서 시험비행을 하던 이 전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F-20 도입이 중단됐다.
5공 세력은 당시 미국이 새로 내놓은 F-15 도입을 추진하다 거절당했다. 전두환 정부는 미국 전투기를 도입해 전력을 강화하고 동맹을 강화하자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제공호 생산으로 이미 항공산업 기반이 마련됐으니 자주적 방위력을 확보하기 위해 항공기를 개발하자는 대의가 확산됐다. 그리하여 1985년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공군과 각 분야의 항공전문가들이 모여 항공산업육성위원회를 결성했다. 범정부적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서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군 전력 증강의 핵심은 항공력이다. 미국이 유도무기 개발 제한의 굴레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 능력과 기술을 갖춰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훈련기로 도약한 항공기 개발
이 시기 삼성항공과 대우중공업이 대한항공이 독점적으로 구축한 항공산업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존 사업인 제공호 생산은 종료되고 후속사업은 묘연한 상황이라 국민의 피와 땀으로 조성한 대한항공의 항공기 생산시설은 활용되지 못했다. 각종 치공구가 방치되는 등 쌓아온 항공산업의 성과가 유실되는 위기상황에 놓였다. 이런 난맥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항공기 개발사업이 요구되었다. 여기에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뛰어듦으로써 항공산업은 새로운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항공의 미래를 개척할 사업의 우선 고려 대상은 훈련기 개발이었다. 1987년에 국방과학연구원 연구팀이 내놓은 훈련기 개발사업을 검토한 국방부는 국과연이 기본훈련기를 개발하고, 공군이 고등훈련기를 개발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1988년에 착수한 것이 기본훈련기를 개발하는 KTX-1 사업이다.
KTX-1사업은 터보프롭 엔진으로 기술 난도가 낮은 저속미 초중등 훈련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개발 업체로는 대우중공업이 선정되었다. 대우중공업은 사내에 ‘항공결사대’를 조직해 550마력의 엔진을 탑재한 KTX-1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KTX-1 시제기를 제작해 시험비행을 할 때 갑자기 조종석이 사출돼 시제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국내 기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해외 도입으로 훈련기를 확보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KTX-1은 시험비행을 하면서 계속 출력을 높였다. 1991년 12월 12일 첫 비행에 성공한 KTX-1은 ‘여명(黎明)’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올 때는 950마력 엔진으로 바꿔 달고, 이름도 ‘웅비(雄飛)’로 변경되었다. 영어 이름은 KT-1이 되었다. KT-1은 2000년부터 공군에 납품돼 노후화된 T-37 중등훈련기를 대체했다. 국산 항공기로서는 최초로 터키,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되는 기록을 세웠다.
KT-1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컴퓨터로 100% 설계된 항공기다. 항공기 설계는 요구조건에 따라 만들어보는 ‘개념설계’, 개념설계를 현실화해 만드는 ‘기본설계’, 실제 항공기를 만들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상세설계’로 구분된다. 이러한 설계를 하려면 공기역학과 비행역학, 구조역학 분야가 발전해 있어야 한다. 핵심 부품인 추진기관(엔진)은 물론이고 항공기에 탑재되는 각종 전자장비를 만드는 분야, 그리고 조종장치와 착륙장치, 사출좌석 같은 세부계통 부문이 고루 발전해 있어야 한다.
제작에 필요한 치공구를 만들고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각 부분을 조립하는 데에도 현대적인 공정이 필요하다. 설계에서 조립까지의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우중공업 항공결사대원들은 사생활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항공기 설계와 제작에 매진했다. 그 덕분에 950마력으로 생산된 KT-1은 최고의 회전성능, 낮은 실속(失速)속도를 실현했다. 편대비행과 야간비행, 계기비행, 저·중고도 항법비행, 기동비행이 가능해졌다. 기체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높은 기본훈련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항공산업 역사상 백미는 ‘골든이글’ T-50 고등훈련기라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 사업은 1991년 시작된 한국형전투기사업(KFP)의 기종이 F-16으로 결정되면서, 그 절충교역으로 록히드마틴의 기술을 이전받아 추진된 것이다. 시작할 때의 사업명은 KTX-2였다. 우리는 KTX-2를 초음속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 고등훈련기는 공격기(A-50)로 파생될 수 있고, 나아가 전투기(F-50)로 개량됨으로써 숙원인 한국형 전투기가 될 수도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2000년대 초반 독자적인 전투기가 영공을 날 수 있게 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KFP사업과 함께 KTX-2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항공산업 육성전략을 구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남다른 자주국방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작전통제권 환수와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등 일련의 ‘한국방위의 한국화’ 프로그램을 펼쳤다. 이 프로그램의 중심부에 한국형 전투기 개발이 있었던 것이다.
T-50을 조립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
그 시기 삼성그룹은 항공산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삼성항공을 자회사로 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직접 노태우 대통령을 설득하는 등 공세적인 마케팅을 펼친 끝에 삼성항공이 KFP 기종으로 선정된 F-16(KF-16) 조립 주사업자로 선정되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국방과학연구원의 황매팀이 미국 포트워스에서 KTX-2에 대한 탐색개발을 마치자, 삼성항공은 KTX-2 사업을 민간 주도로 전환해 KTX-2 체계개발 업체로 지정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에 대해 탐색개발을 해온 국방과학연구소는 강력히 반발했다. 공군 일각에서도 고등훈련기 개발에 들어갈 막대한 예산을 의식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그로 인해 KTX-2 체계개발이 지연되었다. 그러다 삼성과 록히드마틴이 개발비를 분담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1997년 7월 항공우주산업개발정책심의회는‘KTX-2는 업체 주도로 체계개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7년 말 한국은 외환위기(IMF 사태)에 빠지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당시 항공업계는 대한항공, 대우중공업, 삼성항공, 현대우주항공이 난립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항공 4개 업체를 통합하고 통합사에는 KF-16 20대를 추가 생산하는 ‘당근’을 주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에 대해 대한항공이 운항사업에 주력하겠다며 회피함으로써, 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이 통합해 한국항공우주산업(KAI·한국항공)을 만들었다. 국가 차원의 항공산업 통합법인이 탄생했으니 UH-60을 조립해오던 대한항공은 조립업체 위치를 상실하고 이를 한국항공에 넘기게 되었다.
한국항공은 록히드마틴과 KTX-2 공동개발을 위한 컨버전스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훗날 T-50으로 명명되는 훈련기인 A형과 A-50으로 불리는 공격기인 B형 개발에 착수했다. 체계개발의 첫 단계는 외형을 정하는 것인데, 1999년 8월에 확정됐다. 이 외형에 맞추어 공기역학, 추진계통, 비행제어, 세부계통, 구조, 항공 전자를 담당하는 세부 개발팀이 구성돼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2조1000억 원이 투입돼 길이 13.14m, 폭 9.45m, 높이 4.91m, 최대속도 마하 1.5, 최대이륙중량 1만3454㎏, 실용상승고도 1만4783m의 T-50이 만들어졌다. 공격기인 A-50은 F-5 전투기 수준의 기동성과 무장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T-50 시제기 조립이 완성돼 출고된 것은 2001년 10월이었다. 이듬해 8월 T-50은 첫 공개 비행에 성공하고, 2003년 2월 19일에는 초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초음속 항공기 제작 시대로 돌입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시제기의 시험비행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수정해 양산이 결정됐다. 양산 1호기는 2005년 8월 30일 출고돼 차례로 공군에 납품되고, 이어 TA-50 전술입문기가 개발돼 납품되었다. 지금은 내년 실전배치를 목표로 FA-50 경공격기의 개발과 양산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T-50은 고도의 기동성을 자랑하는 디지털 비행제어 시스템을 갖고 있어 동급 훈련기 중에서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T-50 양산으로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12번째로 초음속 항공기를 개발한 나라가 되었다. 지난 6월 말과 7월 초 사이 T-50으로 구성된 한국 공군의 곡예비행팀 ‘블랙이글’은 영국의 워딩턴 국제에어쇼와 RIAT 국제에어쇼의 곡예비행 경연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21세기는 우주와 항공, 인터넷과 위성통신 등이 융합되는 시대다. 이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 집약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바로 항공산업이다. T-50을 생산하면서 한국항공은 300여 개의 협력업체를 발전시켰다. T-50 개발 도중 협력업체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한국항공의 중역이 이 업체의 노조를 방문해 설득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항공산업 시작 30년 만에 한국은 회의론과 비관주의를 밀어내고 초음속기를 만드는 나라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항공산업 정책, 법제화해야
그러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집요한 방해와 견제가 그것이다. 그 조짐은 1991년 KFP 사업을 진행할 때 미 의회와 정부가 미국 업체에 압력을 넣어 핵심 항공 기술이 한국에 이전되지 못하도록 절충교역 상한선을 30%로 제한한 데서 드러난다. 2002년 F-15K를 생산하기로 한 차기 전투기사업(FX)을 진행할 때도 미국은 한국형 전투기 개발에 필요한 항공전자와 비행제어, 무장 등 핵심 기술을 절충교역으로 이전하는 데 난색을 표했다.
방해세력은 국내에도 있다. 정치권은 항공산업은 장기간 선행투자를 요구하기에 생색이 나지 않는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는다. 소요 군은 국내의 항공기 개발능력을 불신해, 외국 항공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항공은 2006년부터 육군의 중형 기동헬기 개발에 도전해 2010년 ‘수리온’으로 명명한 중형 기동헬기 시제기를 내놓았다. 그리고 시험비행을 거듭해 양산 허가를 받음으로써 올해 9월 양산 1호기를 내놓는다. 육군용 중형 기동헬기 개발은 성공한 것이다.
애초 이 사업이 성공하면 이 헬기를 토대로 중형 공격헬기를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육군은 수리온을 플랫폼으로 공격헬기를 만든다는 안을 거부하고 이보다 소형에 경무장을 한 무장헬기 사업을 별도로 추진했다. 무장헬기는 민수·군수 겸용으로 추진된다.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어 탑승용으로 제작한 것은 민수, 무장을 한 것은 군수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형 공격헬기는 해외에서 직도입하기로 했다. 애초 계획대로 중형 공격헬기를 제작했으면 한국은 굳이 대형 공격헬기를 보유할 필요가 없다. 북한의 기동전력은 대형 공격헬기가 아닌 중형 공격헬기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은 성능이 입증됐다는 이유로 해외의 대형 공격헬기 도입을 결정해, 국내 헬기 산업이 발전할 기회를 봉쇄했다. 이렇게 군사와 산업이 따로 가기에 우리는 세계 6위권의 국방비를 지출함에도 항공산업은 여전히 10위권 밖에 머물러 있다. 언제까지 외국 업체의 배만 불리는 의존과 종속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현재 공군의 노후한 F-4, F-5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KFX 보라매사업의 탐색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은 최초 소요가 제기된 후 지지부진하다 어렵게 탐색개발이 시작되었다. KFX 사업은 더 이상의 지연 없이 진행돼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뀌는 정책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막는 걸림돌이다. 항공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난무한다. 그로 인해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실종되고 있다. 소요 군과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업체 등은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주도권 경쟁을 벌여 사업관리의 비효율성을 초래했다.
앞으로의 30년을 위해
2010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무기 체계개발 사업을 정부 주도에서 민간 업체 주도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는 다시 정부 주도로 전환해 업체들이 반발하는 행태가 3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모두가 협력해야 할 시기에 엉뚱한 싸움으로 항공산업의 성장동력을 잠식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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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기업과 정부, 군은 2030년 우주시대를 열 수 있도록 장기 발전정책을 합의해 결정하고 이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정치논리에 춤추지 않는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지난 30년은 성공적으로 발전했다. 앞으로의 30년도 비약적으로 도약하려면 우리는 일관된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정부 수립 후 60년간 우리가 만들어온 항공 발전 역사의 교훈이다.